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497

1949.5.4 대한민국 국군 흑역사 2개대대 월북

$
0
0
산하의 오역 

1949년 5월 4일 2개 대대 월북 사건 

“한국 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 기실 이 질문은 의미가 없다. 이미 판가름난 일이기 때문이다. 악착같이 대답 못하겠다는 통진당 이정희 의원이 불쌍할 뿐, 전면전이라는 지옥의 문고리를 잡고 힘차게 끌어당긴 건 북한이라는 것은 이미 전 세계가 부인하지 않는다. 비록 “38선 일대는 상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6.25는 그것이 확대된 것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전면전의 개전 책임은 북한에게 있다. 

하지만 남쪽과 북쪽의 단독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쌍방간에 벌어진 무력 충돌과 후방 교란과 선전전의 양태를 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단이 공고해지는 과정이었고 전쟁이라는 불구덩이에 불씨가 지펴지는 시간이었고 전쟁과 분단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가로놓여진 사건들이 연거푸 고개를 디밀고 있기 때문이다. 1949년 5월 4일 대한민국 국군은 실로 극적인 사건 두 개를 동시에 맞이한다. 

하나는 육탄 10용사 사건이다. 1949년 5월 전쟁 전까지는 남쪽 땅이었던 개성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인민군이 38선 남부에 있던 송악산의 고지들을 점령하자 국군이 이를 탈환하고자 반격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민군들이 구축해 놓은 토치카들. 그걸 부술 수 있는 방법은 육탄 돌격 밖에 없었고 (또는 일본군에게 배운 버릇을 버리지 못했고) 10명의 병사들이 폭탄을 안고 적의 토치카를 파괴하고 장렬히 산화한 것이다. 국회에서도 추모 결의안이 통과되는 등 한바탕 난리법석이 있었는데 평양방송에서 이 육탄 10용사 가운데 최고참 서부덕 이등상사 등 두 명이 멀쩡히 우리는 살아 있다며 방송을 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은 육탄 10용사의 신화에 아주 큰 누가 되고 있긴 하지만. 

같은 날 동부전선에서는 또 하나의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진다. 오늘날 래프팅이 인기를 끄는 내린천은 한국 하천으로는 특이하게 남에서 북으로 흘러 소양강에 합류한다. 지금이야 한참 남쪽 땅이지만 당시의 내린천은 38선을 가로질러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었다. 일대를 지키는 6여단 8연대의 두 대대장은 매우 초조해 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군내 남로당 인맥에 대한 숙군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참모총장 이응준이 38선을 지키는 장교들을 함부로 조사할 수는 없다 거절하긴 했지만 그 이름도 끔찍한 김창룡이 이미 자신들을 조사하겠다고 설친 것도 알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육사 2기 동기생 한 명이 불어버린 명단으로 친했던 동료들이 끝장나는 것을 낱낱이 보고 있었다. 그 육사 2기생의 이름은 박정희였다. 

표무원과 강태무라는 이름의 두 대대장은 남로당원이었다는 설도 있고 그렇지 않다는 설도있다. (해제된 소련 정보 문서에는 북한 첩보원이 대대장이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그들은 1949년 5월 4일 황당한 일을 벌인다. 1대대장 표무원은 대대 병력을 이끌고 대북 시위에 나서는 것처럼 38선을 넘고는 “포위됐으니 항복하자.”고 나선 것이다. 일부 병력이 반항하자 인민군에게 위협 사격까지 요청하여 겁을 준다. 그래도 수백명의 병사들은 탈출했지만 나머지는 꼼짝없이 또는 환희에 차서 인민군에 ‘귀순’하게 된다. 2대대장 강태무의 경우는 좀 더 처참했다. 많은 부대원들이 저항했고 위장 귀순해 있던 인민군이 중대장에게 투항을 설득하자 중대장이 이 인민군들을 사살해 버린 일도 있었다.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수백 명의 한국군이 북한으로 월북해 버린 사건은 완성된다. 그 가운데 좌익도 있었을 것이고 어영부영 묻어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한국군으로서는 영원한 흑역사를 기록한 셈이다. 

강태무는 공격(?)에 나서기 전 따라 나서겠다고 자청하는 한 장교에게 “너는 여기에 남아라.”고 지시한다. 그 장교의 이름은 정승화. 후일 12.12 때 전두환에게 곤욕을 치르는 참모총장 정승화는 아차 하면 북으로 끌려갈 뻔 했다. 이 사건 이후 숙군 작업은 더욱 더 치열하고 혹독하게 전개된다. 약 5천여 명의 좌익 혐의자가 사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가거나 최소한 군문에서 쫓겨난다. 김일성은 6.25가 터진 후 강태무의 가족을 특별히 찾아 북송하고 인민군이 된 국군들을 자신들의 주둔지로 보내 가족들을 챙기게 하는 등 이 월북의 주인공들을 후대하지만 6.25 때 박헌영이 기대했던 남한 내부의 동조자들을 싹쓸이했던 가장 큰 계기는 바로 표무원과 강태무의 월북이었다. 

이 일로 백전노장 이응준 참모총장이 물러나게 되는데 그 뒤를 이은 것이 전쟁 초기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 준 채병덕이다. 또 황망한 월북 사건 후 국군은 복수 계획을 세운다. 방법은 월북 사태의 역이용. 또 한 부대가 월북하겠다는 거짓 전갈을 인민군에게 보낸 후 매복을 통해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매복 부대가 길을 잘못 들어 인민군과 충돌하면서 산통이 거의 깨졌는데 막판에 한 부대가 인민군 추격대를 격멸하는 공을 세우게 된다. 이걸 사직리 전투라고 부른다. 육탄 10용사의 송악산 전투나 사직리 전투 등에서 승리한 국군은 인민군을 묘하게 얕잡아보게 되고 이 근거없는 오만 또한 6.25 초전의 실패를 부르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표무원과 강태무는 둘 다 인민군에 복무하며 전쟁을 치루고 살아남는다. 영화 <포화 속으로>에 빅뱅의 탑과 권상우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인민군 766부대의 지휘관이 강태무였다. 둘은 천수를 누리며 인민군 장성으로 종생했으며 김정일로부터 생일상을 받는 조선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는 최상의 영광을 누리다가 죽었다. 둘 다 경상도 사람이었던 그들은 그곳에서 행복했을까. 하여간 그들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가느다란 물줄기들을 꽤 여러 개 돌려 놨던 사람들이었다. 

사진은 월북 대대원들에 대한 평양시민 환영대회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497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