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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2.3 초세이 탄광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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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2년 2월 3일 초세이의 비극



바야흐로 대일본제국의 욱일기가 태평양을 뒤덮어가고 있었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를 반신불수로 만들어 놓은 일본은 전광석화처럼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진공했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 동남아 전역에서 일본군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1942년 2월 3일이라면 일본군이 고립된 요새 싱가포르를 포위하고 언제 들이칠지만 가늠하고 있을 때였다. 필리핀에서도,버마에서도, 인도네시아에서도 일본군이 서구 국가들의 식민지 주둔군을 격파해 가고 있었다.

...


 전쟁이 격화될수록 한없이 들어가는 물품이 석탄과 석유였다. 석유야 일본 본토에서 거의 나지 않는 물건이었지만 석탄은 달랐다. 각지의 탄광에서는 한 움큼의 탄이라도 더 캐기 위해 곡괭이질이 분주했고, 갱도는 더 깊이 더 깊이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관부연락선의 기항지였던 시모노세키에서 조금 떨어진 우베 시의 니시카와 해변에서는 바다 한 가운데 솟아 있는 기이한 구조물이 있었다. 그것은 해저까지 파고들어간 초세이 탄광의 송풍구였다. 초세이 탄광은 연간 15만톤의 석탄을 캐내던 일본 최대의 해저탄광이었다.


 이 탄광의 광부들 중 상당수는 조선인들이었다. 일제가 국민징용령을 발한 것이 1939년 7월. 그 이후 약 2백만 명의 조선인들이 ‘모집’되어 일본 각지로 보내졌다. 초세이 탄광의 조선인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1939년부터 42년까지 연인원 1258명의 조선인들이 이곳에서 일했다. 바다 밑 그리고 또 땅 밑의 탄광은 그들에게 작은 지옥이었다.

탄광 내에서 가장 힘들고 위험한 작업에는 골라 투입되었고, 탈주를 막기 위해 쳐진 3.6미터의 담장에 둘러싸인 기숙사에서 갇혀 지내던 그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당시 조선인은 주먹밥과 다꾸앙, 소금물로 식사를 떼우고 하루 12시간 노동이 기본이었다. 20시간 이상 일한 날도 있다" 당시 노동 감독관의 말이다. 그들은 하루 2원의 일당을 받았지만 그나마 ‘저축’을 강요당했으므로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은 그야말로 쥐꼬리였다. 그래도 일본인들은 “한 상자 더 캐고 죽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조선인들을 탄광 속으로 내몰았다.



1942년 2월 3일은 맑은 날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조짐 따위는 하나도 없이 화창하게 열린 하늘이 우베 시 앞바다와 그 푸른빛을 겨루던 날이었다. 그런데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 해저에서 솟아올랐다. 해안에서 1km남짓한 바다 밑에서 암반이 무너지면서 해저갱도에 충격이 가해져 물이 스며 들어 갱도가 붕괴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얼마 전부터 탄광에 물이 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작업을 강행했고 심지어 비번이던 조선인들까지도 투입해서 탄을 긁어내고 있었다. 더 많은 석탄을 위해 갱도 위쪽 즉, 해저 쪽을 파고들었고 천정이 약해지면서 바닷물과 흙더미가 동시에 갱도를 덮쳤다.


 일본 당국은 180여명의 탄광 노동자가 그 안에서 물에 빠져 죽거나 흙더미에 깔려 죽었고 그 중 133명이 조선인이라고 밝혔다. 사고가 나자 탄광측은 갱도로 통하는 탄광 입구를 봉쇄했다. 바닷물이 흘러들어 인근 마을로 침수될 위협이 있다는 것이었다. 죽을 힘을 다해 입구를 찾았던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들 역시 캄캄한 암흑 속 고혼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또 탄광측은 시신을 찾는 작업도 포기하고는 탄광을 폐쇄해 버렸다. 그 후로 지금까지 초세이 탄광에서 죽어간 이들은 바다 밑 그리고 또 땅 밑에 묻혀 있다. 시신 수습도 이뤄지지 않은 마당에 적절한 보상 따위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고, 133명의 조선인들의 삶과 죽음은 역사 속 갱도 속으로 내던져졌다.



그 현장을 지켜봤던 조선인 가운데 하나가 김경봉씨였다. 현재까지 생존해 계시다면 여든 아홉이 되시는데 그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가 처음 확인한 초세이 탄광의 생존자였다. 우리는 우리 정부가 선 지 60년만에, 초세이 탄광의 조선인을 ‘처음으로’ 찾아냈다. (우라질) 포항 출신이던 그는 별안간 들이닥친 일본 경찰에 의해 초세이 탄광으로 끌려갔다.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 반경 열 다섯 시간의 작업 시간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던 그의 뒤에서 “물비상이 났다”는 소리가 들렸고, 바다 위로 솟아 있던 환기구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고래가 물을 뿜는 것처럼 물기둥이 치솟았다고 했다.



그는 사고 3일 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탄광을 탈출했다. 탈출한 강제징용자들에게는 쌀 한 가마니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잡히면 대개 맞아죽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함께 소금국 먹으며 아리랑 부르던 동료들이 생매장되는 꼴을 보고서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는 없었으리라. 그는 효고 현의 조선인 집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일본군에 끌려갔지만 다행히 생존해서 해방을 맞았다. 징용 당시 집단폭행을 당한 후유증으로 거의 오른팔을 쓰지 못하는 노인은 소리를 잃어버린지도 50년이 넘었다. 6.25때 참전하여 청력을 상실한 것이다. 평생을 문맹으로 지내던 그는 몇 년 전 한글을 익힌 뒤 노트에 자신의 경험을 써내리고 있다고 한다.


1942년 2월 3일을 그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날 그는 닫혀 버린 탄광 입구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속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몇 명이나마 기억하고 있진 않을까. 더 이상 기구할 수 없을 정도로 기구한 한 사람의 삶이 그 노트에서나마 온전히 기록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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