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9년 5월 3일 동의대의 5.3
80년대의 거친 역사의 두루마리에는 5.3 이라는 날짜는 두 번 굵직하게 새겨져 있다. 한 번은 86년 인천에서 격렬하게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했던 5.3 사태이고 또 한 번이 바로 89년 동의대학교에서 경찰관과 학생들의 대치 중에 화재가 발생해 경찰관들이 불에 타 죽고 추락사했던 바로 그 5.3이다.
동의대학교는 내가 다닌 고등학교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집이 멀어 학교 근처에서 하숙하던 무렵 괜시리 대학생들 틈에 끼어보고 싶어서 동의대 도서관을 이용한 적도 있고 동의대 출신들이 연달아 대학가요제를 석권할 무렵, 그들이 떴다는 이야기에 호기심 많은 누나 부대의 일원이 되어서 산중턱을 깎아 만든 그 학교 고갯길을 낑낑대며 올라간 것도 한 두 번은 넘는다.
그래서 89년 5월 3일은 끔찍한 충격으로 다가섰다. 동의대 학생 시위대가 교문 밖으로 진출했을 때 시위대에게 위협사격으로 카빈총을 난사했던 파출소는 내가 족히 1천번은 더 지나쳤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억류된 백골단 몇 명이 끌려 올라갔을 그 고갯길은 여전히 가팔랐을 것이다. 화마가 여러 경찰관의 목숨을 삼켜 버린 도서관 7층 역시 대학생인양 의젓하게 책상에 앉아 성문종합영어를 보던 그때 그 자리 아니었던가.
5공 비리와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이라는 국민적 요구에 쩔쩔매던 노태우 정권은 문익환 목사의 방북과 현대중공업 사태 이후 공안 통치를 전면 확대하고 있는 참이었다. 마치 촛불시위를 겪고 '떼법' 타도를 부르짖었던 이명박 정권과 같은 양상이었다. 공안 정국의 전개 역시 화툿장 짝처럼 똑같았다. 농성이 시작되자마자, 아무런 예고나 선무방송이나 협상의 노력도 없이 백골단을 진입시켰고 고층빌딩 농성 진압에 필수적인 매트리스도 깔지 않았다. 그리고 원인이 분명치 않은 화재가 일어났고 경찰관 들은 화마의 희생양이 되거나 애처롭게도 창틀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사했다. 기름으로 난 불이라 물로는 소화가 안된다는 현장 지휘관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물대포를 쏘아대는 가운데 시민이 떨어져 죽었던 용산 사태와 다를 바가 적었다.
동의대 사태는 누가 뭐래도 불행한 사건이었고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으며 공권력의 집행자로서는 용서받기 힘든 성급함과 서투름과 무모함을 종합구성물로 보여 주었던 사건이었다. 또 독재 정권과 그에 빌붙은 학교 당국과의 투쟁 (부정 입시 문제가 시위의 이유였다)의 와중에서 벌어진 일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이 사건을 "민주화 운동 와중에 있었던 불행한 일"로 기억하지 그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격상되어야 할 사건으로 인정하지는 못하겠다. 더우기 그 유공의 댓가로 보상금을 받아야 했는가에는 더더욱 회의적이다.
동의대 사태의 진상 규명을 밝혀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항상 제기하는 것은 무성한 혹 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그 의혹들을 풀어 줄만한 '소문의 진상'을 나는 속시원하게 들어 본 적이 없다. 마치 KAL858기가 안기부에 의해 폭파되었다는 의혹은 무수했지만 끝내는 아무 것도 밝히지 못한 것처럼. “자 그럼 도대체 누가 뭘 어떻게 했다는 말이냐.”
89년의 동의대, 경찰이 자기 졸병들을 7층에 몰아넣고 화염방사기를 쏘지 않은 한, 어떤 경찰이 미리 도서관 7층에 잠입해서 대량의 화염병을 쌓아놓고 동료 경찰이 도서관에 진입하는 순간 터뜨려 버리지 않은 한, 속절없이 져 버린 7명의 목숨에 학생들은 법적으로, 그리고 그보다 더 크게 도의적으로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때 그 건물 안에 있었던 죄로 숨져야 했던 대학생에 대한 죄책감으로 반미전사가 아닌 방화범으로 지냈다는 문부식씨의 옛 고백은 그래서 재삼재사 귓가를 맴돈다. 해야 했던 일일지언정, 필요했던 싸움일지언정 스스로 초래해야 했던 컬래트럴 데미지 (부수적 피해)에 대해 무감하다면 그 세력의 도덕성은 발밑에서 무너지고 합리화의 벽은 난공불락으로 높아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동의대 학생들은 무감하지 않았다. 피해자 가족을 찾아다니며 사죄했다고 하고 함께 눈물 흘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그 슬픔과 아픔을 자기 것으로 했다면 굳이 유공의 표창을 자임해야 할 까닭이 있을까. 보상금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들이 유공자로 지정되었다는 뉴스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지는 뼈저린 비애가 아직 마르지 않았을진대 그 영광을 사양할 이유가 없다고만 해야 할까. 그 영광은 과연 사수해야만 할 것인가. 동의대에서 끔찍한 화상을 입은 한 전경은 말도 못하고 손가락이 늘러붙어 글씨도 쓸 수 없게 되자 발가락에 펜을 끼워 달라고 하여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한다.
“효도하지 못하고 떠나 죄송합니다. 이제 신앙 생활을 하시면서 모든 것을 용서하세요.” 그리고 그는 사태 발생 23일 후에 죽었다. 그 부모 앞에서 과연 민주화운동 유공자의 영광이 빛날 수 있을까.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민주화 운동 세력은 크나큰 공도 세웠지만 적잖은 실수와 오류도 저지른 것이 사실이며, 본의 아닌 피해를 예기치 않은 사람들에게 입힌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프락치로 오인한 (또는 실제로 프락치일 수도 있었던) 학생을 취조(?)하다가 때려 죽인 학생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사실 구타에 주동적으로 가담하지도 않았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결국 상해치사범으로서 그 죄를 뒤집어쓰고 옥고를 치른 사람도 있었다. 이른바 잡범이었다. 그리고 하다못해 '양심수' 의 명단에 끼지도 못했고 그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선택이 참담하게 존경스럽다. 정권의 프락치 활동이 얼마나 자심했는지는 누구나 안다. 정권의 만행에 대응하여 일군 제반 투쟁은 분명 민주화 투쟁이라 할 것이지만, 그 와중에 일어난 일 전체를 민주화 운동의 휘장으로 감쌀 수는 없지 않겠는가.
동의대 사태에서 숨져간 경찰관들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그 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동의대 사태 관련자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그러나 그들의 표창과 보상에는 끝내 손을 들 수 없을 것 같다. 동의대 사태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우리의 오늘을 이룬 (요즘은 어찌 된 게 그 시절로 다시 돌아온 것 같지만) 그 지난한 투쟁의 과정에서 벌어졌던 일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태의 관련자들에게 유공의 표창을 드리기에는 우리가 덜어야 할 아픔이 너무 많다. 5월 3일은 1986년 인천 5.3 사태가 있던 날이다. 그 포스팅을 했더니 페친이 생생한 기억을 올려 주셨다. 시위대 틈을 뚫고 들어왔다가 고립된 페퍼포그에 매달린 전경이 공격받는 와중에 그 험한 각목질을 받고도 매달려 있던 전경이 보도블록으로 머리를 때리자 그만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고...... 그 전경은 5월 3일이면 어떤 생각이 들까. 물론 내가 너무 예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되묻는 것은 과연 우리가 그렇게 대범하다면 저들은 더 대범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