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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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2월 7일 벌레 먹은 거목의 마지막 날
나라는 망했지만 황제는 살아 있던 시절, 아니 황제로 불리지도 못하고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울화 속에 덕수궁에 머물던 고종은 흥미로운 소식을 듣는다. "조석진과 안중식이 열고 있는 서화 미술회에 소년 천재 화공이 있다 합니다." 고종은 이에 자신의 사진을 보내 모사하게 한다. 아무리 망국의 황제라 해도 용안은 용안이라 아직 약관(弱冠)에 이르지 못한 나이의 소년 화가는 식은 땀을 흘리며 모사했다. 소년의 그림은 고종을 감탄시켰고 고종은 그를 창덕궁에 보내 아들 순종의 어진을 그리게 한다.
그렇게 그린 순종의 어진은 어떤 사진보다 순종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한다. 이마는 드넓고 깔끔하게 손질된 치솟은 콧수염은 언뜻 위엄 있어 보이나 턱선이 약하고 눈빛이 그리 도드라져보이지 않는다. 이후 고종 황제의 어진까지 그리게 되는 이 소년 (고종의 어진은 소실됐다)은 또한 당대의 세도가들을 묘사하기도 했는데, 여흥 민씨 최대의 탐관오리로 이름 높았으며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민영휘와 한일합방 당시 울부짖으면서 저항하는 황후이자 조카로부터 옥새를 빼앗아 갔던 전설의 매국노 윤덕영의 초상화도 거기에 포함된다. 이른바 글자 그대로의 '어용 화가'였던 셈이다. 후일의 그가 산수(山水)와 화조(花鳥) 등 각 부문에 이름을 날렸으되 최고봉의 경지를 구가했던 것은 '인물화'였던 바 그 될성부를 떡잎이 유달리 컸던 셈이다.
이후 기미년에는 자신을 아끼고 사랑했던 고종 황제가 독살당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젊은 나이에 피가 끓었던지 3.1 운동에 가담해서 옥살이를 치르기도 했던 청년 천재 화가는 이후 다시 그림에 전념한다.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그 그림의 깊이와 폭과 기법과 내공은 날이 갈수록 넓어지고 깊어졌고 두터워지고 다양해졌다. 그는 조선 총독부가 개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 즉 선전(鮮展)의 단골 손님이었으며 16회 선전 때에는 조선인 화가로는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는데, 바로 그 해, 1937년 마흔 다섯 살의 절정에 이른 화가는 그의 이름을 '드높인' 그림 하나를 그린다, 그것이 "금차봉납도"다.
화가의 어릴 적 후원자였던 친일파 윤덕영의 처가 회장으로 한때 김활란이었던 아마기 카스란 등이 간사로 참여했던 애국금차회가 금비녀를 빼어 일제의 '성전'(聖戰)을 위한 기념 헌금으로 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일찍이 어용화가로서 그 능력을 천하에 떨쳤던 그의 솜씨는 이 그림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상기된 표정의 부인들과 감동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은 미나미 총독 (또는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 )의 표정은 자못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것을 필두로 그는 그의 능력을 일본군과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바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성도 조선에선 흔하디흔한 김씨에서 '쓰루야마'(鶴山)로 바꿔 버렸다. 그는 조선 화단의 거목이자 최대의 친일 화가가 되어 있었다. 해방 이후 그는 다시 부모가 준 이름을 찾는다. 김은호다. 이당 김은호다.
그는 해방 이후 친일파로 따돌림을 받았지만 아픔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일생에서 민족을 고민했을 기미년 어간의 그 시간보다도 짧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를 따돌리는 이들이 세를 잃고, 되레 그의 왕년의 동료들이 득세했던 시대적 배경과 더불어 이당 김은호가 조선 최고의 화가로 자리하면서 길러냈던 제자들의 힘이었다. 그는 미술 전문 기자로 유명했던 이규일의 평에 따르면 "인정미 넘치는" 스승이었다. 일제 시대, 자신의 제자의 그림이 일본인 심사위원에 의해 저만치 밀려나자 간절히 청하여 그를 다시 뽑게 했고 아끼던 고려청자까지 주저없이 선물했다는 감동적인(?!) 일화가 그를 뒷받침한다. 그렇게 뽑힌 이가 운보 김기창이라고 한다. 제자들이 목숨을 걸만도 하지 않는가.
1948년 남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열리자마자 그는 추천작가 자격으로 참여했고, 그 뒤 심사위원과 추천작가를 지내면서 국전의 화풍과 내용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전체 화단에도 영향력을 키워갔다.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뿐이 아니라 그는 논개부터 유관순, 심지어 이순신까지 그가 별 관심을 두지 않았을 인물들의 영정을 '창조'했고, 오늘날의 5만원권에 그려진 신사임당은 이당 김은호의 제자를 자처하는 화가가 (이걸 가족들과 다른 제자들이 인정하지 않아 말썽이 났지만) "스승의 그림을 보완하여" 그린 것이다. 그는 일생 동안 "최고의 화가"였다. 그 생의 지배자가 누구였든지.
그의 재주는 분명 탁월했다. 음악의 현제명이 그랬고, 문학의 서정주가 그랬듯 ,또 윤치호나 최남선이 그랬듯 범인이 범점할 수 없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고, '친일파'라는 세 글자로 매장시켜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부류에 속하는 이였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미치도록 아쉬운 것은 그들이 그 재능이 동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전혀 없이 역사가 흘러갔다는 점이다. 이당 김은호의 제자 운보 김기창의 말은 곱씹을수록 부아가 돋는다. " 우리 민족은 남이 잘되는 꼴을 못보는가. 존경하는 스승 김은호와의 정 때문에 친일활동을 했을 뿐. 그리고 그 시대엔 다 그랬다. 친일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실력이 없었던 사람이다."
요즘 별안간 "친일파 청산" 얘기가 많다. 나는 여기에 반대한다. 해방된지 60년, 친일파의 손자들이 환갑을 넘은지 한참인 지금 무엇을 어떻게 청산한단 말인가. 가산몰수? 사회주의 혁명이 빠를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청산은 두고두고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적어도 "친일안한 놈은 다 실력 없던 것들"이라는 말에는 반박을 해야 하고, 그들이 내뱉고 저지른 언행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평가가 있어 주어야 한다. 그들이 남긴 빛을 지울 수는 없되, 그들의 그림자 또한 철저하게 들춰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빛과 그림자 모두를 우리 유산으로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1979년 2월 7일. 평생을 영광스런 조명 밖으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이당 김은호가 죽었다. 그는 거목이었다. 하지만 벌레먹은 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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