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36년 1월 8일 연희전문 농구 최고의 날
요즘은 좀 시들해졌지만 한창 농구를 즐겨 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기는 묘하게도 연세대학교 농구팀이 최절정기를 구가하던 때와 일치한다.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김훈 서장훈 등등 지금 읊어도 그들을 따르는 오빠부대들의 괴성이 귀에 쟁쟁한 연세대학교 농구팀이 대학팀은 물론 실업팀(당시는 프로농구가 없던 시절이므로)들까지 파죽지세로 꺾어 나가던 모습은 그 라이벌을 자처하던 고려대학교 농구팀의 응원단으로서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모처럼 농구장을 찾은 날 서장훈이 고대 링에 덩크슛을 꽂아 넣고 내려오면서 고대 응원단을 향해서 감자를 날리는 고얀 행동을 하는 바람에 펄펄 뛰었던 때를 돌이키면 지금도 나도 모르게 우거지상을 짓게 된다.
그 ‘얄미로운’ 연세대학교 농구팀이 그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꼽는다면 아무래도 1936년 1월 8일이 빠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날 연세대학교의 전신, 식민지 조선의 연희전문 농구팀은 전일본 농구 선수권 대회를 제패하는 위업을 달성한다. 1930년 팀 창단 이후 처음일 뿐 아니라 조선 팀으로서도 최초의 성과였다. 그 중심에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한 사람의 이름이 빛난다. 이성구 (1911-2002)
충청남도 천안 출신인 그가 농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서울 휘문고보로 유학을 왔을 때였다. 1년 위 선배들이 농구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신기해 하다가 숙직실에 보관 중이던 농구공을 몰래 꺼내서 튕긴 것이 농구와 이성구의 만남이었다. 몰래 농구공을 퉁탕거리던 신입생은 2학년 때는 선수가 됐고 5학년 때에는 전 조선 대표격인 YMCA 농구단의 주전 선수로 훌쩍 커 있었다.
점프해서 백보드를 양손으로 몇 번을 치고 내려오는 가공할 점프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1930년 창단된 연희전문 농구팀 창단 멤버가 된다. 그가 포인트 가드로 활약한 연희전문팀은 창단 첫 해 4관왕에 오르는 등 기염을 토했고 라이벌이자 2년 먼저 창단됐던 보성전문 농구팀도 꺾는 등 무서운 첫끗발을 발휘했다. 그는 졸업 후 은퇴하여 진명여고 교사를 맡는다.
그런데 1936년 일본에서 전일본 농구 선수대회 겸 베를린 올림픽 선발대회가 열린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전보전(全普專) 과 전연전(全延專)팀이 참석했는데 모르긴 해도 아마 보전과 연전의 재학생과 졸업생을 망라한 ‘올스타팀’이 참석한게 아닌가 한다. 나이 스물 다섯의 한창 나이기는 했지만 ‘여고 선생님’으로서 애들(?) 가르친 지 몇 년이 된 이성구는 일종의 관계자 신분으로 일본으로 갔다.
보성전문 팀은 1회전에서 탈락했지만 연희전문은 일본의 관동학원팀을 52대 32, 그야말로 대파해 버리면서 파란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자 일본 주최측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올림픽의 꽃 마라톤에서도 조선인들이 판을 치는 판에 베를린 올림픽 선발전을 겸한 이 대회에서 조선 아이들이 설치는 것은 보아주기 어려웠다. 가뜩이나 식민지 백성 주제에 말끝마다 일본인을 “왜놈들”이라며 키 작다고 무시하는 조선인들과의 농구 시합 아닌가.
일본은 이 대회 출전에 앞서 벌어졌던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의 시합 후 연희전문 주장 이만걸이 버르장머리 없는 (꼭 서장훈 같았을 거다 흥) 보성전문 신입생과 시비 끝에 박치기를 가해 종로서에 끌려갔던 일을 끄집어내서 징계를 내려 버린다. 독수리 5형제 가운데 하나가 아웃된 것이다. 다급해진 연전 농구부장이 이성구를 호출한다. “어이 자네가 뛰게.” “농구공 놓은 게 언젠데 지금 저한테....” “잔말 말고 뛰어. 그럼 이렇게 기권하고 경성으로 갈 건가?”
한동안 운동 안하던 이성구는 코트에 들어서야 했다. 왕년의 실력이 녹슨 건 아니었지만 공백이란 무시할 수 없어서 이성구는 잽싸게 한 번 움직인 다음에는 이내 헉헉거리면서 드리블을 늦췄고 연희전문은 ‘지공’(지연공격)으로 들어간다. 주전 하나가 슬로 슬로 드리블인데 도리가 있나. 그런데 연희전문은 이 변칙적인 경기 운영으로 승승장구 파죽지세를 달렸다. 와세다대학이 그 앞에서 나가 떨어졌고 일본 최고의 명문이자 천하무적 농구팀으로 알려졌던 동경제대 농구팀마저 46대 38로 연희전문에게 무릎을 꿇었으며 경도제대와의 결승전은 아예 20점 차이라는 원사이드한 경기로 끝났다. 식민지 조선의 연희전문 농구팀이 창단 6년만에 전일본 농구선수권을 제패한 것이다. 1936년 1월 8일이었다.
