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896년 1월 1일 건양 원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방대한 기록 자료인 조선왕조실록. 매일같이 사관들이 붓을 휘둘러 꼼꼼히 기입한 조선왕조실록에서 별안간 40여일이나 되는 날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임진왜란같은 전쟁통에 유실된 것도 아니고 천재지변이나 반란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조선왕조실록은 1895년 을미년 11월 17일에서 껑충 건너뛰어 1896년 1월 1일로 넘어간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을미개혁을 통해 태양력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때껏 써 오던 청나라의 광서(光緖)연호도 버리고 건양(建陽) 원년의 연호를 사용한 이 개혁을 통해 1895년 을미년 11월 17일은 1896년 건양 원년 1월 1일이 된 것이다. 정월 초하루를 손꼽아 기다리던 천만 조선 백성들은 별안간 나랏님에 의해 앞당겨진 정월 초하루에 얼떨떨한, 아니 어쩌면 거의 아무도 몰랐을 새해를 맞게 된다. 우리 역사 최초의 신정(新正)이었다.
역법이 음력에서 양력으로 바뀌던 마지막 날, 즉 1895년 을미년 11월 16일은 한 신하의 노기띤 상소로 점철되어 있었다. 주인공은 학부대신 이도재. 그는 이틀 전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위하여“ 임금과 세자부터 그 상투를 자르고 내린 단발령에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내각이 새 연호와 단발을 강행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단군 이래 땋은 머리 풍속이 변해 상투가 된 것이고 백성들 모두가 이 상투를 중히 여기는 데 하루아침에 이를 깎는다는 것은 4천년동안 굳어져온 풍속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 이도재는 대신직을 던졌고 바로 면직된다. 광서 21년 을미년 11월 16일이었다.
단발령을 내린 김홍집 내각은 1월 1일 왕을 모시고 주다례를 거행하고 각국 공사들을 접견하는 등 새로운 양력 원년의 모양새를 갖추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단호하게 시행한 것 중의 하나가 단발령의 확대였다. 기실 을미사변 이후 강화된 일본의 영향력 하에 성립한 친일 내각의 중심인물인 김홍집과 어윤중조차 임금의 상투를 자르고 단발령을 펴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들 역시 사대부 출신으로서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 터럭 하나도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다)는 유교적 세계관에 젖어 있던 조선 민중의 저항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단발령의 배후는 일본이었다.
고종이 내린 단발령 조칙은 일본인 고문관이 검토한 것이었고, 일본 공사가 그 뒤에 버티고 있었다. 이 단발령은 근대화 작업의 일환이라기보다는 을미사변에 이은 조선인들의 자존심 꺾기라는 측면이 강했고 일본은 오히려 조선인들의 저항을 유발하여 일본의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까지도 드러내고 있었다. 단발령으로 인해 재미를 본 것도 일본 상인들이었다. “일본인들이 단발령을 강요한 것은 그들의 모자판매상과 의류상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다.” (윤치호 일기)
단발령 자체는 그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도재의 상소보다는 단발령의 주창자였고 고종의 상투를 자르는 자리에 있었던 유길준이 유림의 거두 최익현에게 호소했던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 “나라가 병들어 시든 것을 구하려는데 어찌 한 줌 머리카락을 그리도 아끼십니까.” 그러나 주체의 정체가 애매한 개혁, 외세의 요구에 편승하고 그 힘에 밀려 강행된 개혁은 오히려 역풍을 불렀다. ‘체두관’이라는 임시 관직까지 만들어 저잣거리에서 행인들의 상투를 잘라댄 김홍집 내각은 민중들의 증오의 대상이 됐고, 그들이 가졌던 선의를 펴 볼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말았다.
1896년 1월 12일 (음력 1895년 11월 28일) 이필희가 의병을 일으키면서 을미의병이 벌집 쑤신 듯 일어났고 2월 11일 고종 또한 궁궐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김으로써 김홍집 내각을 버리고 그들을 대역죄인으로 선포하게 된다. 우리 역사 최초의 양력 1월 1일을 총리대신으로 맞았던 김홍집은 일본측으로 피신하라 권유하는 이에게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조선인에게 맞아죽는 것은 천명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에게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과 같다.”고 부르짖고 입궐하다가 군중들에게 맞아죽었다. 보수 유림이라 할 매천 황현조차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다.”고 평가했고 그가 집권을 계속했더라면 국권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 탄식했던 김홍집과 그의 개혁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만신창이가 된 채 사라졌다. 1896년 1월 1일은 그 불안한 시작이었다.
2012년 1월 1일 역시 시작은 잿빛으로 불안하나 올해의 제야는 환호 아니면 최소한 기대 속에 맞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