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8년 1월 28일 남한 핵무기 배치 확인
그 품질에 대해서는 심대한 의문이 있고, 방사능이 거의 검출되지 않았다는 점도 좀 기이하지만 어쨌건 북한은 핵실험을 했고, 그 운반체인 미사일 실험도 감행했다. 제 나라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핵무기에 집착하는 꼬락서니는 심히 유감스럽긴 하다. 심지어 북한을 방문하여 공동선언도 했던 이쪽의 전직 대통령이 서거하는 국상이 났는데 그 기간 중에 핵실험을 감행했을 때에는 참 구제불능인 종자들이라고 한탄도 했었다. 북한 정권의 핵에 대한 추잡하기까지 한 집착과 그를 “자위적인 핵” 따위로 미화하는 덜떨어진 자칭 진보들을 옹호할 생각도 없다. 핵무기는 우리 편 남의 편 골라 죽이는 ‘주체의식’ 따위는 없는 무기이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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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해 보면 그들의 집착이 측은해 보이기도 한다. 당장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았고, 당사자도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량살상무기의 존재를 이유로 전쟁이 벌어지고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몇 년을 숨어지낸 끝에 목이 매달렸던 이라크의 예를 보면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으며, 그를 모면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정상적인 아이큐를 보유한 사람이라면 “이라크에 핵무기가 진짜로 있었더라면 저런 꼴은 당하지 않았으리라”는 계산을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그들에게는 이라크보다 더 오래 되고 깊숙한 트라우마가 있다. 이 트라우마는 1958년 1월 28일로부터 비롯된다.
1957년 6월 21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제75차 본회의에서 유엔군 측은 정전협정 조항 중 하나를 폐기한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한반도로의 무기 반입을 금지하는 13조 D항이었다. 이후 미국은 주한민군의 현대화 작업에 착수한다. 현대화는 곧 핵무장화의 동의어였다. 그리고 마침내 1958년 1월 28일 주한 유엔군 사령부 (즉 주한미군 사령부)는 한국 영토 내 핵무기 도입 사실을 정식 발표한다. 한 술 더 떠 미국은 2월 3일 원자포와 지대지미사일 어네스트 존을 공개한다.
“원자폭탄을 만주에 몇 개 떨어뜨리고 동해에서 황해까지 방사선 코발트를 뿌리고 싶었다.”는 맥아더의 회고가 아니더라도, 전쟁 중 미국은 ‘신중하게’ 핵무기 사용을 검토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던 차에 전쟁 끝난지 만 5년도 안된 차에 남한 내에 핵무기가 공식적으로 배치된 것이다. 그냥 까불지 마라는 겁주기 차원이 아니었다. 1959년에는 공군 핵무기도 한국에 배치되었다. 이후 핵이 장착된 마타도어(Matador) 크루즈 미사일 1개 비행중대가 이남에 상시 배치된다. 마타도어는 1,100km까지 날 수 있는 미사일로서 이북 뿐 아니라 중국과 소련까지를 겨냥한 것이었고 점차 사정거리 긴 미사일로 대체됐다.
1991년 공식적으로 핵무기를 철수할 때까지 미국은 이남내 미군기지에 약 1720여개의 전술핵무기를 갖다 놨었다. 이것은 한반도 1백 평방키로미터당 한 개 이상의 핵무기가 배치된 셈이며, 동해에서 서해까지 200m에 하나씩 핵무기가 배치된 격이었다. 인구밀도는 한국이 방글라데시와 대만에 뒤졌는지 모르지만, 핵 밀도만큼은 전 세계에서 최고였다. 위력면에서도 1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히로시마 급 핵폭탄의 1700배에 달했고, 히로시마의 희생자 수치를 놓고 계산한다면 1억 명을 훨씬 넘는 생명을 앗아갈 위력을 갖고 있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한 이상,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살 수는 없지 않느냐며 비분강개하는 분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얼마나 불안하실까. 나도 솔직히 불안한데. 고양이한테 몰린 쥐는 너도 날 먹으면 죽는다고 쥐약을 삼킨다는데, 체제의 위협 앞에서 그들이 핵무기를 ‘자위용’으로만 묻어둘 가능성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나는 북한이 얼마나 불안했을까 하는 오지랖도 갖게 된다. 조잡한 핵무기 몇 개 머리맡에 있다고 이리 불안한데, 핵탄두 수십 발을 보유하고 있던 군산 공군 기지에서 별안간 폭격기가 떴을 때 그를 포착한 북한 병사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도봉산 탄약 본부에서 미심쩍은 폭탄이 반출되었다는 정보가 있다면 또 얼마나 신경을 썼을까. 1980년대 중반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랜스 미사일이 배치됐을 때 저 물건이 대체 어디로 갈 것인지 얼마나 가슴을 조였을까.
나는 북한의 핵 집착이 짜증나고 우려스러운 만큼 그들이 느꼈을 불안감에 대해 짐작의 폭도 넓어진다. 그들은 그 공포를 1958년 1월 28일 이후 지속적으로 가져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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