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894년 12월 28일 녹두꽃이 떨어지면
1894년 갑오년의 겨울은 추웠다. 춥다못해 삭막했다. 특히 충청도 이남 호남 땅은 더욱 꽁꽁 얼어붙었다. 그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군 몇 만명의 시신이 굳은 땅 속에서 더디 썩어가고 있었다. 척양척왜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한양으로 진군하려던 그들은 대개 우금치 전투에서 몰살당했고 다른 전투에서도 패퇴했다. 패잔 농민군은 관군과 '의병' (동학군에 반대...한 양반들이 조직한)의 눈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녹두장군 전봉준도 그 중의 하나였다. 5척 단구로서 남의 눈에 띌 체형은 아니었지만 그 눈빛만은 눈에 띄게 형형했던 그는 그 눈 앞에서 죽어간 동료들 생각에 가슴을 치면서 살을 잘라 오는 겨울 바람을 헤치며 전라도 순창 피노리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곳에는 그와 함께 봉기에 참여했던 믿을만한 부하가 은신 중이었다. 남하하는 길목에 경천이라 불리우는 냇물을 건널 때 전봉준은 일순 긴장한다. 언젠가 들은 예언에서 그는 "경천을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천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고 관군의 잠복도 없었다.
그는 무사히 부하를 만난다. 몇 달 전만해도 함께 싸운 동향의 동지. 그는 주막집으로 전봉준을 안내하고 모처럼 구들장을 지고 더운밥을 먹은 녹두장군은 긴장을 풀고 다리를 뻗지만 그가 믿었던 부하는 마음 속이 시끄러웠다. 이미 틀어진 일, 막대한 현상금과 포상이 내걸린 전봉준을 관군에 넘긴다면 팔자를 고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생사를 같이하며 죽창을 함께 맸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외침에 자신도 공감했던 지도자를 버린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입술을 깨문다. 장군 미안하오. 나는 살아야겠소. 그것도 보란 듯이 한 번 그의 이름은 김'경천'이었다
그는 인근에 사는 전주 감영의 퇴역 장교인 한신현에게 전봉준의 출현을 밀고했고 한신현은 동네 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을 급습한다. 낌새를 챈 전봉준은 주막 담장을 넘어 도망가려 했지만 장정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잡히고 만다. 녹두꽃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1894년 양력 12월 28일이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전봉준을 어찌나 두들겨 패면서 끌고 갔던지 하룻길이면 갈 순창 군청까지 이틀 걸려 갔다고 한다.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진 채 그는 서울로 압송된다.
......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안도현 시 - 서울로 가는 전봉준 중에서)
전봉준 체포에 공이 큰 한신현은 군수 감투를 썼고, 담장을 넘는 전봉준의 다리를 부러뜨렸던 동네 청년들에게도 두둑한 상금이 내렸다. 하지만 정작 전봉준을 처음 밀고했던 김경천은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다가 굶어죽었다고 전한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백성들이 내린 배신자에 대한 응징의 결과였을까.
2005년 순창군은 전봉준이 잡혔던 주막집 일대에 ‘전봉준 피체지 기념관’을 세웠다. 전봉준이 체포된 곳을 기념한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순창 사람들은 백성들의 영웅이었던 전봉준을 잡아서 관에 넘긴 곳이라는 ‘배신’의 비난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굳이 안내판에 “정읍 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곳”이라고 써 놨다.
오늘날의 정읍은 전봉준과 김경천의 고향이었던 고부군과 정읍현이 합쳐진 곳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읍 사람들로서는 어이가 없었나보다. 항의가 잇따랐고 종국에는 안내판이 훼손되어 경찰이 수사에 나서기도 했으며, 두 지자체 간에 날카로운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그 신경전에 누구 편을 들 생각은 없다. 분명한 것은 ‘배신자의 동네’라는 낙인을 두 곳 모두 두려워하고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니까. 모로 가도 출세만 하고 돈만 벌면 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몸을 바쳐 나라와 백성을 고민한 사람을 배신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수치인지를 절감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악질적인 변절에 어처구니없이 관대하고, 그 배신자는 굶어죽기는커녕 배 두드리면서 호의호식하는 일이 허다한 오늘날을 살면서 어찌 그 두 동네의 드잡이에 까탈을 잡을 수 있을까.
