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12월 21일 라듐과 퀴리 부인
어느 출판사에서 위인전을 내놓든 절대로 빠지지 않을 인물이 있다면 국내에선 세종대왕과 이순신일 것이고, 해외 인물로는 에디슨이나 퀴리 부인쯤 될 것이다. 퀴리 부인. 불굴의 의지로 연구를 거듭하여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여류 과학자. 나는 그녀의 본명을 과학 교과서가 아닌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다. 그녀의 딸은 어머니의 전기를 썼는데 필시 그를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 글이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점령 하의 폴란드, 폴란드 어를 몰래 공부하던 교실에 들이닥친 러시아 장학사, 러시아 어 테스트를 하려는 장학사에게 들이밀어지는 소녀.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 그녀는 멋지게 대답함으로써 깐깐한 러시아 장학사를 만족시키지만 장학사가 교실 밖으로 나간 뒤 설움에 겨워 울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지문은 끝났다.
그러나 그 똑똑한 소녀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는 그렇게 사랑하는 조국 폴란드에 머물지 못했다.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폴란드나 인근의 독일에는 여자가 대학에 가는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녀는 그래도 일부 여학생을 수용하고 있던 프랑스로 갔다. 거기에서 그녀는 입주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생계를 해결하며 의지를 불태운 끝에 소르본느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후 지난한 연구 과정에서 마리아는 든든한 동반자로서 후일 그녀가 틈만 나면 "그가 없었으면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부부 금실을 자랑했던 피에르 퀴리를 만나게 되고 ‘퀴리 부인’의 이름을 얻는다.
”우리 두 사람이 마음 속에 같은 꿈을 둘 수 있다면, 너무나 멋진 일이겠지요. 당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가 인류를 사랑하고 과학을 사랑하는 꿈 말입니다.” 마리아가 피에르에게 보낸 연서의 일부. 역시 이과는 이과다. 진솔하고 우직해 보이긴 하지만 이렇게 각지고 딱딱한 연애편지라니. 하나 더 얘기해 볼까. 어느 사진에서든 그녀는 검은 옷을 입고 있다. 그것은 실험 중 어차피 묻게 될 얼룩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에서 비롯된 패션이었다.
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연구벌레가 결혼한 해는 1895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해였다. 또 1년 뒤에는 베크렐이 우라늄이 포함된 광석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성질, 인광(燐光)의 방출을 발견했다 여기에 자극받은 퀴리 부부는 우라늄광(피치블렌드)에서 나오는 방사선이 우라늄에서만 방출된다고 보기엔 너무 강하다는 점에 착안했고, 그 속에 있는 방사능성 원소를 규명하려고 애썼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1898년 12월 21일. 이 연구 속에 사랑하고, 사랑으로 연구했던 과학자 커플은 1톤이 넘는 피치블랜드로부터 10만분의 1 그램에 불과한 새로운 원소를 분리하는데에 성공한다. 이것이 라듐이었다. 방사능이란 것이 발견된 것은 우라늄에서였지만, 라듐은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방사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퀴리 부인은 그 머리 아픈 연구 과정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자연의 비밀을 캐내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비밀을 안다고 해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만큼 인류는 충분히 성숙했는가.” (노벨상 수상 연설 중) 라듐을 주머니에 넣어 다닐 정도로 방사능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부족했고 결국 방사능이 원인이 된 빈혈로 세상을 떠나게 되지만, 그녀는 자신의 업적에서 풍기는 불길한 냄새를 맡고 있었다. “범죄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언급한 바 “명예 때문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던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 퀴리 부인은 라듐을 특허 내어 떼돈을 벌라는 권유에 이렇게 대답한다. “라듐의 소유자는 지구입니다. 누가 이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단 말인가요. 원소는 모든 사람의 것인데 어떻게 나 혼자 특허를 낼 수 있겠어요.”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누비면서 연구 자금을 긁어모으는 수고를 하면서도 그녀는 라듐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쓰지 않았다.
대개 현대 과학자들은 퀴리 부인이 강조한 인류의 ‘성숙’보다는 파스퇴르가 말한 바 “과학에는 국경이 없으나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쪽에 동조하여, 보다 더 위험한 물질을 ‘우리 편’의 무기로 만드는 데에 더 진력했다. 또한 자신의 업적을 자연과 인류 일반으로 돌리는 일은 점차 바보의 행동으로 전락했고, 과학의 성과는 어느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프로젝트’인가에 좌우되기에 이르기도 했다.
