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74년 12월 26일 위대한 백지의 시작
10월 24일 산하의 오역에 74년 그날 동아일보에서 열린 “자유언론수호대회”를 끄적인 바 있는데, 오늘은 그 후속편이 되겠다. 언론이 말 그대로 재갈이 물리고 결박당하고 주리가 틀리던 시절이었다. 현재 방송통신위원장이시며 여러 모로,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서 원성을 들으시는 그분도 기사 잘못 썼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얼굴을 못알아보도록” 두들겨 맞고 나...온 이력이 있으시고, 비근한 예는 열 손가락으로는 꼽을 수도도 없을 정도로 비일비재했다.
말(言)하고 논(論)하는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히고 사탕발림만 굴려야 했으니 그 갑갑함이 여북했을까. 대학생들이 대놓고 신문을 불태우며 당신들의 생존 가치를 증명하라고 조롱하는 상황에 이르자 동아일보 기자들은 드디어 그 직을 걸고 투쟁에 나선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창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정권은 당황했다. 믿는 도끼까지는 아니었어도 부뚜막의 소금 정도로서 필요할 때 국에 집어넣으면 되는 존재로 치부했던 언론 종사자들이 이렇게 자유 타령을 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집단으로 반항하다니. 그렇다고 명색이 자유를 억압하는 빨갱이들에 대항한다는 민주공화국 정부 체면에 일제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의 신문 동아일보를 대놓고 즈려밟기도 애매한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보자보자하니 문제가 심각했다. 그때껏 알아서 차단되어 왔던 정보가 봇물 터지듯 지면을 장식하는 게 아닌가. 예나 지금이나 꼼수 하나는 세계 정상급인 대한민국 정부는 가공할만한 꼼수 하나를 창안해 낸다.
1974년 12월 26일 동아일보 독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신문지면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던 광고란들이 텅텅 비어 운동장같이 휑해 보이는 신문이 배달된 것이다. 광고주들이 “아무것도 묻지 말아 달라”며 광고판을 회수해 간 결과였다. 수십 년 거래해온 기업들도, 광고국과 유난한 인연을 맺어온 이들도 모두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대번에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튿날 3면 광고난에는 시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봉화같은 광고가 실린다. ‘민주시민’들의 광고게재를 부탁하는 ‘동아일보 신문광고PR 1’이었다.
이 봉화에 처음으로 호응한 것은 역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었지만 터진 물꼬 뒤로는 해일같은 봇물이 밀려들었다. 역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었다. “동아!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갈 거야!”라고 선언한 이대S생부터, “동아일보 배달원임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외치는 배달원 15인까지, “ “존경하는 삼천만 배달민족이여 권력과 악질 재벌들에 대항하여 우리 국민의 선두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동아를 구하는 데 모두 일어납시다. 그리고 권력의 앞잡이나 하고 재벌의 돈이나 받아먹는 다른 신문이나 방송은 구독이나 청취를 하지 맙시다.” 라고 부르짖은 강경파부터 “배운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이렇게 사죄하나이다.”라고 고백한 소심파까지, 대한민국 장삼이사들의 광고 행진이 이어진 것이다.
광고주들이, 아니 그들 머리 위에 선 정권이 밀어버린 백지 위에서 공화국의 시민들의 난장이 벌어졌다. 그들의 광고를 보면서 기자들은 울었고, 시민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처지의 누군가가 실은 광고에 공감하며 울었다. 요즘 말로 “더 이상은 쫄지 않겠다.”는 선언들의 퍼레이드였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생생한 의인화였다.
물론 그 눈물겨운 광고의 홍수는 백일 천하에 그쳤다. 사측은 75년 3월 8일 경영난을 이유로 부서를 폐지하고 18명을 전격 해임했고 이에 항의하여 송건호 편집국장이 사표를 제출하고 기자와 아나운서들이 제작거부로 맞서자 130명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을 해고하는 칼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모난 돌은 정을 맞고 나선 사람은 다쳤다. 그 정에 머리가 깨진 ‘돌’들은 많았고, 자상 타박상 정신적 외상 골고루 입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저항의 짜릿함은 일종의 마약처럼 그들의 골수에 스며들고 유전처럼 전이된다. 백지 광고에 저항했던 기자들이 다시 한 번 어깨를 걸었고, 동아일보 성원 광고를 낸 사람들과 그 후대가 그들을 떠받치고 일어섰을 때 한겨레 신문이 창간된 것은 그 한 예일 뿐일 게다.
1974년 말미를 장식한 백지의 향연. 그리고 그 백지를 스스로 채워간 국민들의 드라마는 우리 현대사가 기억해야 할 아름다운 장면 베스트에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먹고 살기”가 지금보다 힘들면 힘들었지 결코 녹녹하지는 않았던 시절, ‘먹고 살기 힘든’ 시민들과 그때만 해도 처우가 일반 직장보다 낫다고는 볼 수 없던 기자들의 동맹의 깃발이 미려하게 펄럭인 셈이었다. 동아일보에 밀려든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선배들의 글자 한 자 한 자를 다시 읽어 본다. 여러 생각이 엇갈린다. 참 그때는 먹고 살기 힘들었는데...... 보릿고개도 면한지 얼마 안되었었는데..... 대통령 욕하면 징역을 몇 년을 갈지 모르는 시대였는데..... 그들은 그렇게 했었는데..... 우리는?? 나는? 에이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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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2월 26일 위대한 백지의 시작
10월 24일 산하의 오역에 74년 그날 동아일보에서 열린 “자유언론수호대회”를 끄적인 바 있는데, 오늘은 그 후속편이 되겠다. 언론이 말 그대로 재갈이 물리고 결박당하고 주리가 틀리던 시절이었다. 현재 방송통신위원장이시며 여러 모로,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서 원성을 들으시는 그분도 기사 잘못 썼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얼굴을 못알아보도록” 두들겨 맞고 나...온 이력이 있으시고, 비근한 예는 열 손가락으로는 꼽을 수도도 없을 정도로 비일비재했다.