그리고 진명여고 교사 이성구는 일본 농구팀 대표선수가 되어 손기정과 함께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까지 밟는 행운을 누린다. 거기서도 이성구는 일본인들의 골치를 썩였다. 감독이 조선인을 깔보는 발언을 하자 “그런 식으로 말하면 뛰지 않겠다.”고 돌아앉아버려서 감독이 싹싹 빌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성구의 시원시원한 카리스마는 후진들의 입에 즐겨 오르내렸는데 1940년 일본 기원 2600주년 동아시아 경기대회 때의 일이 유명하다. 필리핀과의 승부에서 일본인 감독은 일본 선수로만 스타팅 멤버를 짰는데 영 죽을 쑤었다. 결국 다급해진 감독이 조선인 선수들을 내보내자고 하자 이성구는 이렇게 일갈했다. “너희들이 해서 지고 있으니 너희들이 끝내!” 그 후 조선인 선수들을 대거 출전시켜서 올코트 프레싱을 벌인 끝에 대역전극을 이뤄내 버렸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그는 평생을 농구인으로 산 그는 연세대학교 체육부장을 맡아 그야말로 은하수같은 농구계의 별들을 길러 냈다. 방렬, 신동파, 김인건 등 한국 농구 역사의 대명사들 이 그의 작품이었으며 지금도 연세대학교에서는 우수한 지도자에게 ‘이성구 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농구인이었다. 그가 91세로 타계한 날은 한국 남자 농구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라 할 2002년 아시안 게임 남자농구 결승, 한국과 중국전이 있던 날이었다. 문경은,서장훈,이상민,방성윤, 조상현 등 그의 까마득한 연세대 후배들이 포진한 한국 농구팀은 드라마도 그렇게 썼다가는 말도 안된다고 퇴짜를 맞을 드라마같은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후 20년만의 중국전 승리. 하필이면 그날을 골라서 그는 세상을 떴다. 그가 생전에 남겼던 걱정 하나를 매달아 두면서 그 명복을 빈다.
“운동만 잘해도 졸업장을 주고 인격이 갖춰지지 않아도 좋은 회사에 취직 (실업팀 시절이었다) 시켜서 많은 봉급을 준다던가 하는 풍토가 계속되는 건 체육하는 사람들한테 재앙이 될 거야.” 그는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졸더라도 수업에 들어가라.”
tag : 산하의오역
1936년 1월 8일 연희전문 농구 최고의 날
요즘은 좀 시들해졌지만 한창 농구를 즐겨 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기는 묘하게도 연세대학교 농구팀이 최절정기를 구가하던 때와 일치한다.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김훈 서장훈 등등 지금 읊어도 그들을 따르는 오빠부대들의 괴성이 귀에 쟁쟁한 연세대학교 농구팀이 대학팀은 물론 실업팀(당시는 프로농구가 없던 시절이므로)들까지 파죽지세로 꺾어 나가던 모습은 그 라이벌을 자처하던 고려대학교 농구팀의 응원단으로서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모처럼 농구장을 찾은 날 서장훈이 고대 링에 덩크슛을 꽂아 넣고 내려오면서 고대 응원단을 향해서 감자를 날리는 고얀 행동을 하는 바람에 펄펄 뛰었던 때를 돌이키면 지금도 나도 모르게 우거지상을 짓게 된다.
그 ‘얄미로운’ 연세대학교 농구팀이 그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꼽는다면 아무래도 1936년 1월 8일이 빠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날 연세대학교의 전신, 식민지 조선의 연희전문 농구팀은 전일본 농구 선수권 대회를 제패하는 위업을 달성한다. 1930년 팀 창단 이후 처음일 뿐 아니라 조선 팀으로서도 최초의 성과였다. 그 중심에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한 사람의 이름이 빛난다. 이성구 (1911-2002)
충청남도 천안 출신인 그가 농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서울 휘문고보로 유학을 왔을 때였다. 1년 위 선배들이 농구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신기해 하다가 숙직실에 보관 중이던 농구공을 몰래 꺼내서 튕긴 것이 농구와 이성구의 만남이었다. 몰래 농구공을 퉁탕거리던 신입생은 2학년 때는 선수가 됐고 5학년 때에는 전 조선 대표격인 YMCA 농구단의 주전 선수로 훌쩍 커 있었다.
점프해서 백보드를 양손으로 몇 번을 치고 내려오는 가공할 점프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1930년 창단된 연희전문 농구팀 창단 멤버가 된다. 그가 포인트 가드로 활약한 연희전문팀은 창단 첫 해 4관왕에 오르는 등 기염을 토했고 라이벌이자 2년 먼저 창단됐던 보성전문 농구팀도 꺾는 등 무서운 첫끗발을 발휘했다. 그는 졸업 후 은퇴하여 진명여고 교사를 맡는다.
