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3년 3월 26일 짱구 챔피언 되다
왕년에 복싱 좀 본 분만 보시오... 아니면 재미없음
한국 프로복싱에서 마의 숫자가 두 개가 있었다. 하나가 3이고 하나가 6이었다. 초대 세계 챔피언 김기수가 3차방어전에서 무너진 이후 홍수환이며 유제두며 염동균이며 챔피언에 오른 이들은 줄을 이었지만 아무도 3차 방어전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홍수환이야 한국 프로복싱사에서 길이 남을 테크니션이고 유제두는 동양 타이틀을 20차를 넘게 방어한 불세출의 철권이었지만 세계 타이틀은 거머쥐기가 무섭게들 풀어야 했다. 그 벽을 깬 것은 재주라고는 맞는 재주 밖에 없다는 혹평을 들었던 소매치기 출신의 복서 김성준이었다. 그는 졸전 끝에 2차 방어를 마치고 3차 방어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한 열전으로 3차 방어를 해 냈다. 하지만 4차에서 그의 타이틀은 끝났다.
그 뒤 박찬희와 김철호 등의 복서가 4차방어를 넘어섰지만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6차 방어전에서 무너졌다. 그것이 한국 복서의 한계다 싶었다. 일본의 구시켄 요코가 13차 방어를 성공하는 모습을 부러워할 뿐이었고 10차 방어전이다 15차 방어전이다 하는 것은 허영만의 만화 무당거미에서 가능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롱런을 이룩한 첫 챔피언이 1983년 3월 26일 챔피언 자리에 오른다. 그의 이름은 장정구였다.
장정구는 그 전 해 메뚜기같이 툭툭 튀어나니던 키 큰 왼손잡이 파나마의 사파타에게 도전했다가 근소하게 졌다. 그만하면 선전이었다. 아마튜어 시절 일본의 전설이라는 구시켄 요코를 아작냈던 실력파 복서 김치복이 사파타에게 도전했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승리를 헌납했던 것에 비추어도 그랬다. 하지만 이 패배는 장정구에게 명약이 된다. 장정구는 오기의 사나이였다. 그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 패배를 복기했고 왜 졌는지를 철저하게 곱씹었다.
“사파타전의 패배 덕에 상대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15차 방어를 이루어내는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가 됐다.” 사람들은 흔히 패배를 자신의 책임보다는 상대의 강함이나 악함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패배를 아파하되 잊어버리려 애쓴다. 하지만 장정구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 패배만한 명약은 없다. 장정구는 사파타와 재대결을 가졌고 일방적으로 몰아부친 끝에 1983년 3월 26일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이 된다.
이후 그는 15차 방어전이라는, 그때까지의 한국 복서로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특히 그의 주먹이 불을 뿜었던 것은 일본 복서들에게였다. 한국의 세계 챔피언 김환진을 무너뜨린 도까시키 가쓰오를 곤죽으로 만든 것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일본 도전자 가운데 경기 종료 공 소리를 들은 것은 단 한 명이었다. 장정구 자신 일본 선수를 만나면 전의가 솟았다고 하거니와 장정구의 전성기 시절은 일본의 교과서 왜곡 사태 이후 독립기념관 건립까지 이어지던 시절과 묘하게 일치한다.
장정구의 전적은 화려하다. KO승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가 치른 마흔 두 번의 경기 중 세계 챔피언 출신의 선수들과 치른 경기만 열 일곱 번이었다. “김치 먹는 족속이 고기 먹는 족속 이기냐?”는 열등감이 일상이던 시절, 상대의 이름값 앞에서 지레 주눅들던 때 장정구는 누구를 만나도 거침이 없었다.
