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9.12.22 “컨두카토르”가 무너지던 날
루마니아는 좀 독특한 나라다. 이름 자체가 로마인의 땅이라는 뜻으로서 슬라브족이 대세를 이루는 동유럽에서 일종의 섬이라고 불리울 만큼 독특한 정체성을 가져온 나라이며, 동유럽을 장악했건 오스만 투르크에 끈질기게 저항했던 드라큘라 백작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 역사를 더듬자면 얘기가 길어질 것 같고, 20세기 이 나라의 역사를 감히 정리한다면 매우 줄을 잘 못 섰거나, 잘 섰더라도 운이 없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우선 1차 대전 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반대하여 연합국에 가담한 것까진 좋았는데 지척에 있는 오스트리아와 그 큰형님 독일군에 의해 참패를 당하고 연합국 측에서는 유일하게 추축국에 항복한 나라가 됐다. 하지만 결국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승전국이 되어 한숨 돌리나 했는데, 몇 년 뒤에는 독소 불가침 조약의 부산물로 소련이 그 영토를 잠식해 들어왔다. 소련의 날강도짓에 분노한 루마니아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때 그 주요한 동맹국이 됐다. 루마니아군은 독일군과 함께 소련 깊숙이 침투한 군대였다.
전쟁에서 패한 뒤 루마니아는 소련에게 상당한 영토를 빼앗기고 공산화된다. 하지만 루마니아가 독일 나찌 앞에서 엉덩이춤을 추던 그 시절에 단호히 나찌에 반대하고 그로 인해 옥고를 치르면서도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젊은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니콜라이 차우셰스쿠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만난 루마니아 공산주의의 대부 게오르규 데지의 심복이 됐을 뿐 아니라, 반파쇼 투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싸웠던 루마니아의 혁명 영웅이었다.
그는 데지가 죽은 뒤 루마니아의 정권을 잡았다., 그게 1965년이었다. 정권을 장악하는 와중에서 있었던 정적 제거 과정은 굳이 들먹이지 않겠다. 그보다는 그 뒤 그의 일생이 더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일단 철의 장막이 드리워진 동유럽에서 그는 놀랄만큼의 ‘주체적’ 정책을 폈다. 이를테면 소련 지도 하의 집단 방위(?) 체제인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서 루마니아의 참여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고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군대 즉 소련군, 동독군, 불가리아군, 헝가리군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를 향해 탱크를 돌격시켰을 때 차우셰스쿠는 결연히 그에 반대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주창했던 두브체크를 지지한다고 밝혔고 소련의 패권주의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렇게 독특한 공산주의자가 서방의 찬사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영국 여왕으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를 수여받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그의 운명은 1971년을 기점으로 매우 불운한 쪽으로 기운다. 그 시점은 그와 비슷하게 ‘주체적’ 외교를 펴던 북한을 방문했던 즈음과 일치한다. 북한을 방문한 차우셰스쿠는 당시 북한이 지니고 있던 여러 장점들보다는 한 가지에 꽂혔던 것 같다., 바로 ‘수령관’이었다. 남로당과 연안파, 소련파, 그리고 갑산파까지 숙청한 뒤 ‘민족의 태양’으로 군림해 온 김일성의 모습은 차우셰스쿠에게 ‘보아도 보아도 그 흠모감이 끓어넘치는’ 모방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숭어가 뛰면 망둥이가 뛰고 원님보다는 아전이 더 요란하다고, 그는 북한보다 더한 유일 체제를 확립하려 든다. 스스로 콘두카토르 (지휘자)라고 일컬은 그는 전지전능한 지도자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고, 그 ‘전지전능’을 자의적으로 발휘했다.
그의 생일은 당연히 국경일이었으며 나중에는 부인 엘레나의 생일도 국경일로 정했다. TV프로그램은 일종의 ‘땡차뉴스’ (우리 5공화국 때의 땡전뉴스보다 더한) 에 불과했고, 그를 칭할 때마다 "정열적이고 총명하며 매력적인 인격의 영원한 우리의 지도자" 호칭이 덧붙여졌다. 이걸 청출어람이라고 불러야 할지, 유유상종이라고 불러야 할지.
그의 행적을 일일이 들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만 얘기해 보자면, 인구가 줄어드는 기미가 보이자 전 국민들에게 피임과 낙태, 이혼을 금하는 황당한 정책을 강요한 점을 들 수 있겠다. 콘돔을 쓰는 경우는 ‘국가반역자’로 몰려 잡혀갔다. 북한에서 인민문화궁전 (또는 주석궁?)을 보고 감명 받은 그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궁전같은 건축물을 세워 스스로의 ‘가오’를 잡기도 했고 인구 2천만이 좀 넘는 나라에 3백만 개가 넘는 도청기를 뿌려 국민 모두가 국민에게 감시역인 사회를 만들어 놓았다. 이때쯤, 아니 벌써부터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권력에 취한 드라큘라 백작일 뿐이었던 것이다.