녹두장군이 1894년 12월 28일 외세에는 허약했으나 안으로는 잔인했던 관의 손에 떨어졌다. 배반의 파랑새가 녹두밭에 앉았고 녹두꽃은 떨어져 숱한 청포장수들이 울면서 흩어졌다. 탐관오리에 대해 저항하여 일어섰던, 수많은 백의의 농민들의 지도자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전봉준은 오늘 다리가 부러진 채 포로가 됐다. 그가 기세를 올릴 때 불리운 노래들은 오늘날에도 새롭다. “갑오(甲午)세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 병신(丙申) 되면 못가리.” 가야할 때 가지 못하고 을미적거리면 병신밖에는 될 것이 없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가마에 앉아 압송되면서 주변을 노려보는 전봉준의 눈에서 나는 그 노래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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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2월 28일 녹두꽃이 떨어지면
1894년 갑오년의 겨울은 추웠다. 춥다못해 삭막했다. 특히 충청도 이남 호남 땅은 더욱 꽁꽁 얼어붙었다. 그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군 몇 만명의 시신이 굳은 땅 속에서 더디 썩어가고 있었다. 척양척왜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한양으로 진군하려던 그들은 대개 우금치 전투에서 몰살당했고 다른 전투에서도 패퇴했다. 패잔 농민군은 관군과 '의병' (동학군에 반대...한 양반들이 조직한)의 눈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녹두장군 전봉준도 그 중의 하나였다. 5척 단구로서 남의 눈에 띌 체형은 아니었지만 그 눈빛만은 눈에 띄게 형형했던 그는 그 눈 앞에서 죽어간 동료들 생각에 가슴을 치면서 살을 잘라 오는 겨울 바람을 헤치며 전라도 순창 피노리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곳에는 그와 함께 봉기에 참여했던 믿을만한 부하가 은신 중이었다. 남하하는 길목에 경천이라 불리우는 냇물을 건널 때 전봉준은 일순 긴장한다. 언젠가 들은 예언에서 그는 "경천을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천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고 관군의 잠복도 없었다.
그는 무사히 부하를 만난다. 몇 달 전만해도 함께 싸운 동향의 동지. 그는 주막집으로 전봉준을 안내하고 모처럼 구들장을 지고 더운밥을 먹은 녹두장군은 긴장을 풀고 다리를 뻗지만 그가 믿었던 부하는 마음 속이 시끄러웠다. 이미 틀어진 일, 막대한 현상금과 포상이 내걸린 전봉준을 관군에 넘긴다면 팔자를 고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생사를 같이하며 죽창을 함께 맸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외침에 자신도 공감했던 지도자를 버린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입술을 깨문다. 장군 미안하오. 나는 살아야겠소. 그것도 보란 듯이 한 번 그의 이름은 김'경천'이었다
그는 인근에 사는 전주 감영의 퇴역 장교인 한신현에게 전봉준의 출현을 밀고했고 한신현은 동네 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을 급습한다. 낌새를 챈 전봉준은 주막 담장을 넘어 도망가려 했지만 장정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잡히고 만다. 녹두꽃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1894년 양력 12월 28일이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전봉준을 어찌나 두들겨 패면서 끌고 갔던지 하룻길이면 갈 순창 군청까지 이틀 걸려 갔다고 한다.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진 채 그는 서울로 압송된다.
......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안도현 시 - 서울로 가는 전봉준 중에서)
전봉준 체포에 공이 큰 한신현은 군수 감투를 썼고, 담장을 넘는 전봉준의 다리를 부러뜨렸던 동네 청년들에게도 두둑한 상금이 내렸다. 하지만 정작 전봉준을 처음 밀고했던 김경천은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다가 굶어죽었다고 전한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백성들이 내린 배신자에 대한 응징의 결과였을까.
2005년 순창군은 전봉준이 잡혔던 주막집 일대에 ‘전봉준 피체지 기념관’을 세웠다. 전봉준이 체포된 곳을 기념한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순창 사람들은 백성들의 영웅이었던 전봉준을 잡아서 관에 넘긴 곳이라는 ‘배신’의 비난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굳이 안내판에 “정읍 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곳”이라고 써 놨다.
오늘날의 정읍은 전봉준과 김경천의 고향이었던 고부군과 정읍현이 합쳐진 곳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읍 사람들로서는 어이가 없었나보다. 항의가 잇따랐고 종국에는 안내판이 훼손되어 경찰이 수사에 나서기도 했으며, 두 지자체 간에 날카로운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그 신경전에 누구 편을 들 생각은 없다. 분명한 것은 ‘배신자의 동네’라는 낙인을 두 곳 모두 두려워하고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니까. 모로 가도 출세만 하고 돈만 벌면 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몸을 바쳐 나라와 백성을 고민한 사람을 배신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수치인지를 절감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악질적인 변절에 어처구니없이 관대하고, 그 배신자는 굶어죽기는커녕 배 두드리면서 호의호식하는 일이 허다한 오늘날을 살면서 어찌 그 두 동네의 드잡이에 까탈을 잡을 수 있을까.
녹두장군이 1894년 12월 28일 외세에는 허약했으나 안으로는 잔인했던 관의 손에 떨어졌다. 배반의 파랑새가 녹두밭에 앉았고 녹두꽃은 떨어져 숱한 청포장수들이 울면서 흩어졌다. 탐관오리에 대해 저항하여 일어섰던, 수많은 백의의 농민들의 지도자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전봉준은 오늘 다리가 부러진 채 포로가 됐다. 그가 기세를 올릴 때 불리운 노래들은 오늘날에도 새롭다. “갑오(甲午)세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 병신(丙申) 되면 못가리.” 가야할 때 가지 못하고 을미적거리면 병신밖에는 될 것이 없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가마에 앉아 압송되면서 주변을 노려보는 전봉준의 눈에서 나는 그 노래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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