뭐니뭐니해도 장정구의 가장 큰 장점은 그의 변화무쌍이었다. 뭔가 통하지 않으면 즉각 다른 패턴으로 돌았고 또 한 번 잘 통했다고 그 공격을 되풀이하지도 않았다. 장정구의 스타일은 있었지만 그 스타일은 매 경기마다 다르게 발현됐다. 그래서 그의 경기는 재미있었다. 스트레이트 하나는 국보급이었지만 그 국보밖에 칠 줄 몰랐던 최충일과 달랐고, 아론 프라이어 (주니어 웰터급의 역대 최강자로서 장정구와 비슷한 스타일을 선보였던) 앞에서 눈도 못 맞췄던 김상현과 달랐으며 만용을 부리며 다가서다가 페더급의 강자였던 페드로사에게 아작났던 김사왕과도 달랐고 화려한 테크니션이었지만 정직하기 이를데없던 박찬희와도 달랐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어떤 변칙도 기본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장정구는 한국 복서 가운데 가장 어퍼컷을 잘 치던 선수였다.
그의 최후는 드라마틱했다. 15차 방어를 마친 후 은퇴와 컴백을 번복하면서 그는 또 한 번 챔프에 도전한다. 1991년, 그가 최초로 챔프가 된 뒤 8년만의 일이었다. 나는 이 경기를 선연히 기억한다. 장정구는 강타자였던 태국 선수를 착실히 공격했고 세 번이나 다운을 빼앗는 등 챔피언을 목전에 둔다.
그런데 마지막 12회. 그는 그 유리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다가 그만 카운터를 얻어맞고 거짓말같이 패배하고 만다. 그건 잘못된 정보 탓이었다고 전한다. 그렇게 다운을 빼앗았는데 채점 결과가 동점이라는 정보가 전해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장정구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나섰다가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일설에 따르면 그 정보는 잘못된 것이었다고 한다. 캔버스에 나뒹구는 장정구를 보며 얼마나 황망했던지.
가끔 그의 복싱을 추억한다. 도까시키 가쓰오를 때리다가 때리다가 지쳐가던 중 레프리가 무방비로 두들겨 맞는 도까시키에게 KO패를 선언했을 때 캔버스에 엎드려 버린 것은 장정구였다. 그는 패자보다 탈진할만큼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승자였다. 그리고 승리를 위해 자신을 변화시킬 줄 알던 복서였다. 1983년 3월 26일 장정구가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1983년 3월 26일 짱구 챔피언 되다
왕년에 복싱 좀 본 분만 보시오... 아니면 재미없음
한국 프로복싱에서 마의 숫자가 두 개가 있었다. 하나가 3이고 하나가 6이었다. 초대 세계 챔피언 김기수가 3차방어전에서 무너진 이후 홍수환이며 유제두며 염동균이며 챔피언에 오른 이들은 줄을 이었지만 아무도 3차 방어전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홍수환이야 한국 프로복싱사에서 길이 남을 테크니션이고 유제두는 동양 타이틀을 20차를 넘게 방어한 불세출의 철권이었지만 세계 타이틀은 거머쥐기가 무섭게들 풀어야 했다. 그 벽을 깬 것은 재주라고는 맞는 재주 밖에 없다는 혹평을 들었던 소매치기 출신의 복서 김성준이었다. 그는 졸전 끝에 2차 방어를 마치고 3차 방어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한 열전으로 3차 방어를 해 냈다. 하지만 4차에서 그의 타이틀은 끝났다.
그 뒤 박찬희와 김철호 등의 복서가 4차방어를 넘어섰지만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6차 방어전에서 무너졌다. 그것이 한국 복서의 한계다 싶었다. 일본의 구시켄 요코가 13차 방어를 성공하는 모습을 부러워할 뿐이었고 10차 방어전이다 15차 방어전이다 하는 것은 허영만의 만화 무당거미에서 가능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롱런을 이룩한 첫 챔피언이 1983년 3월 26일 챔피언 자리에 오른다. 그의 이름은 장정구였다.
장정구는 그 전 해 메뚜기같이 툭툭 튀어나니던 키 큰 왼손잡이 파나마의 사파타에게 도전했다가 근소하게 졌다. 그만하면 선전이었다. 아마튜어 시절 일본의 전설이라는 구시켄 요코를 아작냈던 실력파 복서 김치복이 사파타에게 도전했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승리를 헌납했던 것에 비추어도 그랬다. 하지만 이 패배는 장정구에게 명약이 된다. 장정구는 오기의 사나이였다. 그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 패배를 복기했고 왜 졌는지를 철저하게 곱씹었다.
