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07년 1월 29일 국채보상운동 시작
대구의 출판사 ‘광문사’ 특별회의장. 200여명의 청중들이 숨을 죽이며 충청도 사투리 배어나오는 사장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사장 이름은 김광제. 충청도 보령 출신으로 동래 경무관을 지내던 중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상소를 올렸고, 기타 등등의 이유로 섬에 끌려가 유배 생활을 마친 사람이었다. 그는 영남 물류의 중심지였던 대구에서 보부상 출신으로 독립협회 활동을 했던 서상돈과 손 잡고 ‘광문사’를 조직했는데, 1907년 1월 29일 김광제는 특별한 발표를 할 예정이었다. “.......나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부터 흡연 도구들을 만장하신 여러분 보는 앞에서 부숴 버릴 것입니다.”
난데없는 금연 선언이었지만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200여명의 청중 가운데에는 서울에서 일껏 내려온 장지연도 있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던 바로 그 사람. 사장의 열변은 계속 불을 뿜었다. “황천(皇天)이 감응하여 전국 인민으로 하여금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대사를 무사히 이루시고, 민국을 보존케 하옵소서!” 사장과 부사장의 재떨이와 곰방대를 부숴 버리는 것으로 시작하겠다는 ‘대사’란 바로 1300만원에 이른 국채를 인민의 손으로 갚는 일이었다. “가장 나라를 망치고 가장 시급한 일은 1300만원의 국채올시다!”
일본의 차관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더욱 노골화되었다. 국사 교과서에 ‘고문 정치’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하는 일본인 메가타는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와서는 무려 1150만원의 차관을 도입했다. 그 이전부터 있었던 차관까지 합쳐서 무려 1300만원의 거금이었는데 이는 대한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었다. 이것을 갚자는 것이었다.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서상돈과 김광제 연명의 발기 취지서가 실렸다. “국채 1천 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
이후 국채보상운동은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광문사는 일단 사장의 각오대로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여 모금 운동에 나섰다. 요즘에야 흡연자가 야만인 취급을 받지만 구한말 한국인들의 끽연은 외국인들을 놀라게 할 만큼 광범위한 습관이었다. 오죽하면 서양 선교사들이 성경에도 없는 ‘금연’을 기독교 교리로 가르쳤을까. 즉 금연이란 꽤 커다란 자금원의 산출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담배를 끊었다. 남정네들만이 아니었다. 대구 남일동의 일곱 부인들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어찌 남녀가 다르랴’라고 외치며 지니고 있던 은비녀, 은가락지 등 비상시가 아니면 내놓지 않는 패물을 의연했고 여학생들은 머리를 잘라 팔아 돈을 냈고, 경기도 양근에서는 숯장수들이 나무 팬 돈을 모아 냈고 갑오경장 이후 사람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 취급 못 면하던 백정도 돈을 냈다. 심지어 대구에서는 장애자였던 거지가 20전을 내놓아 사람들을 울리기도 했다. 하와이에서 짐승 취급 받으며 일하던 교포들고, 블라디보토크에서 바닥 쓸고 다니던 한인들도 돈을 모아 보냈다.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사람들이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면 먼저 일어나고, 되든 안되든 해 보겠다고 들이박았던 독특한 역사적 DNA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고위층의 참여는 90년 뒤의 금모으기 운동 때처럼 부실했다. 일단 돈으로 수백 억의 내탕금을 보유하고 계셨던 고종 황제께서는 ‘금연’으로 동참하셨다. 동참하셨던 것은 황송한 일이나 금연만으로 그 동참을 끝내신 것은 좀 야속한 일이었다. 물론 그조차 하지 않았던 다른 관료들에 비하면 낫다고 치하해 드려야겠지만.
일본은 애초부터 이 운동을 “국채보상운동을 표방하고 있지만 내용은 국권회복을 의미하는 일종의 배일 행위” (통감부 경무총장)로 규정하고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친일파 송병준은 국채보상연합회의소에 나와서 “한국이 무슨 수로 거금을 모으냐. 헛수고 말고 일찍 해산하라.”고 바람을 빼기도 했고, 미국의 교사라는 둥 엉뚱한 비난을 하면서 운동을 방해해 봤지만 소용이 없자 운동의 기관지 노릇을 하던 <대한매일신보>를 공격한다. 그리고 1908년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대한매일신보사 사장 베델이 상하이의 영국 영사관에 불려간 동안, 총무 양기탁을 횡령 혐의로 구속한다. 모인 의연금이 13만원인데 신문을 통해 6만원이라고 발표했으니 7만원이 빈다는 혐의였다. (독립기념관 자료) 이후 돌아온 베델의 증언과 주변의 증언으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고, 애초에 증거 자체가 없었던 탓에 일본인 판사는 양기탁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일본으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아니 그 돈이 어떤 돈이라고 횡령을 해?”라는 분노부터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하는 의심까지 골고루 불러 일으킨데다가 국채보상운동 지원금 총합소장으로 형식상 대표를 맡고 있던 윤웅렬 (아 이 사람 얘기는 좀 길게 하고 싶은데 생략한다)은 베델에게 3만원 내놓으라고 소송까지 걸게 만들었던 것이다. 무죄 판결은 났지만 상처를 입은 것은 일본이 아니라 양기탁이었고, 대한매일신보였고, 국채보상운동 전체였다. 불신의 바람은 처음의 열기만큼이나 나라를 휩쓸었고,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유야무야되고 만다. 일본 통감부는 양기탁의 무죄 판결을 들으며 이렇게 키들거렸을 것이다. “아니야? 아니면 말고.” 아 어디서 많이 본 풍경......
전직 하급관리 김광제와 보부상 출신의 서상돈이 주도하고 골초들의 용단과 여인네들의 은가락지와 걸인이 구걸해 받은 돈, 인간 이하 취급을 감수하는 백정이 내민 고기 판 돈, 하와이에서 채찍질 받아가며 일해 모은 달러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은 루블이 합쳐진 돈은 어영부영 쓰일 곳을 모르다가 한일합방 후 일본 제국의 아가리에 삼켜지고 말았다. 허탈한 일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허탈하다고 해서 1907년 오늘 대구에서 열변을 토하던 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최초의 시민운동’ (강만길 교수 왈)의 의미까지 잊어버린다면 일제의 약아빠진 횡령 혐의에 엉뚱한 칼춤을 춘 윤웅렬 이하 심지엷은 사람들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1907년 1월 29일은 나라의 빚을 백성이 갚아 보자고 떨쳐 일어섰던 날이었다.
“대한 2천만 민중에 서상돈만 사람인가. 00군 이곳 우리들도 한국 백성 아닐런가. 외인 부채 해마다 이식 불어나니 많은 그 액수 어이 감당하리. 적의 공격 없어도 나라 자연 소멸되면, 아아, 우리 백성들 어디 가서 사나. 이 나라 강토 없게 되면 가옥, 전토는 뉘 것인고” (당시 사람들이 부른 국채보상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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