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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4.1 부라보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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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 1일 해태 부라보콘 탄생

 

전쟁이다 뭐다 해서 분위기 무거운데 가벼운 얘기 하나. 1970년 4월 1일 한국 아이스크림 업계에 독보적인 존재 하나가 태어났다. 바로 부라보콘이었다. ‘브라보’가 아니고 ‘부라보’였던 이유는 ‘크림’보다는 ‘구리무’가 익숙하던 시대와 연관이 있을 것이지만 일단 이 아이스크림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생김새에 있었다. 이른바 ‘하드’ 형태, 나무 막대기에 꽂은 얼음덩이를 먹던 시대에서 최초의 깔대기형 모양, 즉 ‘콘’ 형태의 아이스크림이었다.

 

중앙일보 최지영 기자에 따르면, 1968년 해태제과에 근무하던 진홍승 박사는 상부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는다. 막대기에 얼음덩이 꽂은 ‘아이스케키’가 아니라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보라는 것. 해외여행을 가면 가문의 영광이던 시절, 진박사는 유럽의 낙농 선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 아이스크림의 세계를 탐험한 뒤 덴마크의 호이어사로부터 설비를 도입한다. 비싼 돈 주고 기계 사고 기술 도입하여 아이스크림을 생산하려 했지만 재료도 문제였다. 우유에 탈지분유를 넣어야 했는데 대한민국 천지에 그런 것이 없었다. 이 시기에 선진문물의 창구라면? 당연히 주한미군. 주한미군에서 탈지분유를 얻어서는 협력사에 갖다 디민다. “꼭 이대로 만들어 주시오.”

 

원래 덴마크 사람들은 아이스크림 위에 요즘 우리처럼 탐스러운 초콜릿이나 아몬드를 박아 먹었다. 그런데 당시 초콜렛은 귀하디 귀한 물건이었고 아몬드는 한참 뒤 '롯데 아몬드 초코렛‘에서 한국인들은 그 정체를 파악했던 바, 부라보콘 따위에 뿌려댈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항상 대안은 있다. 심심풀이 오징어의 커플, 땅콩. 공급지는? 남대문 시장. 부라보콘 위에는 땅콩이 얹어졌다. 그런데 포장지도 문제였다. 아이스크림을 싸고 있는 포장지인데 물기를 어떻게 막나..... 이번엔 담배가 해결했다. 담배 포장지 회사와 머리를 맞댄 끝에 은박지 포장지를 개발한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감싼 과자, 즉 콘도 문제였다고 한다. 아이스크림의 습기로 금새 눅눅해지는 단점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고 아이스크림의 온도 맞추기도 난관이었다.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부라보콘이 1970년 4월 1일 세상에 나왔을 때 부라보콘은 그야말로 ‘아이스크림을 지배하는 자’가 된다. 도매상들이 회사로 몰려와 회사 정문을 봉쇄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은 일도 아니었다. 부모들은 아이스케키보다는 완연히 비쌌던 (50원이었다고 하는데 다른 기록도 있다) 부라보콘을 사 내라는 성화에 시달려야 했다. 돈 없는 아이들은 부라보콘 쥐고 천국에 간 표정 짓고 있는 친구들 앞에서 “한 입만? 응 한 입만?”을 애타게 호소해야 했다.

 

그렇게 팔린 부라보콘이 40년간 무려 40억개, 이를 늘어놓으면 총 68만㎞. 경부고속도로를 800여회 왕복하고 지구를 15바퀴 돌 수 있는 양이었다. 1972년 남북 정상회담 때 당시로서는 북한에 대해 내세울 게 적던 한국 정부 관계자가 대뜸 부라보콘을 들이밀었다. 아이스크림을 탐닉하던 북한 관계자의 날카로운(?) 반응은 “이거 미제 앙이오?”였다고 한다. 이때다 싶었던 남한 관계자 부라보콘의 포장지와 회사와 그 주소를 확인시키며 “이거 국산이오~!”를 부르짖었다고 한다.

 

불후의 cm송 “12시에 만나요, 브라보콘./ 둘이서 만납시다, 브라보콘./ 살짝쿵 데이트, 해태 브라보콘. 살짝쿵 데이트 해태 부라보콘 아이스크림은 해태 아이스크림은 해태” 는 가수 이장희씨와 콤비였고 기타세션맨으로 유명했던 강근식씨다. 그는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사람들이 브라보콘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시간이 오후 한 시라는 거에요. 그런데 한 시라고 하면 재미가 없고, 12시라는 것이 훨씬 재미있게 다가가는 것 같아서 12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CM송 요청을 받은 즉석에서 기타 하나를 뚱땅거리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얼마 전 정엽과 윤도현이 이 CM송 대결을 하는 걸 보고 한 후배가 “밤 열 두시인지 낮 열두 시인지 밤이라면 되게 개방적인 노래였다.”고 아는 체하는 걸 바로 밟아 줬다. “그때는 밤 열 두시면 통금이라 집 밖에도 못나가 임마.” 그렇다 낮 열 두시였다.

 

부라보콘은 나와 동갑이다. 그렇게 마흔 세 해를 꼬마들과, 연인들과 또 가끔 즐기는 어른들의 별미로 함께 해 왔다. 그 느낌을 전달하는 최고의 에피소드는 역시 1977년 성신여대 부속고교 (현 건대부고) 2학년 영(英)반의 이야기일 것이다. 어떤 내기에서 영반 학생들은 수학 담당 김학민 선생님을 이겼다. 당시 가격은 100원. 내기에서 진 김학민 선생님은 이렇게 적었다. “2000년 2월 22일 오후 2시 덕수궁 앞으로. 우에웨웨 야유가 있었겠지만 선생님은 나가 버리셨다. 그런데 이 약속을 그들은 기억했다.

 

2000년 무렵, 영반 학생 중의 하나였던 박충희씨는 조마조마했다. IMF의 파고가 높던 때였고 해태제과는 근근히 버티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부라보콘이 혹시나 생산이 중단되지 않을까, 그러면 약속도 깨지지 않을까 두려웠던 탓이다. 그는 그 마음을 담아 해태제과에 보냈고 해태제과는 그 편지에 와락 감동하고 만다. 20년 전 가격으로 100원에 부라보콘을 잔뜩 제공했고 백발의 선생님과 수십 명의 중년 아주머니들은 눈물을 글썽이는 추억의 만남을 갖게 된다.

 

부라보콘은 항상 절대강자는 아니었다. 1987년 출시된 월드콘이 그 빅사이즈로 소비자를 끌어들여 1992년 마침내 부라보콘을 쓰러뜨리고 1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IMF 때는 정말로 생산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부라보콘을 살린 것은 역시 그 부라보콘이었다. “그래도 부라보콘인데......” 부라보콘을 보고 자라고, 그걸 핥으면서 행복감에 젖었던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거지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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