산하의 오역
1994년 2월 13일 전사 시인의 영원한 자유
대학 1학년, 특히 1학기는 뭐니뭐니해도 새로운 지식의 홍수에 휩쓸리는 시기였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이름들, 사건들, 또는 배웠지만 영 내막이 달랐던 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나는 한 시인의 이름을 두고 크게 놀랐다. 아니 이 시인이 이런 시를 썼단 말인가. 교과서에서는 그렇게 서정적이었고 부드러운 느낌의 시인이었던 사람이 이렇게... 살벌하고 거부감마저 이는 시를 쓰다니. 궁금증은 풀어야 잠이 오는 건 이제나 저제나 마찬가지였기에 선배를 붙잡고 물었다. "김남조가 이런 사람이었나요. " 그러자 선배는 불쌍하다는 듯 내 얼굴을 흘낏 훑더니 이렇게 폼잡으며 뇌까렸다. "니가 아는 건 김남조고 니가 묻는 건 김남주다."
모음 하나 때문에 망신을 당한 건 어쩔 수 없었으되 그것은 내가 김남주라는 시인을 알게 된 첫 순간이었다. 열심히 배우던 노래들의 작사자 또한 김남조가 아니라 김남주였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했던 건 김남조가 아니라 김남주였다.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고 다리 아프면 서로 기대며 이 길을 함께 가자던 것도 '김남주'였다. 내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 그는 감옥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의 시를 기꺼워하지는 않았다. 그의 시는 에두른 함축보다는 죽창같이 곧고 날카로웠던 탓이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였다기보다는 대개 각성한 사람들에게 결기를 북돋우는 구호 같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느낌이니 시비 금지) 그런데 술자리에서 이 말을 했을 때 한 선배가 그런 말을 했다. 너 같으면 네 입을 틀어막히고 산다고 했을 때 가끔씩 그 혀가 풀리면 어떨 거 같냐고. 욕지거리부터 나오지 않겠냐고. 그것이 무슨 말인지는 곧 알게 됐다.
당시 대한민국 교도소에는 집필의 자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쓴 것이 14세기의 감옥이었고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창조한 곳도 옥중이었고, 하다못해 신채호가 조선 상고사를 쓴 것도 일제의 감방 안이었는데 20세기 말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수인 김남주는 자신의 시를 달달 외워 면회 온 외부인사나 가족, 출감하는 학생들에게 구술해서 전해주기도 했고, 우유곽을 속 은박지에 못으로 한 자씩 새겨 넣은 시들을 변기 안에 감춰두었다가 몰래 내보내야 했다. 나중에는 그 열정과 신념에 감동받은 교도관이 그 일을 몰래 해 주기도 했다. 그 시들을 묶은 것이 내가 읽은 <나의 칼 나의 피>였고 <조국은 하나다>였다. 함축도 늘어놓은 뒤에 하는 일이고, 절제는 풍성함을 이룬 뒤에야 얻는 미덕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그의 시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바다에 가서 쓰리라 모래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파도가 와서 지워 버리면 그 이름/ 산에 가서 쓰리라 바위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세월이 와서 지워 버리면 그 이름 가슴에 내 가슴에 수놓으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우유곽 은박지에라도 못으로 끄적이던 시인의 모습을 어찌 지우며,
“자유 좀 주세요 자유 좀 주세요 강자 앞에 허리 굽히고 애걸복걸하면서 동냥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직립의 인간인 나는“이라는 절규 앞에서 0.7평 독방에서 곡기를 끊으며 저항하던 그 결연함을 어떻게 떨칠 수 있단 말인가.
정부에 대해 비판만 하고 독재적 헌법에 뻥긋만 해도 ‘사형’이 가능하던 긴급조치의 미친 시대에 부잣집 담을 넘어 그 재산을 털어서라도 맞서고자 했던 전사(戰士)의 시는 피 끓는 젊음들의 노래가 되었고 다리 약한 이들의 디딤돌이 되었고 맘 상한 이들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되었다.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는 부르짖음 앞에서 많은 주먹이 쳐들려졌고 ‘김남주’의 이름은 적어도 80년대의 대학 사회에서는 ‘김남조’에 댈 것이 못되는 높다란 봉우리였다.