1989년 마침내 타미소아라라는 도시에서 반 차우셰스쿠 봉기가 시작되고 이 시위가 번져나가면서 그는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보안대 (세큐리타트)가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했지만, 이는 더 큰 봉기를 불러왔다., 12월 21일 그는 생방송이 진행되는 가운데 운집한 루마니아 인민들 앞에서 자신에 대한 지지와 반란의 진압을 호소한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차우셰스쿠 물러가라는 구호였다. 이 순간 얼음처럼 굳어져버린 차우셰스쿠의 표정 역시 전 세계로 전파된다. 연설을 하다가 말문을 잃은 그의 표정은 길 잃은 어린아이와도 같았고 몇 마디 더 내뱉은 말은 연설이 아니라 웅얼거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2월 22일 시위대와 그에 합류한 정규군이 세큐리타트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대통령궁에서 헬리콥터가 뜬다. 차우셰스쿠, 자신이 루마니아라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고 우겼던 콘두카토르의 도주였다. 그로부터 3일 뒤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100발의 총알을 맞고 벌집이 된 채 세상을 뜬다.
그는 공산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의 이상을 앞장서서 무너뜨린 사람이었고, 반파쇼 투쟁의 영웅이었지만 파시즘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개인숭배의 바벨탑을 쌓아올렸으며, 자신이 숭배했던 나라의 지도자만큼이나 그 국민들을 괴롭혔다. 그처럼 TV에 생생하게 중계된 독재자의 몰락은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연설을 시작했다가 얼음이 되어버렸던 그의 표정, 그리고 인민봉기 와중에 떠오르던 헬기까지.
그가 희망한 목적지는 두 군데로 추정된다. 하나가 북한, 그리고 하나가 리비아, 막다른 골목에 몰린 그가 만나고 싶어하던 두 나라의 ‘지도자’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저승에 모여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사진은 차우셰스쿠의 우상화 그림이다. 그 화풍 솔직히 낯익다.
tag : 산하의오역
1989.12.22 “컨두카토르”가 무너지던 날
루마니아는 좀 독특한 나라다. 이름 자체가 로마인의 땅이라는 뜻으로서 슬라브족이 대세를 이루는 동유럽에서 일종의 섬이라고 불리울 만큼 독특한 정체성을 가져온 나라이며, 동유럽을 장악했건 오스만 투르크에 끈질기게 저항했던 드라큘라 백작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 역사를 더듬자면 얘기가 길어질 것 같고, 20세기 이 나라의 역사를 감히 정리한다면 매우 줄을 잘 못 섰거나, 잘 섰더라도 운이 없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우선 1차 대전 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반대하여 연합국에 가담한 것까진 좋았는데 지척에 있는 오스트리아와 그 큰형님 독일군에 의해 참패를 당하고 연합국 측에서는 유일하게 추축국에 항복한 나라가 됐다. 하지만 결국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승전국이 되어 한숨 돌리나 했는데, 몇 년 뒤에는 독소 불가침 조약의 부산물로 소련이 그 영토를 잠식해 들어왔다. 소련의 날강도짓에 분노한 루마니아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때 그 주요한 동맹국이 됐다. 루마니아군은 독일군과 함께 소련 깊숙이 침투한 군대였다.
전쟁에서 패한 뒤 루마니아는 소련에게 상당한 영토를 빼앗기고 공산화된다. 하지만 루마니아가 독일 나찌 앞에서 엉덩이춤을 추던 그 시절에 단호히 나찌에 반대하고 그로 인해 옥고를 치르면서도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젊은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니콜라이 차우셰스쿠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만난 루마니아 공산주의의 대부 게오르규 데지의 심복이 됐을 뿐 아니라, 반파쇼 투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싸웠던 루마니아의 혁명 영웅이었다.