그런데 1936년 일본에서 전일본 농구 선수대회 겸 베를린 올림픽 선발대회가 열린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전보전(全普專) 과 전연전(全延專)팀이 참석했는데 모르긴 해도 아마 보전과 연전의 재학생과 졸업생을 망라한 ‘올스타팀’이 참석한게 아닌가 한다. 나이 스물 다섯의 한창 나이기는 했지만 ‘여고 선생님’으로서 애들(?) 가르친 지 몇 년이 된 이성구는 일종의 관계자 신분으로 일본으로 갔다.
보성전문 팀은 1회전에서 탈락했지만 연희전문은 일본의 관동학원팀을 52대 32, 그야말로 대파해 버리면서 파란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자 일본 주최측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올림픽의 꽃 마라톤에서도 조선인들이 판을 치는 판에 베를린 올림픽 선발전을 겸한 이 대회에서 조선 아이들이 설치는 것은 보아주기 어려웠다. 가뜩이나 식민지 백성 주제에 말끝마다 일본인을 “왜놈들”이라며 키 작다고 무시하는 조선인들과의 농구 시합 아닌가.
일본은 이 대회 출전에 앞서 벌어졌던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의 시합 후 연희전문 주장 이만걸이 버르장머리 없는 (꼭 서장훈 같았을 거다 흥) 보성전문 신입생과 시비 끝에 박치기를 가해 종로서에 끌려갔던 일을 끄집어내서 징계를 내려 버린다. 독수리 5형제 가운데 하나가 아웃된 것이다. 다급해진 연전 농구부장이 이성구를 호출한다. “어이 자네가 뛰게.” “농구공 놓은 게 언젠데 지금 저한테....” “잔말 말고 뛰어. 그럼 이렇게 기권하고 경성으로 갈 건가?”
한동안 운동 안하던 이성구는 코트에 들어서야 했다. 왕년의 실력이 녹슨 건 아니었지만 공백이란 무시할 수 없어서 이성구는 잽싸게 한 번 움직인 다음에는 이내 헉헉거리면서 드리블을 늦췄고 연희전문은 ‘지공’(지연공격)으로 들어간다. 주전 하나가 슬로 슬로 드리블인데 도리가 있나. 그런데 연희전문은 이 변칙적인 경기 운영으로 승승장구 파죽지세를 달렸다. 와세다대학이 그 앞에서 나가 떨어졌고 일본 최고의 명문이자 천하무적 농구팀으로 알려졌던 동경제대 농구팀마저 46대 38로 연희전문에게 무릎을 꿇었으며 경도제대와의 결승전은 아예 20점 차이라는 원사이드한 경기로 끝났다. 식민지 조선의 연희전문 농구팀이 창단 6년만에 전일본 농구선수권을 제패한 것이다. 1936년 1월 8일이었다.
그리고 진명여고 교사 이성구는 일본 농구팀 대표선수가 되어 손기정과 함께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까지 밟는 행운을 누린다. 거기서도 이성구는 일본인들의 골치를 썩였다. 감독이 조선인을 깔보는 발언을 하자 “그런 식으로 말하면 뛰지 않겠다.”고 돌아앉아버려서 감독이 싹싹 빌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성구의 시원시원한 카리스마는 후진들의 입에 즐겨 오르내렸는데 1940년 일본 기원 2600주년 동아시아 경기대회 때의 일이 유명하다. 필리핀과의 승부에서 일본인 감독은 일본 선수로만 스타팅 멤버를 짰는데 영 죽을 쑤었다. 결국 다급해진 감독이 조선인 선수들을 내보내자고 하자 이성구는 이렇게 일갈했다. “너희들이 해서 지고 있으니 너희들이 끝내!” 그 후 조선인 선수들을 대거 출전시켜서 올코트 프레싱을 벌인 끝에 대역전극을 이뤄내 버렸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그는 평생을 농구인으로 산 그는 연세대학교 체육부장을 맡아 그야말로 은하수같은 농구계의 별들을 길러 냈다. 방렬, 신동파, 김인건 등 한국 농구 역사의 대명사들 이 그의 작품이었으며 지금도 연세대학교에서는 우수한 지도자에게 ‘이성구 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농구인이었다. 그가 91세로 타계한 날은 한국 남자 농구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라 할 2002년 아시안 게임 남자농구 결승, 한국과 중국전이 있던 날이었다. 문경은,서장훈,이상민,방성윤, 조상현 등 그의 까마득한 연세대 후배들이 포진한 한국 농구팀은 드라마도 그렇게 썼다가는 말도 안된다고 퇴짜를 맞을 드라마같은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후 20년만의 중국전 승리. 하필이면 그날을 골라서 그는 세상을 떴다. 그가 생전에 남겼던 걱정 하나를 매달아 두면서 그 명복을 빈다.
“운동만 잘해도 졸업장을 주고 인격이 갖춰지지 않아도 좋은 회사에 취직 (실업팀 시절이었다) 시켜서 많은 봉급을 준다던가 하는 풍토가 계속되는 건 체육하는 사람들한테 재앙이 될 거야.” 그는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졸더라도 수업에 들어가라.”
tag : 산하의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