말(言)하고 논(論)하는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히고 사탕발림만 굴려야 했으니 그 갑갑함이 여북했을까. 대학생들이 대놓고 신문을 불태우며 당신들의 생존 가치를 증명하라고 조롱하는 상황에 이르자 동아일보 기자들은 드디어 그 직을 걸고 투쟁에 나선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창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정권은 당황했다. 믿는 도끼까지는 아니었어도 부뚜막의 소금 정도로서 필요할 때 국에 집어넣으면 되는 존재로 치부했던 언론 종사자들이 이렇게 자유 타령을 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집단으로 반항하다니. 그렇다고 명색이 자유를 억압하는 빨갱이들에 대항한다는 민주공화국 정부 체면에 일제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의 신문 동아일보를 대놓고 즈려밟기도 애매한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보자보자하니 문제가 심각했다. 그때껏 알아서 차단되어 왔던 정보가 봇물 터지듯 지면을 장식하는 게 아닌가. 예나 지금이나 꼼수 하나는 세계 정상급인 대한민국 정부는 가공할만한 꼼수 하나를 창안해 낸다.
1974년 12월 26일 동아일보 독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신문지면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던 광고란들이 텅텅 비어 운동장같이 휑해 보이는 신문이 배달된 것이다. 광고주들이 “아무것도 묻지 말아 달라”며 광고판을 회수해 간 결과였다. 수십 년 거래해온 기업들도, 광고국과 유난한 인연을 맺어온 이들도 모두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대번에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튿날 3면 광고난에는 시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봉화같은 광고가 실린다. ‘민주시민’들의 광고게재를 부탁하는 ‘동아일보 신문광고PR 1’이었다.
이 봉화에 처음으로 호응한 것은 역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었지만 터진 물꼬 뒤로는 해일같은 봇물이 밀려들었다. 역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었다. “동아!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갈 거야!”라고 선언한 이대S생부터, “동아일보 배달원임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외치는 배달원 15인까지, “ “존경하는 삼천만 배달민족이여 권력과 악질 재벌들에 대항하여 우리 국민의 선두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동아를 구하는 데 모두 일어납시다. 그리고 권력의 앞잡이나 하고 재벌의 돈이나 받아먹는 다른 신문이나 방송은 구독이나 청취를 하지 맙시다.” 라고 부르짖은 강경파부터 “배운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이렇게 사죄하나이다.”라고 고백한 소심파까지, 대한민국 장삼이사들의 광고 행진이 이어진 것이다.
광고주들이, 아니 그들 머리 위에 선 정권이 밀어버린 백지 위에서 공화국의 시민들의 난장이 벌어졌다. 그들의 광고를 보면서 기자들은 울었고, 시민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처지의 누군가가 실은 광고에 공감하며 울었다. 요즘 말로 “더 이상은 쫄지 않겠다.”는 선언들의 퍼레이드였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생생한 의인화였다.
물론 그 눈물겨운 광고의 홍수는 백일 천하에 그쳤다. 사측은 75년 3월 8일 경영난을 이유로 부서를 폐지하고 18명을 전격 해임했고 이에 항의하여 송건호 편집국장이 사표를 제출하고 기자와 아나운서들이 제작거부로 맞서자 130명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을 해고하는 칼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모난 돌은 정을 맞고 나선 사람은 다쳤다. 그 정에 머리가 깨진 ‘돌’들은 많았고, 자상 타박상 정신적 외상 골고루 입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저항의 짜릿함은 일종의 마약처럼 그들의 골수에 스며들고 유전처럼 전이된다. 백지 광고에 저항했던 기자들이 다시 한 번 어깨를 걸었고, 동아일보 성원 광고를 낸 사람들과 그 후대가 그들을 떠받치고 일어섰을 때 한겨레 신문이 창간된 것은 그 한 예일 뿐일 게다.
1974년 말미를 장식한 백지의 향연. 그리고 그 백지를 스스로 채워간 국민들의 드라마는 우리 현대사가 기억해야 할 아름다운 장면 베스트에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먹고 살기”가 지금보다 힘들면 힘들었지 결코 녹녹하지는 않았던 시절, ‘먹고 살기 힘든’ 시민들과 그때만 해도 처우가 일반 직장보다 낫다고는 볼 수 없던 기자들의 동맹의 깃발이 미려하게 펄럭인 셈이었다. 동아일보에 밀려든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선배들의 글자 한 자 한 자를 다시 읽어 본다. 여러 생각이 엇갈린다. 참 그때는 먹고 살기 힘들었는데...... 보릿고개도 면한지 얼마 안되었었는데..... 대통령 욕하면 징역을 몇 년을 갈지 모르는 시대였는데..... 그들은 그렇게 했었는데..... 우리는?? 나는? 에이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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