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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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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6 끝내 일어나지 못한 우리의 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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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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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6일 끝내 일어나지 못한 가객

 

1996년 1월 6일. 입사한 지 정확하게 1년이 되었던 시절의 나는 거의 욕 먹는 기계이자 삽질을 전문으로 하는 서툰 AD로 하루 하루를 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소식을 듣고 머리가 띵했던 그 순간이 점심 먹던 때였던지 아침 나절이었는지, 또는 봉고차 안이었는지 사무실에서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소식이란 가수 김광석의 자살이었다. 하지만 명확한 기억 하나는 있다. 소식을 들은 순간 내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

"말도 안돼."

 

 기억의 갱도를 더 더듬어 보자. 그날 퇴근 무렵 내 삐삐는 열 개가 넘는 전화번호가 찍혔다. 핸드폰이 일상적이지 않던 시절이었기로 일일이 회신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비명 같은 음주 청탁이었다. "아 씨바 김광석이 죽었다. 술 먹자." 야근이 일상이었고 하루 걸러 밤을 새던 무렵이라 그 절절한 술고픔의 호소들을 뿌리쳐야 했으나 그래도 그날 나는 술을 장히 얻어먹을 수 있었다. 회사 안에서도 김광석의 죽음에 넋이 반쯤은 나가 버렸던 군상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가와 PD들 해서 한 대여섯 쯤 되었을 것이다. 편집실 밖 책상에는 소주와 오징어, 새우깡 등으로 구성된 조촐한 술판이 마련됐고 한 명이 굴러다니는 CD 플레이어에다가 책상에 보관 중이던 김광석의 노래들을 담았다. 그때 처음 흘러나왔던 노래는 '사랑했지만'이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 버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이쯤에서 작가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술잔을 든 채, 또는 담배를 물고, 아니면 손바닥으로 턱을 고이고 잠자코 듣던 사람들의 목청이 홀연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 볼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 밖에......." 그리고 마지막은  먹먹하게 내리깔렸다. "그대를 사랑했지만"

 

스물 일곱에서 서른 다섯 살 가량의 청춘이라 부르기는 뭐한 나이들로 구성되었던 편집실의 군상들은 그렇게 김광석의 노래에 휩쓸리고 유린되고 빠져들었다. 그리고 난무했던 김광석의 노래에 대한 추억들. 신기하게도 김광석의 노래에 얽힌 추억 하나씩, 아니 대여섯개씩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입대하는 애인이 불러주는 <이등병의 편지>를 듣다가 주저앉아서는 입대하는 모습도 못보고 울었었다는 작가.  "그녀가 처음 울던 날"처럼 애인과 헤어졌다는 선배, <거리에서>를 백 번쯤 중얼거리며 실연의 아픔을 줄창 걷는 것으로 풀었다는 PD.   가편집본 지워 먹고 선배한테 테잎 케이스로 맞던 날  기분 푼답시고 <일어나>를 흥얼거리다가 두 배로 혼났다는 AD...... 김광석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살뜰하고 섬세하게 사람들의 일상과 추억  사이로 밤눈처럼 소리없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날 새삼 다시 깨달았다. 


 김광석은 <사랑했지만>을  그다지 부르기를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 수동적인 느낌이 싫었다던가.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다는 그 가슴살 저미는 아픔이 굳어버린 느낌의 노랫말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광석은 그리 잘생기지 못한 얼굴과 작달막한 키 등 '하드웨어'에서 약점이 있었던지라 수없이 실연을 당했고, 노래 가사같은 아픔을 하영 겪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살다가 "나 이래봬도 김광석 찼던 여자야" 하는 아줌마 한 번 만나 보고픈 소망이 있다.   아줌마 때문에 이런 노래를 내가 듣고 살잖우 하면서 치하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굴러들어온 호박을 내찼던 그 발을 한 번 밟아주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광석은 <사랑했지만>을 오히려 더 열심히 부르기로 한다.  이런 사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어느 모임에 갔습니다. 그 모임에 참가하신 칠순 할머니께서 24년생이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시더군요...비 오는 어느 날 우산도 없이 장보고 오는 길에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내리는 비도 잊은 채 서서 들으셨답니다. <사랑했지만>이라고 하시더군요.  감정은 나이와는 상관없다고들 하면서도, 할머니나 부모님께서는 날 이해하지 못하실 거라고 무의식 중에 단정짓고 잘 이야기하지도 않는 것이 우리들 모습이지요. 저 또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저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할머니의 잊었던 감정을 되살려준 노래이기에 조금 더 열심히 부르고 좋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의 노래는 그렇게 친절했다.  냉수를 수십 사발 퍼부어도 식지 않는 가슴의 불덩이를 조근조근 달래며 가라앉히고, 선인장으로 긁어도 시원해지지 않을 것 같은 갑갑한 가려움을 매만지고, "아프지? 아픈 거 알아. 실컷 아파해. 그것만은 우리만의 권리 아니겠니? 나도 아프거든." 이라고 등을 두드려 주는, 듣는 사람의 정신적 무장을 해제하고 나아가 저 마음 깊은 곳에서 퍼올려지는 각혈을 하고 싶게 만들었던 그의  노래의 힘은 듣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슬픔과 아픔으로부터 노래의 생명을 빌리고 그것으로 다시 그들을 위무했던 친절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콘서트에서도 항상 대화하기를 즐겼다.  말을 걸고, 농담을 하고 청중들과 호흡하면서 노래와 노래 사이를 이어나갔다. 