그는 데지가 죽은 뒤 루마니아의 정권을 잡았다., 그게 1965년이었다. 정권을 장악하는 와중에서 있었던 정적 제거 과정은 굳이 들먹이지 않겠다. 그보다는 그 뒤 그의 일생이 더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일단 철의 장막이 드리워진 동유럽에서 그는 놀랄만큼의 ‘주체적’ 정책을 폈다. 이를테면 소련 지도 하의 집단 방위(?) 체제인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서 루마니아의 참여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고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군대 즉 소련군, 동독군, 불가리아군, 헝가리군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를 향해 탱크를 돌격시켰을 때 차우셰스쿠는 결연히 그에 반대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주창했던 두브체크를 지지한다고 밝혔고 소련의 패권주의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렇게 독특한 공산주의자가 서방의 찬사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영국 여왕으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를 수여받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그의 운명은 1971년을 기점으로 매우 불운한 쪽으로 기운다. 그 시점은 그와 비슷하게 ‘주체적’ 외교를 펴던 북한을 방문했던 즈음과 일치한다. 북한을 방문한 차우셰스쿠는 당시 북한이 지니고 있던 여러 장점들보다는 한 가지에 꽂혔던 것 같다., 바로 ‘수령관’이었다. 남로당과 연안파, 소련파, 그리고 갑산파까지 숙청한 뒤 ‘민족의 태양’으로 군림해 온 김일성의 모습은 차우셰스쿠에게 ‘보아도 보아도 그 흠모감이 끓어넘치는’ 모방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숭어가 뛰면 망둥이가 뛰고 원님보다는 아전이 더 요란하다고, 그는 북한보다 더한 유일 체제를 확립하려 든다. 스스로 콘두카토르 (지휘자)라고 일컬은 그는 전지전능한 지도자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고, 그 ‘전지전능’을 자의적으로 발휘했다.
그의 생일은 당연히 국경일이었으며 나중에는 부인 엘레나의 생일도 국경일로 정했다. TV프로그램은 일종의 ‘땡차뉴스’ (우리 5공화국 때의 땡전뉴스보다 더한) 에 불과했고, 그를 칭할 때마다 "정열적이고 총명하며 매력적인 인격의 영원한 우리의 지도자" 호칭이 덧붙여졌다. 이걸 청출어람이라고 불러야 할지, 유유상종이라고 불러야 할지.
그의 행적을 일일이 들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만 얘기해 보자면, 인구가 줄어드는 기미가 보이자 전 국민들에게 피임과 낙태, 이혼을 금하는 황당한 정책을 강요한 점을 들 수 있겠다. 콘돔을 쓰는 경우는 ‘국가반역자’로 몰려 잡혀갔다. 북한에서 인민문화궁전 (또는 주석궁?)을 보고 감명 받은 그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궁전같은 건축물을 세워 스스로의 ‘가오’를 잡기도 했고 인구 2천만이 좀 넘는 나라에 3백만 개가 넘는 도청기를 뿌려 국민 모두가 국민에게 감시역인 사회를 만들어 놓았다. 이때쯤, 아니 벌써부터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권력에 취한 드라큘라 백작일 뿐이었던 것이다.
1989년 마침내 타미소아라라는 도시에서 반 차우셰스쿠 봉기가 시작되고 이 시위가 번져나가면서 그는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보안대 (세큐리타트)가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했지만, 이는 더 큰 봉기를 불러왔다., 12월 21일 그는 생방송이 진행되는 가운데 운집한 루마니아 인민들 앞에서 자신에 대한 지지와 반란의 진압을 호소한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차우셰스쿠 물러가라는 구호였다. 이 순간 얼음처럼 굳어져버린 차우셰스쿠의 표정 역시 전 세계로 전파된다. 연설을 하다가 말문을 잃은 그의 표정은 길 잃은 어린아이와도 같았고 몇 마디 더 내뱉은 말은 연설이 아니라 웅얼거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2월 22일 시위대와 그에 합류한 정규군이 세큐리타트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대통령궁에서 헬리콥터가 뜬다. 차우셰스쿠, 자신이 루마니아라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고 우겼던 콘두카토르의 도주였다. 그로부터 3일 뒤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100발의 총알을 맞고 벌집이 된 채 세상을 뜬다.
그는 공산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의 이상을 앞장서서 무너뜨린 사람이었고, 반파쇼 투쟁의 영웅이었지만 파시즘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개인숭배의 바벨탑을 쌓아올렸으며, 자신이 숭배했던 나라의 지도자만큼이나 그 국민들을 괴롭혔다. 그처럼 TV에 생생하게 중계된 독재자의 몰락은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연설을 시작했다가 얼음이 되어버렸던 그의 표정, 그리고 인민봉기 와중에 떠오르던 헬기까지.
그가 희망한 목적지는 두 군데로 추정된다. 하나가 북한, 그리고 하나가 리비아, 막다른 골목에 몰린 그가 만나고 싶어하던 두 나라의 ‘지도자’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저승에 모여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사진은 차우셰스쿠의 우상화 그림이다. 그 화풍 솔직히 낯익다.
tag : 산하의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