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26일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죽었다. 그것은 하나의 임계점이자 전환점이었다. 그 전 해가을 무려 1300여 명의 대학생이 한꺼번에 구속됐다.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 때문이었다. 대학 상공에 헬리콥터가 날고 중세 공성전같이 전경이 사다리를 오르고 학생들이 그에 저항하는 그림이 방송을 통해 전파되고, 이유 불문 그 모두가 공산혁명분자로 매도된 뒤 사회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이데올로기 공세는 상당히 먹혀 들어갔다. 보도지침 하의 언론은 이른바 ‘센 그림’만 골라서 내보내며 과격 학생들의 실태를 반복해서 비췄고 시민들은 그에 감응했다. 그 가을과 겨울 사이 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시민들이 내민 발에 걸려 넘어졌고 목이 찢어져라 외쳐도 외면하는 사람들의 등에 절망해야 했다.
하지만 박종철의 죽음은 그 동토를 녹이기 시작했다. 아니 말라붙은 듯 보였던 땅에 갑작스런 봇물을 틔우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설마 설마 하던, 성고문이다 뭐다 해도 다 빨갱이들의 모략이라 믿었던 사람들의 억지스런 이해력에도 커다란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다.....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생사람을 저렇게 잡는 정부가 우리 정부란 말인가. 전환점이었으며, 임계점이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존경하는 언론인 중의 하나인 김중배가 1월 17일에 쓴 칼럼은 그 임계점을 대변한다. 고3이었던 내 기억에도 그 글줄은 쩌렁쩌렁한 청룡언월도와 같았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군.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떨어져간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응시를 요구한다. 우리의 엄호와 죽음 뒤에 살아나는 영생의 가꿈을 기대한다.
"흑, 흑흑..."
걸려오는 전화를 들면, 사람다운 사람들의 깊은 호곡이 울려온다. 비단 여성들만은 아니다. 어떤 중년의 남성은 말을 잇지 못한 채, 하늘과 땅을 부른다. 이 땅의 사람다운 사람들을 찾는다........“
그리고 1987년 1월 26일 보통 사람들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속을 뒤집는 발언이 대한민국을 뒤흔든다. 아니 물론 그날은 사람들은 몰랐다. 보도지침 치열한 언론에서 그 발언을 제대로 보도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오히려 그 후에 유명해진 이 이야기는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아니 눈 질끈 감고 제 새끼들 챙기기에 부산한 장삼이사로서도 참아내기 어려운 창끝을 들이밀었다. 그 전환점의 주인공은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1987년 ·1월 26일은 월요일이었다. 이날 명동성당에서는 박종철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미사가 열린다. 이 날 김수환 추기경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기록되는 한 영원히 남을 강론을 남긴다. 두 손을 모으고, 때로는 흐느끼던 그의 교우들 앞에서, 그리고 성당 밖 선술집에서 욕지거리 내뱉으며 술잔만 비우던 무력한 사내들을 향하여, 고문 받고 죽어간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님을 안도하면서도 슬퍼하던 어른들의 머리 위로.
“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지난 1월 14일 하늘마저 노할 경찰의 포악한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학 고 박종철군의 참혹한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이자리에 모였습니다. 솟구쳐오르는 의분 속에 온나라의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할 말을 잊고 하늘만 바라 보고 있는 어제, 오늘입니다.
