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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5.5 중공 민항기 불시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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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3년 5월 5일 중국 민항기 착륙

 

한 달쯤 뒤 6월 8일에는 춘천 시민들에게 큰 선물이 공개될 예정입니다. 반세기 동안 춘천의 노른자위 자리에 턱 하니 좌정하고 있던 미군 페이지 기지가 2005년 미군 병력이 철수한 뒤 8년에 걸친 공사와 정리 끝에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50년간 이 캠프 페이지에도 별 일이 다 있었지요. 근처에 고엽제를 파묻었다는 미군 퇴역 군인의 증언 때문에 난리가 난 곳도 이곳이었고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음이 공식적으로 밝혀졌던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기지가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은 것은 1983년 5월 5일이었을 겁니다.

 

어린이날이었습니다. 날씨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어린이날 나들이객으로 전국 유원지며 놀이동산이 붐빌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로운 오후를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찢어 놓습니다. 공습경보였지요. 불과 석 달 전 이웅평 대위가 미그 19를 몰고 넘어와 휴전 이후 첫 사이렌이 울린 바 있었기에 사람들은 오히려 더 그 소리에 긴장합니다. 이번엔 정말이구나! 진짜 전쟁이구나. 김정은 이하 북한 군부가 목이 찢어져라 전쟁불사를 외쳐도 별 신경쓰지 않는 요즘과 달리 당시 한국 사람들은 전쟁의 공포를 체화하고 있었지요. 사람들은 슈퍼로 튀어 라면과 생필품을 집어들었고 피난짐을 싸기도 했습니다. 공습경보를 울린 항공기는 납치된 중공 민항기였습니다.

 

심양을 이륙한 중국 국내선 민항기. 여자 1명이 낀 6명의 납치범들이 권총을 쏘며 조종실에 난입, 남쪽으로 가자고 요구합니다. “남쪽으로 가자면 어디란 말인가.” 승무원의 질문에 범인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한성(漢城)으로 가자.” 곧 서울로 가자는 말이었지요. 기장은 남쪽으로 향하던 중 기지를 발휘하여 북한 영공을 통과합니다. 평양 상공에서 선회하면서 뭔가 대응이 있어 주기를 고대했지만 무슨 영문인지 북한 당국은 이 비행기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예고에 없는 고위층 방문으로 생각했던 건지 평양 방공망이 무능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범인들은 눈치를 챘고 다시 기장 머리에 총을 들이댑니다. “한성! 한성으로 가자니까.”

 

민항기가 휴전선에 접근하자 남한측 비행기는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랐고 서울 등 중부 지역에는 공습 경보가 울립니다. 그리고 범인들의 바램과는 조금 다르게 이들은 춘천의 캠프 페이지에 불시착합니다. 활주로를 벗어나 철조망 직전까지 치달았으니 자칫하면 대형참사로 치달을 뻔 했죠. 어쨌든 ‘중공’ 민항기는 휴전 이후 처음으로 그 오성홍기를 남한 땅에 선보이게 됩니다. 이 초유의 사태를 맞아 군이고 안기부고 청와대고 할 것 없이 발칵 뒤집힙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민항기 불시착 당일 중공으로부터 외교 전문이 날아든 겁니다. “교섭대표단을 태운 특별기를 보낼 테니 착륙 허가를 내 달라.” 명의는 중공 민항국장이었습니다. (2011.7.4 연합뉴스 - 외교열전) 중국 정부가 남한 정부에 전문을 보낸 것은 휴전 이후 처음이었던데다가 이례적으로 재빠른 발걸음이라 남한 정부도 놀랄 수 밖에 없었죠. 불과 이틀만에 중국에서 33명이라는 대규모 협상단이 몰려옵니다.

 

김상협 당시 총리가 “봉황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왔다.”고 표현했다고 하는데 중공 민항기의 존재는 당시만 해도 철천지 원수의 나라에 가깝던 중국과 한국 사이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됩니다. 일단 이때 처음으로 공식 문서상에서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국호를 서로 사용했고 정부와 정부간의 공식 협상이 이뤄집니다. 중국측은 기체와 승객, 납치범까지 돌려받길 원했지만 한국측은 납치범의 경우 국내법으로 처벌하겠다고 버팁니다. 자유중국이라고 불리던 대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또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났던 것을 기화로 ‘수리중’이라는 이유로 비행기를 쉽게 내주지 않죠. 결국 5일만에 한국측 입장이 거의 받아들여진 채 협상은 마무리됩니다. 승객들은 선물 실컷 받고 누릴 거 다 누린 다음 본국으로 돌아갔고요.

 

그런데 좀 이상한 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저 만만디의 중국인들이 의외로 “빨리 빨리”의 한국적 풍습에 젖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전광석화같이 일을 추진했던가. 그 이유는 피랍 승객 중에 중국 최고의 미사일 전문가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연합뉴스 2011.7.4) 적성국가인 한국이나 그 후견자 미국이 그런 유능한(?) 인재를 발견했다면 언제든 “정치적 망명” 따위의 꼼수로 빼돌릴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몸이 달아도 바싹 달아오른 거죠. 그래서 한국이 뭐라고 하든 하오 하오 하면서 넘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1983년 5월 5일, 그때까지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빽빽이 들어서 있던 죽의 장막은 걷혀지게 됩니다. 중국이 대만을 대표하여 명동의 대사관을 차지하고 대만 사람들이 분노에 떨며 밀려난 것은 그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역사는 참 엉뚱한 데에서 자기 길의 서막을 울리는 일이 많습니다. 한성으로 가자던 비행기 납치범들은 아마 자신들의 행동이 한국과 중국 양국이 서로에게 그 문을 여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죠. 공산 지옥에서 자유를 찾은 영웅들로 대만에서 환영받았던 그들 가운데 일부의 말로는 매우 불행했다고 전합니다. (역시 애를 납치해서 돈을 요구하다가 체포됐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어요.) 어쨌건 1983년 5월 5일은 하나의 새로운 역사의 선로가 철컥거리며 자리를 잡았던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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