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2001년 3월 31일 영화 <친구> 그리고 실제 <친구>
우리 아들 얘기로 “아빠는 공부만 했던 범생이였을 것 같다.”고 하는데 범생이의 속뜻은 ‘공부만 했던 찌질이’일 것이다. 임마 내가 공부만 했으면 하버드를 갔지 얘기하면서 부인하고 싶지만 기실 나는 놀 줄 모르고 일탈하면 큰일나는 줄 알았던 범생이였다. 야간 자율학습 때 창문을 넘어 도망간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나가서 놀다가 들어온 적도 없었다. 그러니 이른바 논다는 아이들의 세계는 실로 별세계였다.
하물며 ‘물레’와 ‘사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던 학교 내의 양대 폭력 서클과는 인연이 있을 수가 없었다. 한 번 학교 뒷산에서 엄청난 규모의 무력 충돌이 있었다는 것도 그 일원이랍시고 깝치던 반 녀석 하나가 밀대걸레에 맞고 실신해 버린 사건으로만 기억하지 (녀석은 이른바 시다바리 정도였다) 언감생심 알고 싶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물레와 사탄의 존재가 고마운 것도 있었다. 사실인지 모르나 이들은 이미 부산 시내 조폭들로부터 ‘관리’를 받고 있었고 애들 코묻은 돈 삥뜯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무튼 우리 학교에 삥뜯기 소문은 없었다. 그들을 관리했다는 조직도 기억에 있다. ‘칠성파’와 ‘20세기파’ 그러니 2001년 3월 31일 개봉했던 영화 <친구>를 보면서 서울내기들과는 감회가 달랐을 것이다.
곽경택 감독은 개인적으로 영화 감독보다는 소품 감독을 하면 더 위대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 시대적 풍경을 재연하는 분야에는 거의 봉테일 감독 수준이지만 스토리텔링은 유감스럽게도 그에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다 (개인적 소회니 시비 금지) 어쨌든 그가 선보인 부산의 영상은 서울 와서 반세기를 살아도 골수 롯데팬인 부산 출신들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 또래보다는 살풋 윗세대의 이야기지만 그 풍경과 골목은 그대로 나의 부산 시절과 연결되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를 리뷰할 생각은 없고, 이 영화에 그려진 칠성파와 신 20세기파 얘기를 해 보자.
칠성파는 명실상부한 국내 굴지의(?) 폭력 조직이다. 서울을 석권하고 전국구의 위명을 획득한 호남 조폭들도 부산의 칠성파 두목 이강환에게는 범접을 삼갔다. 피난 시절 전국에서 뒤섞인 피난민들 사이의 건달들로 구성된 ‘세븐 스타’가 그 연원인데 원래 두목은 이강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강환은 그로부터 조직을 인계받는데 여기서 영화 <친구>에 등장하는 유오성의 은퇴한 조폭 아버지 주현의 캐릭터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후배 두목에게 아들을 두고 “저 셰끼는 인가이(인간이) 안될 셰끼다.”라고 일갈하던 그 주현.
동아일보 조성식 기자의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에 보면 이강환은 소아마비로 한쪽 팔이 불편한, 조폭으로서는 실격인 몸이었지만 “몸보다 몇 십배 더 큰 간”으로 험악한 항구의 밤거리를 장악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여기서 차두리 “간 때문이야~ 간 때문이야”) 영화를 기억하신다면 유오성을 차창 너머로 지그시 바라보던 배우 기주봉을 떠올리시면 되겠다. 옛 선배의 아들을 거둬(?) 주던 그 무표정한 캐릭터 말이다. 이 이강환의 절대권력에 저항하던 게 20세기파였다.
1985년 보스 김영춘이 은퇴하면서 그 부하들이 새로이 규합한 게 ‘신20세기파’인데 남포동 일대의 오락실 골목을 주무대로 칠성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물론 칠성파의 위력에는 많이 못미쳤지만. 이 둘의 관계를 쉽게 설명하자면 과거 대학가의 NL과 PD라고 보면 된다. 대세는 NL이었지만 아득바득 지지 않고 고개 쳐들던 PD의 관계를 설명하면 이해가 용이할 것이다.
영화 속 유오성이 칠성파의 행동대장이었고 장동건이 신20세기파의 행동대장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영화 속 사건은 실제로 부산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광동 한모 살해 사건’을 배경으로 했다. 한모는 신20세기파였고 그를 죽인 정모는 칠성파였는데 둘이 그렇게 죽고 못사는 절친은 아니었다고 한다. 중학교부터 달랐고 이른바 노는 아이들 가운데에서 친분을 쌓은 정도였다고 한다.
영화에서처럼 한모는 일찌감치 조폭 세계로 가서 똘마니부터 컸고 정모는 좀 늦게 뛰어들었지만 머리가 비상해 꽤 빨리 ‘컸다고’ 한다. 어쨌건 친구 사이였던 그들의 관계는 조직의 다툼 사이에서 금이 갔고 서로를 죽고 죽이게 된다. 영화에서처럼 수십 번을 찌른 건 아니었고 가스총으로 기절 시킨 후 네 번의 칼질로 한 친구는 죽었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정모가 직접 한 건 아니었다.
기이하게도 정모를 체포한 형사는 정모의 선배였다고 한다. 당연히 곽경택 감독의 선배이기도 했다. 그는 살인교사 혐의를 부인하는 정모에게 “친구를 직이도록 사주했다고 인정해라. 그래 자꾸 오리발 내미는 거는 진짜 깡패가 아이다!”라고 자존심(?)을 건드렸고 정모는 결국 그를 인정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처럼 쪽팔려서였는지 아니면 또 달리 보호해야 할 형님이 있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징역 10년형을 받고 복역했다고 한다. 친구 영화 개봉 때는 감옥에 있었지만 만기가 2005년쯤이었으니 벌써 사회에 나왔을 것이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사람만 알 것이고.
개인적으로 영화 <친구>에는 호감이 별로 없다. 네 친구의 우정을 백그라운드로 깔고 있어서 그런지 형사들이 걱정할 만큼 조직폭력배들이 너무 아름답게(?) 그려지기도 했거니와 영화 속 캐릭터도 조금은 판에 박힌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그 영화가 내게 던진 하이라이트는 추억이었다. 서울 배우들이 외국어처럼 배우기 어려웠다는 말투, 시커먼 교복과 모자, 그라나다 승용차, 범일동 철길 골목, 단체 영화 관람과 화장실에서의 싸움박질, “어디랑 어디가 붙었다!” 소리에 우우 달려나가던 청소년들의 뒷모습. 그 모두가 그랬다. 하지만 문득 드는 생각은 그 풍경은 추억이었지만 영화 속 사람들의 행동은 현실이라는 것. 비록 폭력배뿐 아니라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라면 친구의 배도 칼로 찌를 줄 알고, 뭣도 아닌 자신의 ‘조직’의 안위를 공공의 이익보다 더 중시하며,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단지 “쪽팔릴 뿐” 죄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우리 사회에도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