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9년 2월 4일 함석헌 선생 별세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 뜻 깨달으면 얼(靈),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 영원히 멍에를 메고 맷돌질을 하는 당나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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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5월 잡지 <사상계>에서는 산천초목이 떨 듯한 사자후 하나가 튀어나왔다. 글을 쓴 이는 함석헌. 글을 읽으면서 어떤이는 마음 속이 푸르도록 시원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 얼굴이 새파래졌다.
"전쟁이 지나가면 서로 이겼노라 했다. 형제 쌈에 서로 이겼노라니 정말 진 것 아닌가? 어떤 승전축하를 할가? 슬피 울어도 부족한 일인데. 어느 군인도 어느 장교도 주는 훈장 자랑으로 달고 다녔지 '형제를 죽이고 훈장이 무슨 훈장이냐?' 하고 떼어던진 것을 보지 못했다. 로자는 전쟁에 이기면 상례로 처한다 했건만. 허기는 제이국민병 사건을 만들어내고 졸병의 못 밥 깍아서 제 집 짓고 호사하는 군인들께 바래기가 과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울타리인가?"
21세기에 이 비슷한 얘기를 누가 한대도 안보의식 없다고 팔뚝질을 당할 말이었다. 그런데 전쟁 끝난지 6년이 채 안된 시점에 "형제를 죽이고도 무슨 훈장이냐"는 식으로 일갈했으니 무사하다면 그쪽이 더 이상했다. 그는 당연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철창 신세를 진다.
그는 한국 현대사가 낳은 매우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그 사상의 핵심은 역사와 생명의 주체로서의 사상, 즉 '씨알사상'이다. '씨알' 은 곧 민(民)의 역동적인 생명력이 구체화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역사라고 주장한 것이다. 일제 때부터 불령선인으로 찍혀 감옥을 드나들었고 "도둑같이 온" (그의 표현) 해방 이후 공산 치하에서는 신의주반공학생시위의 배후로 몰려 죽음 일보직전까지 갔고 남으로 내려온 뒤에는 자유당부터 민정당까지 권력 쥔 자들의 눈의 가시였던 그의 생애 속에서 씨알의 발견은 어쩌면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러분!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국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해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질 뿐입니다. 나는 그래서 반대합니다." 는 말은 오히려 예언같다. 그는 민족지상주의와 국가지상주의의 철저한 반대자였고 당대에 대한 경고는 오늘에까지도 유효하다.
그의 사상과 생애를 몇 줄로 담아내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고 그런 무모한 행위는 깨끗이 포기하기로 한다. 그는 걸출한 사상가요 언론인이요 역사 교사이기도 했으나 또한 결점 가진 인간이기도 했고 그래서 날선 공격을 자초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여자 문제가 그것이다. 그를 평생 따른 김용준 교수도 "군사독재가 꾸며낸 이야기라고만은 말하지 않겠다" 했으니 아예 없는 사실은 아닐 것이다. 그 문제로 함석헌은 엄청난 괴로움을 당했다. 어느날 실성한 사람처럼 김용준 교수의 집을 찾아서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게 믿어주는 친구 때문에 내가 살아나가지” (김용준 저 "내가 본 함석헌" 중)
자신의 일생이 송두리째 매도되고 신비화된 선각자에서 희대의 색한으로 굴러떨어지는 상황, 그러나 함석헌은 일어섰다. “지옥 밑바닥에서 보는 하늘은 유난히 높았다”(김용준, 같은 책)고 하면서 말이다.
지옥에 빠져 하늘의 높이를 잴 수 있던 사람. 남과 북 모두에 가족을 두었던 분단의 가슴으로 우리는 왜 이렇게 아픈가 아프지 않으려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평생 자신의 뒷전에 섰던 아내가 파킨슨 병에 걸려 드러눕자 진작 아내를 "믿음의 친구"로 함께 하지 못했음을 후회하며 손수 간호에 나섰던 청개구리같은 남편이었고 자식들 대학 교육 하나 제대로 시키지 못한 변변찮은 아버지, 하지만 강제징집당하는 학생들의 뒤에 대고 하염없이 손 흔들며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빼앗아간 정부에 흔들림없이 맞섰던, 씨알 가운데 으뜸 씨알 함석헌 선생이 1989년 2월 4일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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