그래서 1898년 12월 21일 환기도 안되는 지하 연구실에서 방사선에 몸이 유린되어 가면서 세상에 라듐이라는 원소를 끄집어냈던 한 여류 과학자의 검은 옷은 기억해 둘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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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출판사에서 위인전을 내놓든 절대로 빠지지 않을 인물이 있다면 국내에선 세종대왕과 이순신일 것이고, 해외 인물로는 에디슨이나 퀴리 부인쯤 될 것이다. 퀴리 부인. 불굴의 의지로 연구를 거듭하여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여류 과학자. 나는 그녀의 본명을 과학 교과서가 아닌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다. 그녀의 딸은 어머니의 전기를 썼는데 필시 그를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 글이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점령 하의 폴란드, 폴란드 어를 몰래 공부하던 교실에 들이닥친 러시아 장학사, 러시아 어 테스트를 하려는 장학사에게 들이밀어지는 소녀.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 그녀는 멋지게 대답함으로써 깐깐한 러시아 장학사를 만족시키지만 장학사가 교실 밖으로 나간 뒤 설움에 겨워 울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지문은 끝났다.
그러나 그 똑똑한 소녀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는 그렇게 사랑하는 조국 폴란드에 머물지 못했다.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폴란드나 인근의 독일에는 여자가 대학에 가는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녀는 그래도 일부 여학생을 수용하고 있던 프랑스로 갔다. 거기에서 그녀는 입주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생계를 해결하며 의지를 불태운 끝에 소르본느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후 지난한 연구 과정에서 마리아는 든든한 동반자로서 후일 그녀가 틈만 나면 "그가 없었으면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부부 금실을 자랑했던 피에르 퀴리를 만나게 되고 ‘퀴리 부인’의 이름을 얻는다.
”우리 두 사람이 마음 속에 같은 꿈을 둘 수 있다면, 너무나 멋진 일이겠지요. 당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가 인류를 사랑하고 과학을 사랑하는 꿈 말입니다.” 마리아가 피에르에게 보낸 연서의 일부. 역시 이과는 이과다. 진솔하고 우직해 보이긴 하지만 이렇게 각지고 딱딱한 연애편지라니. 하나 더 얘기해 볼까. 어느 사진에서든 그녀는 검은 옷을 입고 있다. 그것은 실험 중 어차피 묻게 될 얼룩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에서 비롯된 패션이었다.
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연구벌레가 결혼한 해는 1895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해였다. 또 1년 뒤에는 베크렐이 우라늄이 포함된 광석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성질, 인광(燐光)의 방출을 발견했다 여기에 자극받은 퀴리 부부는 우라늄광(피치블렌드)에서 나오는 방사선이 우라늄에서만 방출된다고 보기엔 너무 강하다는 점에 착안했고, 그 속에 있는 방사능성 원소를 규명하려고 애썼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1898년 12월 21일. 이 연구 속에 사랑하고, 사랑으로 연구했던 과학자 커플은 1톤이 넘는 피치블랜드로부터 10만분의 1 그램에 불과한 새로운 원소를 분리하는데에 성공한다. 이것이 라듐이었다. 방사능이란 것이 발견된 것은 우라늄에서였지만, 라듐은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방사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퀴리 부인은 그 머리 아픈 연구 과정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자연의 비밀을 캐내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비밀을 안다고 해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만큼 인류는 충분히 성숙했는가.” (노벨상 수상 연설 중) 라듐을 주머니에 넣어 다닐 정도로 방사능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부족했고 결국 방사능이 원인이 된 빈혈로 세상을 떠나게 되지만, 그녀는 자신의 업적에서 풍기는 불길한 냄새를 맡고 있었다. “범죄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언급한 바 “명예 때문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던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 퀴리 부인은 라듐을 특허 내어 떼돈을 벌라는 권유에 이렇게 대답한다. “라듐의 소유자는 지구입니다. 누가 이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단 말인가요. 원소는 모든 사람의 것인데 어떻게 나 혼자 특허를 낼 수 있겠어요.”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누비면서 연구 자금을 긁어모으는 수고를 하면서도 그녀는 라듐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쓰지 않았다.
대개 현대 과학자들은 퀴리 부인이 강조한 인류의 ‘성숙’보다는 파스퇴르가 말한 바 “과학에는 국경이 없으나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쪽에 동조하여, 보다 더 위험한 물질을 ‘우리 편’의 무기로 만드는 데에 더 진력했다. 또한 자신의 업적을 자연과 인류 일반으로 돌리는 일은 점차 바보의 행동으로 전락했고, 과학의 성과는 어느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프로젝트’인가에 좌우되기에 이르기도 했다.
그래서 1898년 12월 21일 환기도 안되는 지하 연구실에서 방사선에 몸이 유린되어 가면서 세상에 라듐이라는 원소를 끄집어냈던 한 여류 과학자의 검은 옷은 기억해 둘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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