그는 1988년이 저물 무렵에야 석방됐다. 9년 3개월만이었다. 그는 영웅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의 젊은이들과 시인들이 그를 소망했고 그는 마다않고 전국을 누비며 자신의 생각과 시를 들려 주었다. 그의 시 낭송은 대한민국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감동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출옥 열흘뒤에 맞이한 1989년은 세계적인 변환기였다. 6개월 뒤에는 베이징에서 인민해방군의 손에 인민들이 짓밟히더니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 속에 동구권이 무너지고 그 해 말은 루마니아의 공산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벌집이 된 시체가 장식했고 다음 해에는 동독이 무너졌고, 그 다음 해에는 소련마저 없어졌다. 그리고 그에 발맞춰서 김남주를 원하는 사람들의 성화와 독촉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거기에 이미 수인(囚人)이라는 아우라가 사라진 자연인 김남주에 대한 존경의 념도 쉽사리 사그라들었다. 그의 동지이자 아내였던 박광숙의 다음과 같은 회고는 읽는 사람의 낯을 시뻘겋게 달아오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때 우리가 목동 이십 평 임대 아파트에 살았는데, 운동하는 사람들은 김남주가 어떻게 이렇게 잘 살 수 있냐고 그랬어요. 이거 자기 것도 아니고 우리 마누라가 산 거라고 그래도 마찬가지였죠. 통일에 대해 한 마디 하면 주사파는 주사파대로 비판하고, 피디는 피디대로 비판을 하고. 어떤 학생들은 아예 앞에 대놓고 말하더라구요, 실망했다고.” 한 사람을 추켜세우기도 잘하지만, 대개는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기를 더 잘했던, 본받기보다는 재단하기를 좋아하고, 깨닫기보다는 깨달음을 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 더 많았던 우리의 역사는 김남주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김남주는 췌장암에 걸렸다. 그는 “불알을 돌로 깨버리는 것 같은”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부인 박광숙이 제발 비명이라도 지르고 소리라도 내라고 사정을 할 정도로. 암이 마치 그가 목숨 걸고 싸웠던 독재라도 되는 양, 병에 지기 싫어했고 아픔에 항복하기를 거부했던 그가 결국 1994년 2월 13일 오늘 가시밭길로 점철된 그의 인생 경로에 종지부를 찍는다. “오늘 /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의 죽음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라고 한 그의 시 (전사 2)는 마치 예언과도 같았다.
출옥 후 얻은 그의 아들의 이름은 토일(土日)이었다. 성이 김(金)이니 김토일, 즉 ‘금토일’이었다. 노동자들이 월화수목 노동을 한 뒤 금토일은 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그의 아들의 이름이 되었다.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농담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요즘, 마흔을 넘어 아들을 안은 아버지의 감동으로 지은 이름이 새삼 정겹고 절실하다. 지칠줄 모르고 타올랐던 잉걸불같은 시인 김남주가 1994년 2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1994년 2월 13일 전사 시인의 영원한 자유
대학 1학년, 특히 1학기는 뭐니뭐니해도 새로운 지식의 홍수에 휩쓸리는 시기였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이름들, 사건들, 또는 배웠지만 영 내막이 달랐던 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나는 한 시인의 이름을 두고 크게 놀랐다. 아니 이 시인이 이런 시를 썼단 말인가. 교과서에서는 그렇게 서정적이었고 부드러운 느낌의 시인이었던 사람이 이렇게... 살벌하고 거부감마저 이는 시를 쓰다니. 궁금증은 풀어야 잠이 오는 건 이제나 저제나 마찬가지였기에 선배를 붙잡고 물었다. "김남조가 이런 사람이었나요. " 그러자 선배는 불쌍하다는 듯 내 얼굴을 흘낏 훑더니 이렇게 폼잡으며 뇌까렸다. "니가 아는 건 김남조고 니가 묻는 건 김남주다."
모음 하나 때문에 망신을 당한 건 어쩔 수 없었으되 그것은 내가 김남주라는 시인을 알게 된 첫 순간이었다. 열심히 배우던 노래들의 작사자 또한 김남조가 아니라 김남주였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했던 건 김남조가 아니라 김남주였다.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고 다리 아프면 서로 기대며 이 길을 함께 가자던 것도 '김남주'였다. 내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 그는 감옥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의 시를 기꺼워하지는 않았다. 그의 시는 에두른 함축보다는 죽창같이 곧고 날카로웠던 탓이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였다기보다는 대개 각성한 사람들에게 결기를 북돋우는 구호 같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느낌이니 시비 금지) 그런데 술자리에서 이 말을 했을 때 한 선배가 그런 말을 했다. 너 같으면 네 입을 틀어막히고 산다고 했을 때 가끔씩 그 혀가 풀리면 어떨 거 같냐고. 욕지거리부터 나오지 않겠냐고. 그것이 무슨 말인지는 곧 알게 됐다.
