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27일 닥치고 반탁
모든 민족, 모든 나라의 역사는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우리 현대사는 더더욱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대동단결’했던 순간은 실로 드물다. 물론 사안마다, 그리고 동네마다 하나가 되어 작은 승리를 일군 기억은 있을지 몰라도 3천만 또는 4천만 백성이 하나되었 일어선 기억은 흔하지는 않다. 그 중의 하나가 1945년 12월 27일의 한 신문 기사로부터 비롯된다.
...
이 날 동아일보 1면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해방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 보도로 채워졌다. 동아일보는 그 회담의 결과를 이렇게 요약했다.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 독립 문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동아일보의 주장은 이랬다.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삼십팔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36년 식민지살이를 겪고 이제 독립된 나라의 국민이 되고자 하는 꿈에 부풀어 있던 조선 인민들에게 동아일보의 보도는 청천의 벽력이었고 방심한 사이 날아든 카운터 펀치였다. 아니 몇 년을 누구 밑에서 어쩌고 저째?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씨근거리며 일어날 일이었다. 이것들이 사람을 뭘로 보고......
그로부터 며칠 동안 조선은 대동단결한다. 공산주의자부터 우익 지주들까지 좌와 우가 없었고 상과 하가 없었다.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됐다. 일본놈들한테 놓여난지 몇 달인데 다시 외국 놈들한테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자체가 비위를 긁었고, 분통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전국의 극장이 문을 닫았다. 극장 지배인들이 나와 신탁통치 소식을 전하자 관객들은 우리가 영화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음 날은 극장이고 ‘딴스홀’이고 모조리 휴관이었다. 이들 뿐이 아니었다. 유흥가들도 문을 닫아걸었고 심지어 미군들에게서 월급 받던 군정청 직원들에다가 경찰들까지도 일손을 놓았다. “우리는 지금 이같이 모여 결의를 했다. 경찰관의 직을 떠나 자주국가로서 완전독립이 올 때까지는 민중과 더불어 치안대원으로서 결사의 사명을 다하겠다.” (동대문서장의 발언) 공산주의자들도 힘을 보탰다. “신탁통치 결정이 사실이라면 결사 반대한다.”
가히 거국적인 ‘단결’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신탁통치를 제안했다는 소련에 대한 분노도 끓어올랐다. 빌어먹을 로스케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의 기사는 명백한 ‘오보’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가 신탁통치를 결의한 것은 맞으나 신탁 통치를 주장한 측의 주체가 뒤바뀌어 있었다. 신탁통치를 강하게 주장한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고 소련은 이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보도 내용은 정 반대였던 것이다.
최대 5년을 기한으로, 미·영·소·중 4개국 정부가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 제3조에 있긴 하지만 이는 조선인들이 오해한 대로 외국이 일본의 뒤를 이어 한반도를 통치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다른 조항에 따르면 한국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임시정부는 신탁통치의 시한과 시행 방안 등을 4개국 정부와 협의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즉 그렇게 비합리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막을 깊이 알아볼 여유도 없이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흥분했고 한길로 쏠렸다. "닥치고 반탁"이었다. 그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은 아예 ‘반민족 세력’으로 낙인찍혔다.
당시 반탁세력과 찬탁으로 돌아선 좌익의 삐라를 비교해 본다. "삼천만 대한전민족의 총궐기의 秋(추). 신탁통치 절대반대! 결사코 자유를 전취하자!! 살아서 노예가 되느니보다 죽어서 조국을 방호하라!!" 명료하고 단순하고 확실했다. 이에 비해 "누가 조선민족을 일본제국주의의 질곡으로부터 해방하여 주었으며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피투성이의 싸움을 하여온 연합국이 우리에게 압박과 노예화를 기도할 리가 있는가? 단연코 없다!"는 좌익의 호소는 궁색하고 허약했다.
닥치고 반탁!의 자기장은 너무나 강력했다. 외세에 몸 판 자들, 민족보다 소련의 지시에 더 순종적인 자들이라는 비난이 빗발쳤고 해방 이후 내내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좌익은 급속도로 그 우세를 잃어간다.
