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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2.5 추락한 봉황새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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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2년 2월 5일 추락한 봉황새 작전

1982년 2월 5일 제주도에는 비상이 걸려 있었다. 2월 6일 보잉 747 등 대형 항공기가 취항할 수 있는 제주 공항 신활주로 건설 준공식에 전두환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 전두환 대통령과 ‘한편’ 이순자 여사가 매일 9시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하던 무렵, 대통령의 행차는 상감마마 행차와 맞먹는 대행사였다. 군관민이 총동원된 제주 공항은 눈코뜰새없이 돌아갔다. 그런데 이날 오후 제주도경에 설치된 대통령 경호지휘본부를 발칵 뒤집는 소식 하나가 들어왔다.

...


“대통령 순시 때 외곽 경호를 맡은 공수부대 병력이 탄 C123 수송기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통신도 두절입니다.” 제주 공항은 악천후 속이었다. 아니 출발지인 성남 공항도 그랬다. 눈이 계속 내렸고 성남 서울 공항 통제국은 모든 항공기 이륙을 통제하고 있었고 제 5전술 공수비행단에서 C123으로는 이륙 불가 보고를 두 번씩이나 했다고 한다. 하지만 비행기는 떴다. 그 와중에 오간 대화는 알 길이 없지만 공수부대 표어가 인용되었을 것은 같다. 이런 식으로 “새꺄 사나이 태어나서 한 번 죽지 두 번 죽니? 잔말 말고 떠.” 작전명 '봉황새'였다.


 한라산에 무릎까지 파묻히는 눈이 내리고 진눈깨비가 더해지던 날 오후 C123은 사라졌다. 제주 해역에 출동 중이던 군함들과 비행기들이 바다를 뒤졌지만 잔해는 나타나지 않았다. 남은 것은 한라산이었다. 동료 공수부대원들이 출동했다. 비행기 하나 차이로 생사가 엇갈린 이들도 많았다. 산악전에 능숙한 공수부대원들이었지만 겨울 한라산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지리가 어두웠고 겨울 산은 엄혹했다. 그날 밤을 꼬박 새운 수색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얼어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다음 날, 군은 한 대학 등반대로부터 소중한 제보를 받는다. “등반 훈련 중인데 모 지점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어요.”


 마침내 2월 6일 오후 4시경 한라산 해발 1060미터 지점에서 사고기 기체가 발견됐다. 인적 없는 산등성이에 추락, 3등분된 비행기는 바퀴를 하늘로 뻗은 채 뒤집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타고 있던 공수부대원 47명과 공군 장병 6명은 몰사했다. 전두환은 이 소식을 듣고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제주를 떠날 무렵에야 분향소에 들렀고 한 마디를 남긴다. “이번 사건은 조종사 착각으로 일어난 사고다.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겠느냐.” 사고 배경과 원인을 밝혀 재발 방지에 주력하라는 판에 박힌 코멘트도 아니었고 대통령이 사고 원인 밝히고 책임 소재 정하고 인명은 재천이라는 운명론까지 설파하고 있다.


 하지만 졸지에 자식과 가장을 잃은 유가족들은 그 인명들을 아직 하늘에 맡길 수 없었다. 일단 시신이라도 수습해야 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었고, 왜 건장하던 그들이 산산이 부서져 죽어야 했는지를 자세하게 알고 싶은 것도 사람의 도리였다. 언론의 관심은 2월 8일자 석간 동아일보의 단신으로 끝이었고 그 다음은 오로지 ‘군사상 기밀’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사고 수습에 만전을 기하겠다던 군의 약속은 허언이 됐다.


 2007년 7월 오마이뉴스에 보도된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고 후 석 달이 지나 위령비 건립 때 제주도를 찾았던 유족들이 수습한 유골들만 해도 세 포대 분량이었다고 한다. 쉬파리와 까마귀들이 모여들어 있던 곳을 들추면 어김없이 썩어가는 시신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뼈를 발견한 한 유족이 그를 갖고 가겠다고 끌어안자 인솔하던 군인은 허공에다 총을 쏜다. “명령이다 손 떼라.” 하지만 이쪽도 이미 흥분이 도를 넘어 있었다. “내가 군인이냐? 맘대로 해라.” 유족과 당국은 그 뼈를 놓고 신경전을 벌인다. 공항에서는 “도지사의 허락 없이는 시신을 운구할 수 없다.”고 퇴짜를 맞았고 배를 탈 수도 없었다. 결국 그 뼈는 제주도에서 화장되어 동작동 국립묘지에 뿌려질 수 있었다. 결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군화를 신었지만 뼈가 송곳같이 날카롭게 잘려 나갔던” 유해의 최후였다.

 1982년 2월 7일 정확한 상황을 알려주지 않은 채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하는 군의 모르쇠에 진력이 난 일부 유가족들이 부대 상황실 유리창을 깨고 진입했다. 유리창을 깬 것은 세 살과 돌 된 아이의 엄마였다. 남편의 죽음을 밝힌 무엇이든 찾아야 했던 그녀의 손에 잡힌 것은 상황일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가지고 나온 상황일지, 사고 다음 날 아침 8시 45분, 그러니까 사고 기체가 발견되기도 전 박희도 공수특전사령관이 해당 부대 대대장에게 보낸 메시지의 내용은 이랬다. “훈련명칭 변경 - 금번 훈련은 특별 동계 훈련으로 호칭하니 전 장병에게 주지시키기 바람.” 즉 대통령 경호 작전인 ‘봉황새 작전’을 대간첩 ‘특별 동계 훈련’으로 호칭하겠다는 것이었다. 53명의 대한민국 정예 병사들은 대통령 경호를 위해 악천후를 무릅쓰고 출동한 게 아니라 ‘특별 동계 훈련’을 위해 공군의 반대와 공항의 통제를 무릅쓰고 떠난 것이 된다. 이래 놓고 인명이 재천이라고 하면 그 하늘이 노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래도 인명은 재천인 것 같다. 사고가 난 지도 4반세기가 흘렀고 유족들은 하나 둘 한많은 삶을 마쳐 가는데 25년 동안 그 유가족들에게 한 번 응대조차 않은 전두환은 떵떵거리면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현장에 세워진 추모비에서도 이들은 “대침투작전 훈련 중”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 전두환이 맞았다. 역시 인명은 재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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