당시 대한민국 교도소에는 집필의 자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쓴 것이 14세기의 감옥이었고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창조한 곳도 옥중이었고, 하다못해 신채호가 조선 상고사를 쓴 것도 일제의 감방 안이었는데 20세기 말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수인 김남주는 자신의 시를 달달 외워 면회 온 외부인사나 가족, 출감하는 학생들에게 구술해서 전해주기도 했고, 우유곽을 속 은박지에 못으로 한 자씩 새겨 넣은 시들을 변기 안에 감춰두었다가 몰래 내보내야 했다. 나중에는 그 열정과 신념에 감동받은 교도관이 그 일을 몰래 해 주기도 했다. 그 시들을 묶은 것이 내가 읽은 <나의 칼 나의 피>였고 <조국은 하나다>였다. 함축도 늘어놓은 뒤에 하는 일이고, 절제는 풍성함을 이룬 뒤에야 얻는 미덕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그의 시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바다에 가서 쓰리라 모래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파도가 와서 지워 버리면 그 이름/ 산에 가서 쓰리라 바위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세월이 와서 지워 버리면 그 이름 가슴에 내 가슴에 수놓으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우유곽 은박지에라도 못으로 끄적이던 시인의 모습을 어찌 지우며,
“자유 좀 주세요 자유 좀 주세요 강자 앞에 허리 굽히고 애걸복걸하면서 동냥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직립의 인간인 나는“이라는 절규 앞에서 0.7평 독방에서 곡기를 끊으며 저항하던 그 결연함을 어떻게 떨칠 수 있단 말인가.
정부에 대해 비판만 하고 독재적 헌법에 뻥긋만 해도 ‘사형’이 가능하던 긴급조치의 미친 시대에 부잣집 담을 넘어 그 재산을 털어서라도 맞서고자 했던 전사(戰士)의 시는 피 끓는 젊음들의 노래가 되었고 다리 약한 이들의 디딤돌이 되었고 맘 상한 이들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되었다.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는 부르짖음 앞에서 많은 주먹이 쳐들려졌고 ‘김남주’의 이름은 적어도 80년대의 대학 사회에서는 ‘김남조’에 댈 것이 못되는 높다란 봉우리였다.
그는 1988년이 저물 무렵에야 석방됐다. 9년 3개월만이었다. 그는 영웅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의 젊은이들과 시인들이 그를 소망했고 그는 마다않고 전국을 누비며 자신의 생각과 시를 들려 주었다. 그의 시 낭송은 대한민국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감동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출옥 열흘뒤에 맞이한 1989년은 세계적인 변환기였다. 6개월 뒤에는 베이징에서 인민해방군의 손에 인민들이 짓밟히더니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 속에 동구권이 무너지고 그 해 말은 루마니아의 공산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벌집이 된 시체가 장식했고 다음 해에는 동독이 무너졌고, 그 다음 해에는 소련마저 없어졌다. 그리고 그에 발맞춰서 김남주를 원하는 사람들의 성화와 독촉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거기에 이미 수인(囚人)이라는 아우라가 사라진 자연인 김남주에 대한 존경의 념도 쉽사리 사그라들었다. 그의 동지이자 아내였던 박광숙의 다음과 같은 회고는 읽는 사람의 낯을 시뻘겋게 달아오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때 우리가 목동 이십 평 임대 아파트에 살았는데, 운동하는 사람들은 김남주가 어떻게 이렇게 잘 살 수 있냐고 그랬어요. 이거 자기 것도 아니고 우리 마누라가 산 거라고 그래도 마찬가지였죠. 통일에 대해 한 마디 하면 주사파는 주사파대로 비판하고, 피디는 피디대로 비판을 하고. 어떤 학생들은 아예 앞에 대놓고 말하더라구요, 실망했다고.” 한 사람을 추켜세우기도 잘하지만, 대개는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기를 더 잘했던, 본받기보다는 재단하기를 좋아하고, 깨닫기보다는 깨달음을 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 더 많았던 우리의 역사는 김남주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김남주는 췌장암에 걸렸다. 그는 “불알을 돌로 깨버리는 것 같은”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부인 박광숙이 제발 비명이라도 지르고 소리라도 내라고 사정을 할 정도로. 암이 마치 그가 목숨 걸고 싸웠던 독재라도 되는 양, 병에 지기 싫어했고 아픔에 항복하기를 거부했던 그가 결국 1994년 2월 13일 오늘 가시밭길로 점철된 그의 인생 경로에 종지부를 찍는다. “오늘 /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의 죽음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라고 한 그의 시 (전사 2)는 마치 예언과도 같았다.
출옥 후 얻은 그의 아들의 이름은 토일(土日)이었다. 성이 김(金)이니 김토일, 즉 ‘금토일’이었다. 노동자들이 월화수목 노동을 한 뒤 금토일은 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그의 아들의 이름이 되었다.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농담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요즘, 마흔을 넘어 아들을 안은 아버지의 감동으로 지은 이름이 새삼 정겹고 절실하다. 지칠줄 모르고 타올랐던 잉걸불같은 시인 김남주가 1994년 2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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