“사파타전의 패배 덕에 상대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15차 방어를 이루어내는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가 됐다.” 사람들은 흔히 패배를 자신의 책임보다는 상대의 강함이나 악함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패배를 아파하되 잊어버리려 애쓴다. 하지만 장정구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 패배만한 명약은 없다. 장정구는 사파타와 재대결을 가졌고 일방적으로 몰아부친 끝에 1983년 3월 26일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이 된다.
이후 그는 15차 방어전이라는, 그때까지의 한국 복서로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특히 그의 주먹이 불을 뿜었던 것은 일본 복서들에게였다. 한국의 세계 챔피언 김환진을 무너뜨린 도까시키 가쓰오를 곤죽으로 만든 것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일본 도전자 가운데 경기 종료 공 소리를 들은 것은 단 한 명이었다. 장정구 자신 일본 선수를 만나면 전의가 솟았다고 하거니와 장정구의 전성기 시절은 일본의 교과서 왜곡 사태 이후 독립기념관 건립까지 이어지던 시절과 묘하게 일치한다.
장정구의 전적은 화려하다. KO승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가 치른 마흔 두 번의 경기 중 세계 챔피언 출신의 선수들과 치른 경기만 열 일곱 번이었다. “김치 먹는 족속이 고기 먹는 족속 이기냐?”는 열등감이 일상이던 시절, 상대의 이름값 앞에서 지레 주눅들던 때 장정구는 누구를 만나도 거침이 없었다.
뭐니뭐니해도 장정구의 가장 큰 장점은 그의 변화무쌍이었다. 뭔가 통하지 않으면 즉각 다른 패턴으로 돌았고 또 한 번 잘 통했다고 그 공격을 되풀이하지도 않았다. 장정구의 스타일은 있었지만 그 스타일은 매 경기마다 다르게 발현됐다. 그래서 그의 경기는 재미있었다. 스트레이트 하나는 국보급이었지만 그 국보밖에 칠 줄 몰랐던 최충일과 달랐고, 아론 프라이어 (주니어 웰터급의 역대 최강자로서 장정구와 비슷한 스타일을 선보였던) 앞에서 눈도 못 맞췄던 김상현과 달랐으며 만용을 부리며 다가서다가 페더급의 강자였던 페드로사에게 아작났던 김사왕과도 달랐고 화려한 테크니션이었지만 정직하기 이를데없던 박찬희와도 달랐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어떤 변칙도 기본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장정구는 한국 복서 가운데 가장 어퍼컷을 잘 치던 선수였다.
그의 최후는 드라마틱했다. 15차 방어를 마친 후 은퇴와 컴백을 번복하면서 그는 또 한 번 챔프에 도전한다. 1991년, 그가 최초로 챔프가 된 뒤 8년만의 일이었다. 나는 이 경기를 선연히 기억한다. 장정구는 강타자였던 태국 선수를 착실히 공격했고 세 번이나 다운을 빼앗는 등 챔피언을 목전에 둔다.
그런데 마지막 12회. 그는 그 유리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다가 그만 카운터를 얻어맞고 거짓말같이 패배하고 만다. 그건 잘못된 정보 탓이었다고 전한다. 그렇게 다운을 빼앗았는데 채점 결과가 동점이라는 정보가 전해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장정구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나섰다가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일설에 따르면 그 정보는 잘못된 것이었다고 한다. 캔버스에 나뒹구는 장정구를 보며 얼마나 황망했던지.
가끔 그의 복싱을 추억한다. 도까시키 가쓰오를 때리다가 때리다가 지쳐가던 중 레프리가 무방비로 두들겨 맞는 도까시키에게 KO패를 선언했을 때 캔버스에 엎드려 버린 것은 장정구였다. 그는 패자보다 탈진할만큼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승자였다. 그리고 승리를 위해 자신을 변화시킬 줄 알던 복서였다. 1983년 3월 26일 장정구가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