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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2.2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작곡가 채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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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3년 2월 2일 작곡가 채동선

지금은 행정구역상에서 없어진 이름이지만 오늘날의 순천, 보성 지역에는 낙안이라는 고을이 있었다. 지금도 낙안읍성은 남아 있지만 낙안 자체는 이리저리 찢겨져 인근 군과 시에 붙여졌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놀라운 변신을 하는 여인 ‘외서댁’의 택호인 순천시 외서면, 그리고 오늘날의 벌교읍 등등은 원래 낙안군이었다. 이 낙안군의 옛 땅이자 <태백산맥>의 고향 벌교에서 한국 ...현대 음악사에서 잊지 못할 작곡가 한 명이 태어났다. 채동선.

그 아버지는 벌교에서 또르르한 부자였다. 당연히 채동선과 그 형제들은 식민지 시대 조선 백성치고는 대단한 호사를 누리며 자랐다. 채동선은 일본 유학을 거쳐 독일에서 음악 공부를 했고 그 여동생 채선엽은 그 이름도 아득한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했으니 구름 위에서 노닌 정도가 아니라 성층권에서 살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채동선의 바이올린은 조선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비싼 악기로 소문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삶은 좀 특이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도 3.1운동 때 경기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서 만세 시위에 적극 가담하여 일본 경찰에 찍혀 버린 배경이 있었다. 독일 유학을 다녀온 후 그는 깔끔한 서양 유학파의 음악 활동을 한편으로 점차 서양 음악의 토착화, 즉 민족적 정서를 담아내는 음악 쪽으로 기울어 갔다. 이 즈음의 대표격인 노래가 당연히 정지용의 시를 가사로 만든 가곡 <고향>이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우리가 잘 아는 정지용의 <향수>와도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부르짖던 고향은 막상 돌아와보니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울고,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은 피폐해졌고 자신을 반겨 줄 사람들은 만주로 감옥소로 타향으로 떠나 있었다고나 할까. 덜컹거리는 호남선을 타고, 압록강 가는 경의선을 실려 동아시아 각지에 흩뿌려졌던 수많은 타향살이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고향을 잃어버린 설움을 달랬다. “에이 그래. 가봐야 예전 고향도 아닌걸 뭐.”


일본 제국주의가 그 주체할 수 없는 팽창주의를 실천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음악계에도 암흑이 깃들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로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를 울렸던 홍난파도, 한국 현대 음악의 거봉이라 할 현제명도 모두 대일본 제국과 천황 폐하의 만세를 부르짖는 어용 음악을 짓고 부르고 연주했다. 홍난파는 모리카와 준이 됐고 현제명은 구로야마 사이민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자처했다. 홍난파는 이른 죽음으로 그 오욕을 끝냈지만 현제명의 어용 음악 활동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자신의 바이올린 스승이었던 홍난파부터 일제에 두 손을 들고 거의 모든 동료들이 무적 황군의 행진곡을 작곡하고 있을 즈음, 채동선만은 모든 활동을 접고 농사꾼으로 변신한다. “조선 사람은 농촌을 알아야 한다”면서 그는 성북동 집에서 수유리까지 매일같이 걸어다니며 양과 닭을 치고 꽃을 길렀다.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주소도 “000 의 00”이라고 조선 글을 꼭 덧붙여 걸어 놓았다. 그리고 밤에는 우리 민요와 국악을 채보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판소리 춘향가의 채보를 완성했고, 전라도 민요 <육자배기>를 악보로 옮기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쉬운 예로 우리가 아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이즈음 그의 손을 거쳐 노래로 남게 된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외로왔다. 태생적으로 우익일 수 밖에 없는 출신성분이었던지라 김순남 등 좌익 음악가들과도 각을 세웠지만 천황 폐하 만세를 노래했던 음악가들과도 그닥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미군정의 문화 정책을 격렬히 비판하고 그에 빌붙은 ‘사대주의자들’을 탄핵하던 채동선의 입지는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그의 작품들을 집 뜰에 묻었다. 깊이 파고 모래와 숯을 넣어 습기를 방지하고, 독에 악보들을 넣고, 다시 철판으로 싼 다음에 묻었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하게 싸둔 작품들을 그는 다시 만나지 못한다. 창졸간에 떠난 피난길, 친구에게 양담배를 얻어 장사도 했지만 특유의 고지식함 때문에 하나도 팔지 못했다고도 하고 막노동을 했다고도 하는데 결국 영양실조와 늑막염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1953년 2월 2일이었다.

그가 세상을 뜬 지 10년 후 그의 아내는 땅에 묻어 두었던 고인의 작품들을 찾아낸다. 하지만 고인의 노래는 세계 어디에서도 겪기 힘든 민망함을 겪는다. 정지용이 한국전쟁 중에 월북했기 때문에 그의 시를 가사로 한 노래의 발표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의 모든 시는 88년에야 ‘해금’된다) 그래서 아내는 고인과 가까이 지내던 이은상에게 부탁했고 <그리워>라는 이름으로 전혀 새로운 가사의 노래가 나왔고, 워낙이 유명했던 노래인지라 시인 박화목이 노랫말을 붙여 부르고 있었기로 한 곡조에 가사가 셋인 노래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한 노래에 가사 셋. 이걸 축복이라고 해야 하나?

하나 더, 이번에는 약간 부아가 치미는 일이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한다. 그런데 홍난파와 현제명은 금관문화훈장을 받는다. 금이고 은이고가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홍난파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현제명까지 채동선보다 더 높은 등급의 훈장을 차지한 것은 개인적으로 무척 불만스럽다. 음악적 성취에 있어서도 그렇거니와 적어도 ‘금관’을 차지하기에는 그의 일제 말기의 행적이 ‘은관’의 채동선에 비해 너무나 처지기 때문이다.

1953년 2월 2일 우리 현대 음악의 거목 하나가 너무 빨리 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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