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27년 3월 29일 월남 이상재
한국 위인전을 들여다보면 거개가 엄숙하고 근엄하고 비장하고 열렬하며 진지하고 결의에 찬 사람 투성이다. 위인전 속의 위인들이 실실거리고 농담하고 객쩍은 소리로 사람들 웃기는 풍경은 거의 읽은 적이 없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유머 감각이 떨어지는 탓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왜 그럴까. 그건 어느 정도 지위에 올라선 이가 그렇게 실없는 소리 하고 놀라치면 대번에 ‘체통 생각하세요.’가 날아오고 ‘아랫 사람’이 아니라 ‘윗분’이 넥타이 풀어 머리띠 매고 노래방에서 사람들 웃기면 점잖지 못하다는 평을 듣는 기이한 문화 탓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하도 나이 답지 않게 젊은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다 보니 주위에서 “체통 지키시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니 그럼 내가 청년이 돼야지 애들더러 노인 되라고 하랴?” 라고 시원스레 눙친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가 바로 월남 이상재다.
이상재는 1850년 생이다. 그러니까 병자수호조약으로 나라의 문이 열릴 때 이미 스물 일곱의 장년(당시 기준으로는)이었고 그 후 격동의 구한말의 풍상을 온몸으로 받아낸 사람이었다. 우선 ‘보빙사’로서 미국을 최초로 방문하여 미국 대통령 아더 체스터에게 날아갈 듯한 큰절을 올렸던 조선인 중의 하나가 그였다. 그의 공식 복장은 여전히 사모관대 차림이었다. 이 희한한 외양의 동양인을 신기해 한 미국 악동들이 짖궂게 굴다가 돌을 던지는 등 심하게 장난을 쳤다. 이에 호위 경찰관이 한 명의 덜미를 잡아 유치장에 처넣었는데 다음날 뜻밖에도 사모관대 차림의 이상재가 나타나 말한다. “애들이 장난 친 거 가지고 이러는 거 조선 공사관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마냥 호인도 아니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과하다 싶을 정도의 호감을 지니고 있던 고종이 미국이 우리나라에 대해 어찌 생각하더냐를 물었을 때 월남은 이렇게 대답하여 고종의 심기를 뒤틀어놓는다. “전하께서 선정을 베푸시면 호의를 가질 것 같사온데 그렇지 않으시면 있는 호의도 거둘 거 같더이다.” 아마도 고종은 평생 이런 식의 “너 하기 나름이야”는 처음 들어 봤을 것이다. 또 고종의 면전에서 고종에게 올라온 온갖 청탁 서류 등을 “상감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우냐!” 일갈하며 몽땅 화롯불에 던져 넣었다는데 고종이 충신이라며 좋아했다는 얘기가 정설이지만 실제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그 뒤 이상재가 독립협회에 가담하고 헌의 6조를 앞장서 제출하는 등 비위에 거스르자 감옥에 가둬 버리는 것이다. 곤장 40대는 덤이었다. 그런데 이 감옥살이 중에 이상재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의 감방 동기가 이승만이었다)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들어서고 을사늑약으로 민영환이 자결하고 자신의 선배였던 박정양도 분을 못이겨 세상을 떠나자 이상재도 자결로 생을 마감할 생각을 한다. 그때 그를 뜯어말린 것이 YMCA 총무 질레트 (한국에 야구와 농구를 들여온 선교사)였다. 이후 그는 색다른 방식의 민족운동에 나선다. “구국 운동의 주체로 청년 학생을, 방법으로는 국제적 종교 사회운동을, 사상적으로는 기독교적 보편주의와 평화주의를 선택했다.” (전택부, ‘월남 이상재의 생애와 사상’
어딜 가나 그는 허물없는 농담과 거침없는 유머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일본군 사령관이 감기로 고생한다고 하자 “그놈의 감기는 대포로 쏘아잡지 못하나?” 라고 쏘아부쳐 머쓱하게 만든 것은 그의 일화 축에 들지도 못한다. 강연장에 순사가 그득 들어와 있는 걸 보고는 “때 아닌 개나리 (개 + (순경) 나리)꽃이 활짝 피었군.”이라며 눙쳐서 좌중을 발딱 뒤집기도 했고, 이완용 송병준 등을 만나서는 “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데 선수들이니 일본으로 이사를 가시오.”해서 얼굴을 흙빛으로 만든 적도 있었다. 수주 변영로도 어릴 적 이상재에게 봉변(?)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 영민한 소년에게 이상재는 그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놀렸다. “변정상씨 변정상씨!” 단단히 화가 난 변영로 “노망이라도 나셨습니까?” 대드니 “그럼 니가 변정상의 씨지 다른 놈의 씨냐?” 하며 껄껄 웃어 변영로의 입을 막았던 것이다.
이상재는 3.1운동의 민족 대표로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폭동이 날 수도 있다.”면서 서명을 사양하는 이상재에게 한용운은 평생 절교를 선언했거니와 이상재가 죽었을 때 한용운은 그 장례위원이 되는 것조차 사절했다. 이런 예로 그의 인생은 “평생 소나기를 피하며 살아온 인생”이라는 평이 있기도 했다. 즉 비타협적인 무력 투쟁보다는 체제 안에서 청년들의 기개를 살리고 그 교육에 힘쓰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이광수가 민족개조론 같은 소리를 늘어놓으며 자치론같은 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향할 때에도 이상재는 그의 영역 안에서 일제에 눈을 내리깐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에서 신채호같은 비타협적 무장 투쟁론자까지 함께 하는 조직 신간회가 이미 병석에 누워 있던 그를 대표로 뽑을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3.1운동에 민족 대표로서 참여를 거절했으나 그는 배후 조종 혐의로 투옥된다. 거기서 그는 서슬 푸른 일본 검사 앞에 손바닥을 내민다. “한 번 손바닥 한 번 붙여 보우” 검사가 긴가민가 하며 손바닥을 대자 이상재는 냉큼 손을 거두면서 일갈한다. “봐요 억지로 붙인 건 떨어지게 마련이라니까. 한국 일본도 그래.” 조선일보사 사장을 오래 역임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빚밖에 없었다. 누군가 땔감이나 하라고 두둑히 내민 봉투를, 바로 다음에 온 고학생이 빈곤을 호소하자 냉큼 봉투째 들려 보내고는 “그러시면 어떡합니까?”라고 힐난하는 사람에게 “형편이 아는 놈이 또 갖다 주겠지?” 하며 송아지 눈을 떠서 끝내 주머니를 털게 만들었던 인정많고 능청스럽고 인간미 넘치는 노인의 전 재산은 쌀 27가마 분의 빚이었다.
1927년 3월 29일 “일제 시대 최대의 사회 단체, 좌우합작단체 신간회” 회장 이상재가 일흔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