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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21 혀짤린 하나님 곁으로 간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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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의 오역

1997년 1월 21일 낙골 전도사의 소천

지금은 높다란 아파트촌이 됐지만 80년대 말만 해도 돈암동 산동네는 판자집들이 늘어선 달동네에 철거촌이었다. 걸핏하면 용역 깡패들과 철거민들의 드잡이질이 벌어지던 어느 날 철거 깡패의 칼에 철거민 한 분이 희생되는 비극이 터졌다.

그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낑낑대며 돈암동 꼭대기에 올랐던 날, 나는 철거 번호가 큼직하게 쓰여진 집, 하지만 거의 반파되어 안이 들여다보이던 방 안에서 한 여대생 자원봉사자가 아이를 돌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 둘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면서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여학생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전해들은 말로는 그 아이들은 돌아가신 분의 아이들이라고 했다, 그 밖의 다른 정황은 희미하지만 울고 있던 여학생이 부른 노래의 기억은 선연하다.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혀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혀짤린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혀짤린 하나님>이라는 노래다. 이 노래는 한 사람의 삶과 맞닿아 있다. 김흥겸.

연세대학교 신학과 81학번이었던 그는 신학생이었음에도 꽤 ‘딴따라’끼가 있었다. 전국 대학생 복음성가 경연대회에서 대상도 타는 재주꾼이었고, 교육전도사 시절 레크리에이션은 그의 전담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이 쾌활한 신학생의 삶에도 깊은 그늘을 드리웠고, 그는 순종적인 신학생보다는 도발적인 예수의 제자로서 시대와 맞서게 된다. 1983년 그는 이런 기도를 함으로써 신학생들의 예배당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주여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뜻을 더 이상 우리가 이 땅에서 실현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힘들어서 못해먹겠습니다. 우리보고 회개하라구요? 우리가 죄인이라구요? 정말 울며불며 회개해야 할 것은 당신이요, 죄인 중의 죄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보고 하라 말고 당신이 한 번 이 땅에서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봐요. 그래요 우린 아무것도 못해요. 그런 당신은 뭘 했습니까? 독재자의 종말이 백주 대낮에 수천 명을 학살하는 광주에서 당신은 뭘 했냐구요. 저 악의 무리들을 뚫고 당신을 믿지 않는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도서관 유리창을 깨고 나올 때 당신이 선택했다는 우리도 아무것도 못했지만, 당신은 또 무엇을 했는가요?........(하략)”

그가 ‘당신이 죽인’ 예수의 이름을 빌어 아멘을 선언했을 때 아멘을 따라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아마 불경스럽게도 기도가 끝나기 전에 눈을 크게 뜨고서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자가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려던 치들도 있었을 것이고, 뭐라 말하려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아 입만 벌리고 있던 축도 있었으리라. “회개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라고!” 라고 외치는 이 가공할 신학생은 같은 해 있었던 마당극 “누가 예수를?”에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 역할을 맡는다.

온 캠퍼스를 예수 수난의 무대로 삼은 그 마당극에서 예수는 사복형사에게 체포되고 검은 승용차에 실려가 교문 앞 로마 법정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로마 군단’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전경들이 잔뜩 몰려들어 여차하면 뛰어들 기세를 보였고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엉뚱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전두환 물러가라.” “광주학살 원흉 전두환!” 어느새 골고다의 예수가 아닌 망월동의 예수가 되어버린 김흥겸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가운데 한 노래가 울려 퍼진다. 하나님을 혀 짤리고 화상 입고 쓰레기 더미의 일원으로 치부해 버린 불경한, 그러나 내가 아는 노래 중 가장 신실한 노래 <혀 짤린 하나님>이었다. 김흥겸 작사 작곡의.


그는 학창 시절 때부터 관악구 신림 7동의 낙골교회 전도사로 일했다. 원래 공동묘지였던 곳을 밀어버린 시유지에 청계천 주변에서 철거된 이들을 집단으로 수용했던 동네로서 채 수습하지 못한 뼛가루들이 굴러다닌다고 해서 ‘낙골’이었다. 그곳에서 몇 년을 봉사한 뒤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또 다른 곳을 향해 찾아나선다. 달동네 철거민들의 영혼을 위무하는 교회를 떠나 그들의 짱돌이 되고, 그들의 목소리가 되고, 그들의 ‘전우’가 된다.


영등포 역 앞에서 테이프 노점상을 하면서는 노점상 아줌마와 젓가락 장단을 함께 하며 어울렸고, 신대방동 철거 현장에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석 달간 콩밥을 먹었다. 극단의 배우로, 배추장사로, 음반 기획자로 그야말로 삶의 바닥을 몸으로 쓸어내던 그에게 위암 선고가 닥친 것은 1995년이었다. 암 선고를 받은 그는 이렇게 뇌까렸다고 한다. “에이 씨팔 내 인생이 이렇게 좃같이 끝날 줄 알았어,” 예수도 십자가에서는 “왜 나를 버리는 거요?”라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따졌을진대, 김흥겸이야 오죽했으랴.


암은 점점 더 깊어갔고, 더 이상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을 때, 그와 인연이 깊었던 오충일 목사는 모세가 바다를 가른 이래 없었을 일 하나를 제안한다. “흥겸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벗들이 함께 모여 미리 장례식을 치르자.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하는 건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1996년 11월 가쁜 숨이긴 하지만 멀쩡히 숨을 쉬고, 창백하긴 하지만 아직은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살아 있는 사람의 장례식이 열렸다. ‘고인’은 휠체어에 앉아 문상객들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제 장례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마치 부활한 사람처럼. 다시 살아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로부터 두 달 뒤 1997년 1월 21일 그가 회개하라고 당돌하게 요구했던 하나님 곁으로 갔다.

그는 방송쟁이들에게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아내는 다큐멘터리 작가로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이하로는 빠지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는 한지원 작가다. 김흥겸은 죽기 직전 아내에게 이런 글을 남긴다. “난 나의 마지막 과정을 너의 글 속에 묻고 싶고, 또 네가 쓸 글에 깊은 거름이 되어 다 못한 것들이 네 글 안에서 다시 부활하여 살고 싶다.” 야속할 정도로 부담스런 유언.

하지만 아내는 유언을 지켰다. 그녀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할 신림 8동 난곡의 풍경을 담았던 KBS 스페셜의 작가였고, <인간극장>에 등장하는 평범한, 그러나 감동적인 사람들의 파노라마의 목격자이자 전달자였다. 김흥겸의 삶은 그렇게 거름이 되고, 그가 보여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오늘 우리가 무심코 보는 방송 속에서 가지를 뻗고 잎을 펴며 꽃을 피유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2년 1월 21일은 개독교가 판을 치는 나라에서 살다 간 어느 신실한 기독교인의 15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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