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9년 1월 7일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의 죽음
그는 물론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신격화된 할아버지의 손자였고, 아버지의 대를 이어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무례한 행동을 하는 자에게는 징역 5년 이상의 불경죄를 적용하는 법이 이미 19세기부터 정립되어 있었다. 1901년 20세기의 첫 해에 태어난 그는 1989년 1월 7일 참으로 기나긴 일생을 마감한다. 그의 이름은 히로히토. 일본의 제 124대 천황이었다, 정신질환도 있었던 아버지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던 히로히토는 1926년 드디어 일본 천황 자리에 오른다.
1926년이면 일본의 대륙 진출 야욕의 시위를 당기던 무렵이다. 대륙 침략을 눈 앞에 둔 일본은 천황을 신격화를 강화함으로써 일본 내부의 단결을 강화하려 들었다.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신국(神國)’ 일본 국민들을 고무하고 격려하는 초국가적인 존재를 필요로 했고 히로히토는 국민들은 천황의 행차 앞에서 무릎 꿇고 경의를 표해야 했고, 천황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조차 불경죄의 혐의를 받았다. 천황 앞에서 무심코 서 있었던 오사카 시장이 천황에게 예의를 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직위가 날아간 일도 있었다.
인간과 다른 신이었던지라 국민들과의 인간적인 만남 또한 거의 없었다. 1936년 이후에는 천황을 똑바로 쳐다보는 사람들조차 무조건 체포되었다. 일본 제국 치하의 모든 백성들은 궁성요배라 해서 마치 메카를 향해 기도드리는 이슬람교도들처럼 천황의 궁성을 향해 90도로 절하는 의식을 치러야 했고, 군인들은 그를 위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도록 끊임없이 세뇌됐다. 일본 국민들이 ‘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은 1945년 8월 15일 항복 선언 때가 처음이었다. 해양생물학 연구를 좋아했고 영국식 아침 식사를 즐겼으며 영국 국왕 조지 5세를 좋아하고 따랐던 수줍음 많은 동양인 청년은 그 인생의 거의 반을 ‘신’으로 보냈다.
전쟁 후 전범 재판에서 으뜸가는 전범 도조 히데끼는 “일본에서 천황이 모르는 일은 없다. 천황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적어도 히로히토는 89년 그가 죽었을 때 다케시타 노보루 일본 수상이 바친 헌사, “격동의 62년간 세계 평화와 국민의 행복을 기원하고 몸소 실천하셨다. 폐하의 뜻과 달리 발발한 지난 대전(大戰)으로 고통받는 국민을 차마 볼 수 없어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전쟁을 종결하는 영단을 내려주신” 존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만주사변부터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현대사의 주요 고빗길에서 “중국군을 응징하고 주요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임하라.”고 선언하고, 국제법에 금지된 화학 무기 사용을 재가했으며, 고노에 전 수상은 “폐하께서 전쟁 쪽으로 기울어지시니 어쩔 수가 없었다.”고 통탄한 바도 있었다. 즉 일본이 자행한 침략 전쟁에서 그의 “뜻과 달리” 발발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의 전략적 계산과 자신은 허수아비였을 뿐이라며 모든 책임을 군부에 돌린 히로히토 본인의 유연함 덕에 그는 전범을 면하고 천황으로서, “인간 선언”을 한 이후로도 일본 국민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 존재로 종생했다.
헌법상 최고 통치자로서 책임을 피할 수 없지만 절대적인 권력자도 아니었던 한 사람이 그 정도의 절대적인 충성과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은 세계사적으로 진귀한 일일 것 같다. 그의 위상을 말해 주는 가장 경이로운 사태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뒤에 벌어졌다.
원자폭탄이 터진 후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어 버린 히로시마의 한 거리. 네 명의 경찰관들이 무언가를 지고 거리를 내달렸다. 그들은 연신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어진(御眞)이다 어진이다!” 즉 히로히토의 초상화였다. 불길에 휩싸인 어느 건물로부터 빼내 온 것이었을 텐데, 그 앞에서 운신이 어려운 사람들은 몸을 뒹굴며 길을 내 주었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은 화상 입고 머리털이 유리가 박힌 채로 일어서서 90도로 절하며 경의를 표한 것이다. 언젠가 이 일화를 읽으면서 혀를 찼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인간들이 이럴 수 있을까. 이 정도로 세뇌가 되고, 이럴 만큼 바보스러울 수 있을까. 그러나 바로 몇 년 뒤 마치 데자뷰라 할 지 평행이론이라 할 지 거의 똑같은 형태로 저 풍경이 재연되는 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몇 년 전 북한의 용천 열차 폭발 사고 때의 일이다.
“용천군 일반용품 수매상점 수매원인 최영일, 전동식씨는 점심식사를 하러 가던 중 강한 폭음소리를 듣고 기업소로 달려가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를 품에 안고 나오다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사망했다. 또 용천소학교(인민학교) 교사인 한은숙씨(32)는 수업 도중 강력한 폭풍으로 학교건물이 붕괴되면서 교실에 불이 나자 3층 교실에 있던 김일성 부자 초상화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후 제자 7명을 구해내고 자신은 숨졌으며, 한정숙 교사(56)도 초상화를 품에 안은 채 사망했다.“ 조선중앙통신을 인용한 기사였다.
1989년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가 죽었다. 아마 그는 최근 저승을 찾은 누군가와 더불어 누가 더 존경받았고 누가 더 숭배의 대상이었는지 겨루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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