민주 국가, 법치 국가, 정의 사회라는 대한민국 안에서 백주에 한 젊은이가 경찰에 연행된지 수시간 후 시체로 변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오늘의 우리 현실을 한없이 아파하면서,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각자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과거에 대한 뼈 아픈 반성과 앞으로의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미사의 제1 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중략)
오늘 이 성전에서 근본적으로 박종철 군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이 정권에 대해 우선 하고 싶은 한마디 말은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이번 박종철 군의 참혹한 죽음은 우연한 도발적 사고가 아닙니다. 이번 고문 사건은 지난해 6월에 있었던 천인공노할 부천 경찰서 권 양의 성 고문 사건과 역시 재작년 9월에 있었던 전 민청련 의장 김근태 씨에 대한 경찰의 잔혹한 고문 사건, 이 밖의 연속적으로 일어난 수많은 고문 사례들 중의 하나이며, 다른 한편으로 헤아리기 힘들도록 많은 수의 양심인들이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략)
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일지도 모른다. 인류사가 진행된 이래 계속된 전쟁과 투쟁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는 대개 살인자였을 것이고, 죽은 자가 자손을 남기지 못하는 이상, 세상에 태어난 우리 거의 대부분은 살인자의 후예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네가 죽인 그 사람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아벨의 이름은 연속하여 뒤바뀐다. 박종철이었고 그 이전에는 전태일이었고, 그 사이의 수많은 사람들이었으며, 그 이후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벨이 있었다.
얼마 전 대구에서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죽어간 학교 폭력의 희생자 앞에서 우리는 분노했다. 그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다. 그 카인들은 응당 욕을 먹어야 한다. 지당하다. 하지만 ·1987년 1월 26일 김수환 추기경이 물었던 질문에서 우리는 자유로운가. “죽은 친구가 그렇게 괴로워할 줄은 몰랐다.”고 흐느끼던 카인과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평생 살아온 터전에 느닷없이 송전탑이 세워지는 것에 반대하다가 두들겨 맞고 몸을 불살라버린 촌로의 아픔을 (며칠 전 일이다), 몇 년 동안 찬바람 맞으면서 농성해도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면서 이제는 피골이 상접하고 죽을 일 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사람들의 흐느낌을, 그 많은 아벨들 앞에서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되뇌는 카인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우리는 "하느님이 두렵지 않은가?"라는 질문에서 자유로운가.
오늘의 역사를 검색하면서 1987년 1월 26일 침착하지만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칼이 돋는 김수환 추기경의 육성을 들었다. 그 칼끝은 4반세기가 흘러도 날카로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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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죽었다. 그것은 하나의 임계점이자 전환점이었다. 그 전 해가을 무려 1300여 명의 대학생이 한꺼번에 구속됐다.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 때문이었다. 대학 상공에 헬리콥터가 날고 중세 공성전같이 전경이 사다리를 오르고 학생들이 그에 저항하는 그림이 방송을 통해 전파되고, 이유 불문 그 모두가 공산혁명분자로 매도된 뒤 사회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이데올로기 공세는 상당히 먹혀 들어갔다. 보도지침 하의 언론은 이른바 ‘센 그림’만 골라서 내보내며 과격 학생들의 실태를 반복해서 비췄고 시민들은 그에 감응했다. 그 가을과 겨울 사이 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시민들이 내민 발에 걸려 넘어졌고 목이 찢어져라 외쳐도 외면하는 사람들의 등에 절망해야 했다.
하지만 박종철의 죽음은 그 동토를 녹이기 시작했다. 아니 말라붙은 듯 보였던 땅에 갑작스런 봇물을 틔우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설마 설마 하던, 성고문이다 뭐다 해도 다 빨갱이들의 모략이라 믿었던 사람들의 억지스런 이해력에도 커다란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다.....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생사람을 저렇게 잡는 정부가 우리 정부란 말인가. 전환점이었으며, 임계점이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존경하는 언론인 중의 하나인 김중배가 1월 17일에 쓴 칼럼은 그 임계점을 대변한다. 고3이었던 내 기억에도 그 글줄은 쩌렁쩌렁한 청룡언월도와 같았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군.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떨어져간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응시를 요구한다. 우리의 엄호와 죽음 뒤에 살아나는 영생의 가꿈을 기대한다.
"흑, 흑흑..."
