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93년 2월 6일 테니스의 검은 별 아서
지금에야 미국 스포츠판에서 흑인들을 갑자기 뺀다면 그날로 문을 닫을 지경이지만 흑인들이 쉽사리 그 판에 끼어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꼭 산하의 오역에 소개하고픈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은 대놓고 "니그로와 경기를 하다니 제기랄" 소리를 들으며 경기에 나서야 했고 최초의 아이스하키 NHL 리거였던 윌리 오리는 면화 세례를 받으면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 뜻은 "면화밭에서 일이나 해라 이 검둥아"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꿋꿋이 이겨냈고 위대한 선수의 반열에 올랐다. 1993년 2월 6일 그런 위대한 스포츠맨 가운데 하나였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아서 애시. 그의 종목은 귀족과 신사의 전유물 같았던 종목, 테니스였다.
그는 1943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한창이던 2차대전 당시의 흑인들은 미 정규군의 전투 병과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기껏해야 취사병이나 공병대로 복무해야 했을 정도로 인종차별은 펄펄 살아 움직이는 현실이었다. 더욱이 그의 고향 버지니아는 인종차별이 자심하기로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는 고장이었다. 심지어 흑인들은 테니스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는 법까지 있었다니 말 다한 셈이다. 그런데 애시는 운이 좋았다. 아버지가 바로 테니스 코트가 있는 공원 관리인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애시는 테니스 라켓을 잡았고 그 소질을 만개해 보일 수 있었다. 테니스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테니스 장학생으로서 1963년 UCLA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하는 개가를 올렸고, 흑인 최초로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 미국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나이 스무 살의 검은 테니스 신동은 차근차근 세계 정상을 향해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1968년은 미국의 인종분규와 흑인들의 항쟁이 절정에 이른 때였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치던 흑인들의 희망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고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금과 동메달을 딴 흑인 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칼로스는 시상대에서 국가가 연주될 때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높이 쳐듦으로써 미국내 인종차별에 무언의 그러나 격렬한 저항을 하던 그 해였다. 바로 그 해에 특히도 흑인들의 범접아 어려웠던 귀족적인 스포츠, 테니스에서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 일어난다. 아서 애시가 US 오픈 정상에 우뚝 선 것이다. 흑인이 인종적으로 테니스를 못하는 열성 인자를 지닌 것이 아니라, 단지 접근이 어려웠을 뿐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애시는 그 우승 한 번으로 입증했다.
미국 흑인들은 애시를 자랑스러워했지만 미국을 휩쓸던 흑인들의 인권 투쟁에 동참하기보다는 묵묵히 테니스 라켓만 휘둘러댔던 애시를 조금은 못마땅해 하기도 했고, 이런 저런 비난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런데 애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종 차별에 도전한다. 지구상 최악의 인종 차별 국가로 이름이 높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되는 남아공 오픈 대회에 애시는 참가 신청을 하지만 비자 발급을 거부당한다. 흑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노력한 끝에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의 코트에 설 수 있었다.
“흑인으로서 자존심도 없느냐?”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그가 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경기장에 흑인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는 강경하게 요구했다. 그의 요구대로 흑인들이 운집한 테니스 코트에서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복식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흑인들은 그의 날렵한 스매싱과 네트 플레이를 보면서 열광한다. 그리고 그에게 "Sipho"라 부르며 열광한다. 그것은 줄루 말로 “신의 선물”이라는 뜻이었다. 이때의 기억 때문일까. 넬슨 만델라는 출옥 후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애시를 꼽았다고 한다.
애시 최고의 순간은 1975년 테니스의 본고장이라 할 윔블던 코트에서 우승컵을 거머쥔 순간이었을 것이다. 19세기에 시작된 윔블던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한 흑인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후 그는 심장에 이상이 생겨 테니스를 그만두지만 그의 진가는 라켓을 내려 놓은 뒤에 더 빛났다. 그는 헌신적인 인권 운동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테니스 선수 생활 동안 꾹꾹 눌렀던 포한을 풀어놓기라도 하듯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1985년 바로 그 해에 남아공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가 체포된 것은 그 단면을 극명히 드러낸다.
그러던 그에게 치명적인 비극이 닥친 것은 1990년이었다. 1983년 심장 이상으로 받은 수술 때 수혈받은 혈액 때문에 AIDS에 감염된 것이다. 그는 감염 사실을 스스로 밝힌 뒤 더 열성적으로 사회 활동에 임했다. AIDS 퇴치를 위한 AIDS 연구소의 이사가 됐으며 연구재단을 설립하여 AIDS를 사회에 올바로 알리는 노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처지의 흑인 스포츠 선수들, 그리고 불우 청소년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강연에 열정적으로 나섰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은 윔블던에서 이겼을 때도, US 오픈에서 우승했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UCLA를 졸업하는 날 할머니에게 졸업가운을 입혀 드렸을 때입니다.” 심지어 그는 운동을 직업으로 삼지 말라는 충고까지 하고 다녔다. “대체 여러분 중 몇 명이 NBA 선수가 되고 메이저 리그에서 뛸 것 같습니까? 차라리 공부하여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것이 훨씬 가능성이 높습니다.” 매우 어이없지만 현실적인 충고.
죽기 1년 전 그는 미국 정부의 대 아이티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체포됐다. 시들어가는 육체를 이끌고 마지막까지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헌신했던 그는 부르짖었다. “세상이 나를 테니스 선수로만 기억한다면 나는 실패한 사람이다.” 그가 했다는 말을 곱씹으면서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것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 ‘실패’를 면할 수 있을까. 그는 병석에 누워서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전혀 예기치 않은, 수혈을 통해 자신의 몸에 스며든 불치의 병마에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누구나 한탄할 법한 때에 그는 이런 말을 남긴 것이다.
“불행이 닥쳐온 이 순간 내가 ‘신이시여, 왜 저인가요’라고 묻지 않는 것은, 불행보다 여섯 배는 더 많았던 행복의 순간에 ‘왜 저인가요’라고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걸출한 테니스 선수, 그보다 더 걸출한 인간이었던 아서 애시가 1993년 2월 6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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