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
2차대전 막바지,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은 기진맥진한 독일군을 거칠게 몰아부쳤다. 히틀러의 나찌 군대가 북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기나긴 소련 국경을 유린한 이래 죽어간 소련 인민과 군인의 수는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이제 독일이 그 댓가를 치를 차례였다. 따발총을 든 소련군은 눈에 핏발이 서서 독일로 독일로 몰려들었다. 그 도상에 폴란드가 있었고 코니에프 장군이 이끄는 우크라니아 전선 제 1군은 폴란드의 작은 도시 아우슈비츠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곳에서 가공할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1945년 1월 27일이었다.
“사람의 머리카락입니다. 700킬로그램 분량입니다.” 보고하는 소련군 병사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뼛가루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사람의 뼈입니다. 그리고..... 의치와 안경테도 산더밉니다.” 20세기 인류가 후세에 전할 최대의 악몽 중의 하나인 아우슈비츠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전장에서 볼 것 못 볼 것을 다 목도하고 별의 별 일을 치뤘던 병사들도 아연실색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폴란드 안에 만들어진 최초의 강제수용소인 아우슈비츠는 친위대 대장인 하인리히 히믈러의 지시에 의해 건설됐다. 최초에는 폴란드 정치범들을 점진적으로 살해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다가 1942년 유태 인종을 유럽에서 완전히 말살하려는 이른바 "유태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이 수립되면서부터는 유럽 전역의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가스실에서 죽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트럭의 배기 가스를 사용했다. 그런데 다 죽기는 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렸다. 연구 끝에 사용하게 된 것이 찌클론 B라는 독가스였다. 수용소장 헤스는 그 효과를 이렇게 자랑했다. “배기 가스를 사용한 곳에서는 시체들이 땀과 오줌과 똥투성이가 됐지만 찌클론B를 사용하면 그런 일이 없다.”
이 찌클론 B를 아우슈비츠에 공급하는 임무를 맡은 이 가운데 쿠르트 게르슈타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독일 내에서 정신질환자와 장애자를 죽여 없애려던 히틀러의 계획에 의해 여동생을 잃었다. 이에 분노한 그는 “독가스 운용 계획을 자세히 조사하여 세계에 공표하기 위해” 친위대에 자원입대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는 이 악마의 시나리오를 베를린의 사제나 스웨덴 대사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는 그의 정보를 거짓으로 치부했고 스웨덴 사람들도 조소 어린 침묵을 지켰다. 설마 그런 일이.... 설마 그런 일이..... 게르시타인은 전후 자신의 기록을 남긴 후 자살해 버린다.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자신이 공급한 가스를 마시고 죽어간 수백만의 생명들을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고 한 아도르노의 한탄은 적절했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의 바닥이 어느 정도로 내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장이었고, 인간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야수성으로 대체될 수 있는가를 입증하는 바로미터였다. 하지만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지키고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용기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있었고, 그들이 일궈낸 이야기가 질릴 대로 질려 버린 사람들의 굳은 얼굴을 풀어내는 것도 역사의 한 장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났다.
1944년 레지스탕스로 의심받아 4년 동안 아우슈비츠에 (폴란드 정치범들도 많이 있었다) 갇혀 있던 폴란드 청년 예지 비에레즈키는 탈출을 결심하고 있었다. 그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1년 전 만나 사랑에 빠진 유태인 처녀 실라 시불스카가 죽어가는 것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라의 가족은 그들이 만나던 그날, ‘샤워실’에서 처리됐었다. 친위대 군복을 구한 비에레즈키는 시불스카를 압송하는 체 하면서 아우슈비츠의 삭막한 출입문을 빠져나왔다. 며칠을 걸어서 고향에 돌아온 비에레즈키는 실라를 안전한 곳에 숨긴 후 바르샤바로 가서 레지스탕스가 됐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결혼하자.”는 약속을 남기고.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비에레즈키가 돌아왔을 때 실라는 없었다. 이미 한 달 전에 비에레즈키의 고향은 해방됐고, 돌아오지 않는 비에레즈키를 기다리던 실라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비탄에 빠진 채 다른 유태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가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이별한 지 38년이 지나서 실라는 다시 바르샤바를 찾는다. 그녀는 호텔의 여직원에게 폴란드에서의 추억을 털어놓으며 옛 사랑의 사연을 이야기했는데 그때 기적같은 한 마디가 흐른다.
“이상하다. 당신하고 똑같은 얘기를 하는 남자를 내가 아는데.”
“당신하고 똑같은 얘기”를 하고 다녔던 남자는 역시 비에레즈키였다. 얼마 후 비에레즈키의 고향의 공항에서는 백발이 다 된 노인과 세련된 50대의 미국 여자 실라가 눈물에 젖은 해후를 한다. “실라야? 정말 당신이 실라란 말이야?”를 부르짖는 비에레즈키의 손에는 그들이 헤어져 살았던 햇수만큼의 서른 아홉 송이의 장미가 들려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길 수 없어서 목숨을 걸었던 한 청년과 그에게 목숨을 맡겼던 여인은 서른 아홉 송이의 장미를 주고 받음으로써 평생의 그리움을 대신해야 했다. 아우슈비츠의 열 아홉 유태인 소녀와 스물 셋 폴란드 청년은 그렇게 다시 만났고, 그 한 번을 끝으로 다시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고 몇 해를 사이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우슈비츠가 해방되던 날, 그 비인간의 극치가 흉물스럽게 세상에 공개되던 날, 실라 시불스카와 유라세크 비에레즈키의 장미꽃을 떠올린다. 어떤 진흙탕에서도 연꽃이 피고, 최악의 시궁창에서도 생명의 끈이 끊기지 않듯, 아우슈비츠에서도 사랑은 피어났고, 그 사랑은 위대한 용기를 낳았으며, 이뤄지지 못했기에 더욱 감동적인 장미꽃의 향기로 찌크론 B의 유독성을 잠재운다. 이것 역시 역사의 한 자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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