걸려오는 전화를 들면, 사람다운 사람들의 깊은 호곡이 울려온다. 비단 여성들만은 아니다. 어떤 중년의 남성은 말을 잇지 못한 채, 하늘과 땅을 부른다. 이 땅의 사람다운 사람들을 찾는다........“
그리고 1987년 1월 26일 보통 사람들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속을 뒤집는 발언이 대한민국을 뒤흔든다. 아니 물론 그날은 사람들은 몰랐다. 보도지침 치열한 언론에서 그 발언을 제대로 보도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오히려 그 후에 유명해진 이 이야기는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아니 눈 질끈 감고 제 새끼들 챙기기에 부산한 장삼이사로서도 참아내기 어려운 창끝을 들이밀었다. 그 전환점의 주인공은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1987년 ·1월 26일은 월요일이었다. 이날 명동성당에서는 박종철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미사가 열린다. 이 날 김수환 추기경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기록되는 한 영원히 남을 강론을 남긴다. 두 손을 모으고, 때로는 흐느끼던 그의 교우들 앞에서, 그리고 성당 밖 선술집에서 욕지거리 내뱉으며 술잔만 비우던 무력한 사내들을 향하여, 고문 받고 죽어간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님을 안도하면서도 슬퍼하던 어른들의 머리 위로.
“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지난 1월 14일 하늘마저 노할 경찰의 포악한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학 고 박종철군의 참혹한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이자리에 모였습니다. 솟구쳐오르는 의분 속에 온나라의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할 말을 잊고 하늘만 바라 보고 있는 어제, 오늘입니다.
민주 국가, 법치 국가, 정의 사회라는 대한민국 안에서 백주에 한 젊은이가 경찰에 연행된지 수시간 후 시체로 변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오늘의 우리 현실을 한없이 아파하면서,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각자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과거에 대한 뼈 아픈 반성과 앞으로의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미사의 제1 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중략)
오늘 이 성전에서 근본적으로 박종철 군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이 정권에 대해 우선 하고 싶은 한마디 말은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이번 박종철 군의 참혹한 죽음은 우연한 도발적 사고가 아닙니다. 이번 고문 사건은 지난해 6월에 있었던 천인공노할 부천 경찰서 권 양의 성 고문 사건과 역시 재작년 9월에 있었던 전 민청련 의장 김근태 씨에 대한 경찰의 잔혹한 고문 사건, 이 밖의 연속적으로 일어난 수많은 고문 사례들 중의 하나이며, 다른 한편으로 헤아리기 힘들도록 많은 수의 양심인들이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략)
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일지도 모른다. 인류사가 진행된 이래 계속된 전쟁과 투쟁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는 대개 살인자였을 것이고, 죽은 자가 자손을 남기지 못하는 이상, 세상에 태어난 우리 거의 대부분은 살인자의 후예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네가 죽인 그 사람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아벨의 이름은 연속하여 뒤바뀐다. 박종철이었고 그 이전에는 전태일이었고, 그 사이의 수많은 사람들이었으며, 그 이후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벨이 있었다.
얼마 전 대구에서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죽어간 학교 폭력의 희생자 앞에서 우리는 분노했다. 그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다. 그 카인들은 응당 욕을 먹어야 한다. 지당하다. 하지만 ·1987년 1월 26일 김수환 추기경이 물었던 질문에서 우리는 자유로운가. “죽은 친구가 그렇게 괴로워할 줄은 몰랐다.”고 흐느끼던 카인과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평생 살아온 터전에 느닷없이 송전탑이 세워지는 것에 반대하다가 두들겨 맞고 몸을 불살라버린 촌로의 아픔을 (며칠 전 일이다), 몇 년 동안 찬바람 맞으면서 농성해도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면서 이제는 피골이 상접하고 죽을 일 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사람들의 흐느낌을, 그 많은 아벨들 앞에서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되뇌는 카인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우리는 "하느님이 두렵지 않은가?"라는 질문에서 자유로운가.
오늘의 역사를 검색하면서 1987년 1월 26일 침착하지만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칼이 돋는 김수환 추기경의 육성을 들었다. 그 칼끝은 4반세기가 흘러도 날카로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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