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24년 3월 27일 사람다운 사람은 암태에 산다.
요즘 노래에 자주 나오는 여수 앞바다도 그렇지만 목포 앞바다도 다도해다. 하늘에서 한반도를 그리고 붓을 휘두를 때 떨어진 먹방울같은 섬들이 바다에 가득이다. 그 가운데 암태도라는 섬이 있다. 목포에서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섬인데 토지가 비옥하여 인구가 한때 1만을 넘었다는 섬이며, 한때 “사람다운 사람은 다 암태에 산다.”는 말이 돌만큼 섬 사람들의 ‘사람됨’을 인정받았던 특이한 이력의 섬이기도 하다. 그럼 사람다운 사람은 암태에 산다는 말은 왜 나왔을까.
그것은 1923년부터 1924년 어간,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암태도 소작 쟁의에서 유래한다.
그즈음 이 섬의 지주들 가운데 실력자는 문재철이라는 이였다. 그는 약 140 정보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로서 많은 농민들이 그 소작을 부치며 살아가고 있었다. 전라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저 멀리 강원도 철원과 충청도 당진에도 토지를 보유하고 있던 글자 그대로의 대지주였던 그는 무려 7-8할의 소작료를 징수했고 이 터무니가 없는 착취에 진저리가 난 농민들은 점차 고개를 들고 주먹을 쥐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중심에 선 사람이 서태석이라는 이였다. 그는 20대의 이른 나이에 8년 동안이나 암태면장을 했던 사람이었지만 일제에 고분고분한 ‘면서기’가 아니었다. 1920년 3.1운동 1주년 행사를 준비하다가 감옥에 간 것이다.
1년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그의 머리는 더욱 불온(?)해졌다. 민족 의식에다가 사회주의 사상의 세례까지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고향 암태는 지주와 마름의 횡포 하에 온 섬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자작농 집안이었지만 기꺼이 소작농들의 지도자가 된다. 키가 크고 얼굴이 길쭉하여 외모부터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섬이나 지리산 피아골 같은 데는 더러 엉뚱하게 기골이 장대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장골들의 후예(민중봉기의 주모자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암태도 소작쟁의 주모자 서태석도 그런 사람의 후손이다." (송기숙,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 중)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4할로 내릴 것과 1리 이상의 소작료 운반 비용은 지주가 부담할 것 등을 요구했다. ‘아랫것들’의 요구가 순순히 받아들여진 적은 인류 역사에 없다. 소작료 반을 잘라먹겠다니 세상에 이런 불상놈들이 있는가 지주들은 눈을 부릅떴고 소작회원들은 추수를 거부한다. 이때 문재철을 비롯한 지주들이 한 행동은 요즘에도 흔히 보는 것들이다. 밤중에 찾아가 소작농들을 협박한다든가 “다 지주으른 말 듣는다고 했는디 자네만 왜 그렁가?” 식으로 얼르면서 배 치고 등 쓰다듬는 식. 또 역시 항상 그렇지만 관헌들도 있는 사람 편이었다. 목포 경찰서는 경찰들을 대거 암태도에 상륙시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던 중 1924년 3월 27일 암태면 동와촌리에서 지주 규탄 면민대회가 열린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소작인들은 뭉쳐 일어섰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서태석이었다. 동학군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선대의 한을 품고 암태로 들어왔고 형제들이 한 섬에 모여 살지도 못하고 각각 다른 섬에 거주했던 남모를 사연을 지닌 서태석은 소작인의 단결을 목청껏 외치며 지주들의 횡포와 수탈을 고발했다. 면민들은 ‘아싸리하게’ 뜻을 모았고 암태도는 지주와 소작의 정면 충돌로 불을 뿜게 된다. “분쟁이 생기면 소작료를 내지 않고 파작해 버립시다! 결의를 어기는 사람하고는 모든 것을 끊어 버리자구요! 그 와중에 지주 문재철의 부친의 덕을 기린다는 송덕비를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소작민들과 문씨측 청년들이 충돌, 일제 관헌이 개입한다. 소작인 50여명이 체포됐고 그 가운데 13명이 목포로 끌려가 투옥된 것이다.
이에 전 섬이 들고 일어났다. 청년회고 부인회고 할 것 없이 천 명이 넘는 섬 사람들이 섬을 떠나 뭍으로 나와 ‘아사동맹’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때 불렀다는 소작인의 노래.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우리의 부르짖음 하늘이 안다...... 뼈빠지게 일하여도 살수가 없거든 놀고먹는 지주들은 누구의 덕인가.” 도민들은 간부를 석방하지 않으면 그대로 법정 안에서 또는 법원 앞마당에서 굶어죽자는 결의였다. 남녀노소가 정말로 밥 한 술 넘기지 않고 “대지를 요로 삼고 창공을 이불 삼아” 버텼다.
일제 경찰도 혼비백산했고 암태도민들의 의로운 투쟁에 전국이 들썩였다. 김병로를 위시한 시국 사건 전문 변호사들이 다투어 변호를 자청했고 경남 고성부터 해외에 이르기까지 성금이 답지했다. 급기야 일본 경찰이 부랴부랴 중재에 나서 문재철과 소작회는 다음과 같은 합의에 서명하게 된다, “소작료는 4할로 인하하고, 구속자는 쌍방이 고소를 취하하며, 비석은 소작회 부담으로 복구한다.” 소작인들의 승리였다.
서태석은 이후 조선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또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되며 1930년대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증 등에 시달렸다. 심신 모두가 피폐해 버린 그는 암태도의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기 싫다며 누이가 살던 다른 섬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소변도 요강으로 받아 동네 꼬마에게 내가게 하는 지경이었다니 그 참담함이야 오죽했을까. 그가 1928년 경 지었던 시처럼 “울어볼까 웃어 볼까. 산을 넘고 또 넘어도 앞에는 더 큰 산이요 물을 건너도 또 건너도 앞에는 더 큰 물이다. 이 산 이 물 또 산 또 물이 있으리니 갈까보나 말까보다 험한 산 물길을. 진리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응당 있는 줄 알지마는 피곤한 팔다리 더 가 줄 바이 없다.” 같은 심경이었겠지. 그러나 그는 또 이렇게 이어 부르며 그의 파란 많은 인생을 돌아봤으리라. “오냐 동무야 가자 가자 또 가 보자. 무쇠팔뚝 돌 팔뚝에 풀린 힘을 다시 넣어 칼산 넘고 칼물 건너 쉬지 말고 또 가보자. 이 팔과 다리 부서져 일점육일지골 다 없어질 때까지. ” (장안대학교 박천우 교수의 ‘100년 편지’ 중 )
1943년 광복을 두 해 앞둔 어느 날, 그는 논두렁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환갑을 한 해 앞둔 쉰 아홉. 소작료 인하를 부르짖으며 소작농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그날의 감격을 잊지 못해서일까. 벼 포기를 굳게 움켜쥔 채였다. 그의 조선공산당 행적 때문에 일제 때는 물론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그는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그가 그의 독립운동 행적을 인정받고 현충원에 몸을 누이게 된 것은 그가 사망한 지 꼭 60년 되던 해, 2003년이었다. 이제야 그는 움켜 쥔 벼 포기를 놓고 편히 쉴 수 있게 되었을까. 1924년 3월 27일 그의 ‘무쇠 팔뚝 돌팔뚝’이 암태도민들을 떨쳐 일어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