 음악에 조예가 깊지 못하고 문외한에서 한 발짝 벗어난 처지로,지금까지 평생 내 돈 주고 가 본 가수의 콘서트는 정태춘과 김광석 딱 두 번이었다.  김광석 콘서트는 1994년 백수의 처지였을 때 , 친구가  불우이웃돕기 돕기 차원에서 주선한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과 함께 갔었다.  가까스로 표는 구했지만 미리미리 가 있지 않은 덕에 우리는 입구에 서서 두 시간여를 개겨야 했다.  그래도 워낙 김광석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던지라 다리 아픈 줄 모르고 공연에 열중하는데 그 모습이 안스러워 보였던지 별안간 김광석이 우리를 보고 말을 걸었다.  "다리 안 아파요?"  나는 처음에 우리를 보고 말하는지도 몰랐다.  같이 왔던 여학생이 "괜찮아요!"하면서 소리를 지르기 전까지는.   김광석은 느닷없이 "만난지 얼마나 됐어요?"라고 물어왔고 그제서야 나도 기운차게 외쳤다. "열흘이요." 그러자 김광석이 그 특유의 함박웃음을 지으며 또 물어 왔었다.  "어떻게 잘 될 거 같아요?"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왜 그랬는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는데 그냥 아까처럼 목청 돋워 "예!" 하면 될 것을 나는 희한한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글쎄요." 그렇게 맘에 안드는 것도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찬 밥과 더운 밥과 삼층밥과 탄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는데.  왁자한 웃음이 터졌고 얼굴이 굳어진 그 아가씨는 공연이 끝나고 난 후 시베리아 고기압을 형성하고설랑 된바람으로 떠나버렸다.  거리에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켜지는데 웬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았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대체 무얼 찾고 있었던지.  뭐라 말하려 해도 기억하려 하여도 허한 눈길만이 되돌아오더라 젠장.

 김광석은 <거리에서>를 부르면서 그런 농담을 했다 한다.  가수는 자기가 부르는 노래대로 된다고 하는데 <거리에서> 자꾸 부르면 거리에서 헤매는 인생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그 농담은 불길한 예언이 되었다.  그의 노래 가운데 하나, 작곡가 백창우와 함께 정호승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부른 <부치지 않은 편지>.  

 "....시대의 새벽길을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젠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그의 노래의 시작은 어두운 시대의 험로였다.  그 청아한 목소리로 김광석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노래했고,  "빈 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의 절실함과 "기나긴 밤, 압제와 죽음과 투쟁의 밤"을 번갈아 불러야 했다.   이후로도 어깨를 짓누르는 시대의 어두움으로부터 한 발짝 비켜나기는 했지만 시대를 살아내리는 사람 개인 개인의 아픔과 슬픔은 언제나 "그의 노래"였다.  조그맣고 가진 것 없는 이에게 그의 노래는 애달픈 양식이었고 아무것도 뵈지 않는 암흑 속에서 커다란 빛이 되는 조그만 읊조림이었다.  그러던 그가,  사람들에게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 보라고 '선동'했던 그의 노래가 끝내 갑작스레 너무도 황망하게 주저앉고 말았다.  1996년 1월 6일이었다.  

 그의 노래 중에 <외사랑>이 있다.  짝사랑은 상대방이 알아차린 것이라지만 외사랑은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은 혼자만의 사랑이라고 한다.  그 가사 또한 해 본 사람만이 이해하고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눈이 뜨거워질 노랫말의 연속이지만 오늘 나는 김광석을 생각하면서 그 노래를 중얼거려 본다.  돌아오지 못할 우리의 가객을 위하여.  우리들의 스물과 서른을 풍성하게 했던, 윤택하게 했던, 넉넉하게 했던, 수없는 상한 영혼들을 위로했던 한 가수를 위하여.  

내 사랑 외로운 사랑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인가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보고 싶지만 마음 하나로는 안되나 봐요
공장의 하얀 불빛은 오늘도 그렇게 쓸쓸했지요
밤하늘에는 작은 별 하나가 내 마음같이 울고 있네요
눈물고인 내 눈속에 별 하나가 깜박이네요
눈을 감으면 흘러내릴까봐 눈을 못감는 서글픈 사랑
이룰수 없는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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