대개 명분은 항상 옳고 정당하며 천추에 푸르른 법이지만 항상 그 뒤에는 정치적 주판을 튕기는 무리들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깊은 사려보다는 감정적 호소에 능하고 내용 있는 동맹이 아니라 '닥치고 단결'의 대오에 더 관심이 많다. 동아일보의 오보(?)는 해방된 해의 세모를 벌겋게 달구었다. 그 뜨거운 불판 위에서 조선 사람들은 누구를 위하여서인지 모를 춤을 추었다. '닥치고 반탁'의 정당해 보이는, 그러나 어마어마하게 단순하고 폭력적이었던 '단결'은 한반도의 운명을 바꾸어 놨다.
tag : 산하의오역
모든 민족, 모든 나라의 역사는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우리 현대사는 더더욱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대동단결’했던 순간은 실로 드물다. 물론 사안마다, 그리고 동네마다 하나가 되어 작은 승리를 일군 기억은 있을지 몰라도 3천만 또는 4천만 백성이 하나되었 일어선 기억은 흔하지는 않다. 그 중의 하나가 1945년 12월 27일의 한 신문 기사로부터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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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동아일보 1면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해방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 보도로 채워졌다. 동아일보는 그 회담의 결과를 이렇게 요약했다.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 독립 문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동아일보의 주장은 이랬다.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삼십팔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36년 식민지살이를 겪고 이제 독립된 나라의 국민이 되고자 하는 꿈에 부풀어 있던 조선 인민들에게 동아일보의 보도는 청천의 벽력이었고 방심한 사이 날아든 카운터 펀치였다. 아니 몇 년을 누구 밑에서 어쩌고 저째?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씨근거리며 일어날 일이었다. 이것들이 사람을 뭘로 보고......
그로부터 며칠 동안 조선은 대동단결한다. 공산주의자부터 우익 지주들까지 좌와 우가 없었고 상과 하가 없었다.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됐다. 일본놈들한테 놓여난지 몇 달인데 다시 외국 놈들한테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자체가 비위를 긁었고, 분통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전국의 극장이 문을 닫았다. 극장 지배인들이 나와 신탁통치 소식을 전하자 관객들은 우리가 영화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음 날은 극장이고 ‘딴스홀’이고 모조리 휴관이었다. 이들 뿐이 아니었다. 유흥가들도 문을 닫아걸었고 심지어 미군들에게서 월급 받던 군정청 직원들에다가 경찰들까지도 일손을 놓았다. “우리는 지금 이같이 모여 결의를 했다. 경찰관의 직을 떠나 자주국가로서 완전독립이 올 때까지는 민중과 더불어 치안대원으로서 결사의 사명을 다하겠다.” (동대문서장의 발언) 공산주의자들도 힘을 보탰다. “신탁통치 결정이 사실이라면 결사 반대한다.”
가히 거국적인 ‘단결’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신탁통치를 제안했다는 소련에 대한 분노도 끓어올랐다. 빌어먹을 로스케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의 기사는 명백한 ‘오보’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가 신탁통치를 결의한 것은 맞으나 신탁 통치를 주장한 측의 주체가 뒤바뀌어 있었다. 신탁통치를 강하게 주장한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고 소련은 이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보도 내용은 정 반대였던 것이다.
최대 5년을 기한으로, 미·영·소·중 4개국 정부가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 제3조에 있긴 하지만 이는 조선인들이 오해한 대로 외국이 일본의 뒤를 이어 한반도를 통치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다른 조항에 따르면 한국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임시정부는 신탁통치의 시한과 시행 방안 등을 4개국 정부와 협의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즉 그렇게 비합리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막을 깊이 알아볼 여유도 없이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흥분했고 한길로 쏠렸다. "닥치고 반탁"이었다. 그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은 아예 ‘반민족 세력’으로 낙인찍혔다.
당시 반탁세력과 찬탁으로 돌아선 좌익의 삐라를 비교해 본다. "삼천만 대한전민족의 총궐기의 秋(추). 신탁통치 절대반대! 결사코 자유를 전취하자!! 살아서 노예가 되느니보다 죽어서 조국을 방호하라!!" 명료하고 단순하고 확실했다. 이에 비해 "누가 조선민족을 일본제국주의의 질곡으로부터 해방하여 주었으며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피투성이의 싸움을 하여온 연합국이 우리에게 압박과 노예화를 기도할 리가 있는가? 단연코 없다!"는 좌익의 호소는 궁색하고 허약했다.
닥치고 반탁!의 자기장은 너무나 강력했다. 외세에 몸 판 자들, 민족보다 소련의 지시에 더 순종적인 자들이라는 비난이 빗발쳤고 해방 이후 내내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좌익은 급속도로 그 우세를 잃어간다.
대개 명분은 항상 옳고 정당하며 천추에 푸르른 법이지만 항상 그 뒤에는 정치적 주판을 튕기는 무리들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깊은 사려보다는 감정적 호소에 능하고 내용 있는 동맹이 아니라 '닥치고 단결'의 대오에 더 관심이 많다. 동아일보의 오보(?)는 해방된 해의 세모를 벌겋게 달구었다. 그 뜨거운 불판 위에서 조선 사람들은 누구를 위하여서인지 모를 춤을 추었다. '닥치고 반탁'의 정당해 보이는, 그러나 어마어마하게 단순하고 폭력적이었던 '단결'은 한반도의 운명을 바꾸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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