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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3.30 고호가 빛을 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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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53년 3월 30일 고호가 빛을 본 날

 

1987년 3월 30일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에 한 부유한 여인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 한 점이 등장했다. 미술애호가들은 물론 미술에는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의 시선까지 집중됐다. 그것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의 주인공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였던 것이다. “쟈넹에게 작약 그림이 있고, 코스트에게 접시꽃 그림이 있다면, 나에겐 해바라기가 있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풍부한 변화상을 나타내는 태양에의, 또 생명에의 찬가를 부르고 있는듯하다.“고 열렬히 해바라기 찬가를 불렀던 고흐의 해바라기 가운데에서도 가장 탐스럽다고 할 열 네 송이의 해바라기가 다시 세상에 나와 자신의 값어치를 평가할 것을 요구했으니 관심이 쏠릴 밖에.

 

낙찰을 받은 이는 일본의 야스다 화재해상손해보험사였다. 낙찰가는 무려 3천9백만 달러. 아마 고흐가 보석에서 짜낸 물감으로 그렸어도 그 가격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후 고흐의 작품이 경매에 나오기만 하면 일본인들이 싹쓸이하게 되는데 (고흐 말년에 그린 <가셰 박사의 초상>은 더 천문학적인 가격에 팔렸다) 이를 일본인들의 짝사랑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고흐 역시 일본의 화풍을 열렬히 사랑했던 것이다. 그의 강렬한 색채는 일본 판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었고 그가 남긴 자화상 가운데 어떤 작품에는 그 배경에 삐죽이 솟아오른 후지산이 있기도 하다. 사후에는 수천만 달러에 팔릴 지언정 생전에는 수십 프랑도 제대로 벌지 못했던 가난한 화가 처지에 일본 판화는 수백점을 수집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건 야스다 보험사는 고흐에게 크나큰 생일 선물을 준 셈이다. 그 경매가 이뤄지던 날은 고흐의 생일이었고 그로부터 134년 전인 1853년 3월 30일 고흐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고흐가 첫 아이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고흐보다 먼저 가졌던 아이를 사산했고 고흐도 그렇게 온전하게 태어난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사춘기 때 그린 자화상을 보면 두상의 좌우대칭이 어긋나 있는데 이는 출산 당시에 모종의 충격을 받은 흔적이라고 한다. 그 뒤 고흐의 평생을 지배한 과도한 집착과 열정, 그리고 조울도 그렇게 생겨난 것일까.

 

그는 요즘 말로 하면 현실 부적응자였다. 그림 파는 가게 점원이 그림을 사러 온 손님의 예술관을 성토하고 자신의 구미에 맞는 그림을 사라고 강요한다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이고 설사 내가 그의 예술적 감각을 이해한다고 해도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악을 쓸 것이다. 본격적인 화가 (그의 대부분 작품은 최후 10년에 주로 걸쳐져 있다)에 나서기 전 그는 종교에 빠져 전도사 노릇도 한 적이 있었다. 노릇을 한 게 아니라 그것은 그의 필생의 꿈이었다.

 

벨기에의 어느 탄광촌에서 임시직 전도사가 된 그는 그야말로 어부와 세리와 창녀들의 빛이 된 예수처럼 일했다. 중노동에 시달리는 광부들은 일요일이 되면 쓰러져 잠들어 교회에 올 처지도 못됐다. 거기서 무슨 전도를 하고 설교를 하며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랴. 고흐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 “네 소유를 모두 남에게 나눠 주고” 탄광에 뛰어들어 그 안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설교하며 부대꼈다.

 

그런데 이런 전도사를 달갑잖아 하는 것은 그쪽 개독교나 이쪽 개독교나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임시직’ 전도사 딱지를 떼지 못하고 탈락한다. “설교도 못하고 전도사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광부들처럼 굴었다.”는 이유였다. 고흐는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을 경험한다. “전도사직을 잃었으니 이제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를 부르짖으며 그는 한탄한다. 바로 그 순간 하늘 위의 하느님은 가슴을 치면서 “내가 널 그거 하라고 보낸 게 아니란 말이다.” 라고 구름 위를 뛰고 계셨으리라.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비참함의 극단이 파놓았던 탄광 속, 그리고 광부들의 삶 속에서 체득한 경험과 기억은 이 천재 예술가의 혼에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겨두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 가운데 최고라고 치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두고 남긴 그의 코멘트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일용할 양식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사실주의 작가 발자크를 비롯해서 <올리버 트위스트>의 디킨스, <레미제라블>의 위고 등등의 책을 탐독했고 책들에서 묘사된 가난한 이들, 착취받는 이들에 대해 공감을 수시로 표시하고 있었다.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광부들이 하얀 눈을 배경으로 뚜렷이 드러나 보이지. 사람들이 지상으로 나올 때면 어찌나 새카만지 꼭 굴뚝 청소부처럼 보인단다. 그네들이 사는 집은 숲이나 언덕에 흩어져 있고 오두막이 대부분이야. 광부와 직조공들이 나는 불쌍해서 견딜 수 없어. 나중에 때가 되면 세상에 알려진 적이 한 번도 없는, 아니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런 사람들을 그림으로 보여줄 작정이야.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참 행복할 거야.”

 

빈센트 반 고흐가 그렇게 외로왔던 것도 ‘예쁘게 더 예쁘게’ 일변도이던 당시의 화풍과 동떨어졌던 이유도 있다고 한다. (이건 미술사 시간에 주워들은 얘기)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 중의 하나는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성당보다는 사람의 눈을 그리는 게 더 좋다. 사람의 눈은, 그 아무리 장엄하고 인상적인 성당도 가질 수 없는 매력을 담고 있다. 거지든 매춘부든 사람의 영혼이 더 흥미롭다.”고 한 것이나 “서로 보완해 주는 두 가지 색을 결합하여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 그 색을 혼합하거나 대조를 이루어서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표현하는 일, 얼굴을 어두운 배경에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일,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 석양을 통해 어떤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 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라는 편지에서 나는 고흐가 왜 위대한 화가인지를 알게 된다.

 

“친구가 되는 것, 형제가 되는 것, 그래, 사랑이야말로 감옥을 여는 열쇠이다.”라고 갈파했던 이 불운한 열정의 화가,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라고 동생에게 허풍스런(?) 결연함을 보였던 가난한 화가, “나 때문에 네가 가난해졌겠다. 네 돈은 꼭 갚으마. 안되면 영혼이라도 주마.”라고 토로하던 가련한 형이 1853년 3월 30일 세상에 왔고, 그로부터 134년 뒤 또 한 번 찬연하게 빛을 발했다. 그 달러의 빛을 고흐 자신은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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