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총선을 이틀 앞둔 1992년 3월 22일 밤이었다. 준수하게 생긴 육군 중위 한 명의 입에서 놀라운 사실이 흘러나왔다. 그는 백마부대 즉 9사단 28연대 2대대 6중대 소속 소대장 이지문 중위였다. 9사단은 12년 전 사단장 노태우 소장의 명령으로 전방에서 탱크를 빼돌려 서울로 진입했던 바로 그 부대다. 하지만 이지문 중위가 임지를 떠나 서울로 온 이유는 12년 전과 정반대였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군부재자 공개 기표, 중간검표 등 군대 내에서 자행된 민주주의의 압살을 고발했다. “여당 후보를 지지할 것과 공개 투표를 강요했습니다.....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 적잖은 갈등을 느끼고 있고 무엇보다 동료, 선배 장교들에게 돌아갈 불이익 때문에 가슴이 아픕니다.”
국방부는 경악했다. 아니 운동권 출신의 작대기 두 세 개짜리가 튀어나가서 떠들어댄 것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두 개를 단 육군 중위이자 소대장이 지금 대체 뭐라고 하는 거냐? 뭐 저런 놈이 장교가 됐지? 저런 운동권이 어떻게 ROTC가 됐어? 그러나 이지문 중위는 운동권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과 동기였던 동아리 선배에 따르면 이지문 중위는 “87년 6월 정도에나 데모를 따라나가 봤을까 그 뒤에는 전혀 운동권이 아니었고 그냥 수업 잘 들어가던 범생이”였다.
튀지도 않고 나대는 성격도 아니었던, 오히려 내성적이었다는 육군 장교가 어떻게 군대 안의 선거 부정이라는, 당시만 해도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동시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되던 치부를 폭로하게 됐을까. 사회평론 길지 (아 이 추억의 이름) 3월호에서 이지문은 이렇게 얘기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에 들어간 사람도 많았는데 어떻게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저도 설명이 잘 안됐어요. 그런데 작년에 대전에서 밤차를 타고 올라오다가 '아마 내가 처한 상황이 이런 경우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했어요. 바로 앞자리에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술취한 남자 두 사람이 타서 그 여자 옆자리에 앉아 자꾸 치근덕대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자리를 바꿔주었지요. 그리고 나니 이 술취한 사람들이 행패를 부릴까봐 은근히 겁이 나대요. 내가 싸움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다른 자리에만 있었으면 아마 가만히 있었어도 됐을 겁니다. 부정선거 고발도 바로 그런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병이라면 부대 밖으로 나가면 바로 탈영이라 나갈 수 없었을 테고, 또 우리 부대가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었으면 못했을 텐데 부대 밖으로 나가면 바로 1시간 안에 광화문까지 도달하는 버스가 있었으니까요."
다른 자리에만 있었어도 가만히 있었으면 될 일. 그가 국으로 제대 기다리는 육군 병장 이 병장이었다면 아마 양심선언은 없었을 것이다. 눈 딱 감고 연대장 시키는 대로 1번 찍어 눈앞에 보여 준 뒤 “이 병장 제대 며칠 안남았지? 말년 휴가에 특박 더 끊어 줄까?” 하는 자상한 배려를 받으면 됐을 것이다. 육군 쫄다구 주제에 무슨 민주주의고 나발이냐 말이다. 하지만 이지문 중위가 장교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충성 명예 단결’을 부르짖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였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지문 중위로 하여금 과연 이 행위가 누구에 대한 충성이며, 얼마나 그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며, 나아가 이 옹졸한 단결 아닌 담합이 필요한지에 대해 의심하게 됐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역시 단결(?)로 이지문 중위에 맞선다. 전 부대원 수백 명의 연대 서명을 받아 “그런 일 없었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지문 중위는 갖가지 혐의를 뒤집어쓰고 불명예 제대한다. 입사 전 확정되어 있던 삼성그룹 입사도 당연히 취소된다. 그러나 익명의 제보들은 쏟아져 나왔고 국군 통신사령부 이원섭 일병이 나서 이지문 중위의 진실을 뒷받침한다. 이런 용기들은 군 부재자 투표 제도를 개선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그 의미를 설명하자면 간단한 예 하나만 들면 된다. 우리 군은 70만 대군을 헤아린 반면 5년 뒤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50만표 차이로 당선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본의 아니게 악의 대열에 편입될 수 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이지문 중위의 직속 상관인 중대장은 육사 출신의 글자 그대로 FM의 군인이었다고 한다. 정의를 숭상하고 명예를 목숨같이 여기는. 그는 선거 관련 정신 교육을 하다가 그만 뒤돌아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면서 “1번을 찍어 달라.”고 말하며 내무반을 황급히 떠나야 했다. 양심선언 후 헌병대에서 마주했을 때 이지문 중위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며 양해를 구하자 그 중대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네 일이 있기 전부터 정신교육을 시키지 않아 연대, 사단, 나아가 군단에서까지 찍혀있으니까 너로 인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 없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보듯이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 이 멋진 장교는 기자들이 “이지문 중의의 말이 전혀 사실이 아니냐?”고 캐물을 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이라고 입을 떼고서도 “내성적인 성격 탓에 사물의 부정적 측면만을 집중적으로 예리하게 바라본 듯하다.”는 엉뚱한 답변을 내뱉아야 했다. 이지문 중위는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자기가 진짜 군인이라면 목을 걸고 이지문 중위의 진실을 옹호해야지, 그게 진짜 군인이지, 비겁하게 거짓말이나 하고 있는 놈이었다고, 결국은 그놈이 그놈이라고 중대장 김 대위를 욕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분노를 터뜨려야 할 대상은 한 용감한 젊은 군인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92년 바로 그 선거에서, 지금은 홍싸데기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지만 한때 야당의 맹장이었던 홍사덕의 지역구에서는 안기부 요원이 흑색 유인물을 뿌리다가 덜미를 잡힌 일도 있었을만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선거판은 개판이었다. 과연 그때 경찰서에서 참담한 표정 짓고 있던 안기부 직원들은 명색 정보기관 요원으로서 홍사덕의 치부(?)를 담은 찌라시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뿌리고 싶었을까. 내가 이 짓하려고 안기부 왔나 탄식하지는 않았을까. 물론 그것이 ‘본업’인 자도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20년 전의 얘기를 했다. 하지만 20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열심히 나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어인 연고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는지 어안이 벙벙해지는 요즘이다. 국가정보원 원장님은 대놓고 선거 개입을 요구했고 나름 좋은 대학 나오고 그래도 엘리트 공무원으로 자부심 충만한 7급 공무원들은 댓글 놀이를 해야 했다. 그 짓을 진심으로 애국이라고 믿는 돌대가리들도 있기야 할 것이다. “여당 지지가 32퍼센트밖에 안되어 북한의 선전재료가 되고 있다.”고 병사들에게 강조한 이지문 중위의 연대장처럼. 하지만 전직 가카의 학교 후배로 알려진 국정원 댓글녀 김씨, 돌돌 만 목도리 위로 불안한 눈동자만 굴리던 그녀는 과연 그 일을 좋아서 했을까. 좋아요 댓글 달고 반대 표기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생각했을까. 그 의문 와중에 국정원장, 한 국가의 정보기관장이라는 작자는 그를 보다못해 외부에 누출한 이를 잡고자 눈에 불을 켰고 그를 파면시켰다. 그 비양심도 모자랐는지 도둑 퇴임식을 하고 태평양 건너갈 기획을 하고 있었다. 쥐들도 찍찍거리고 혀를 찰 작자 같으니.
1992년 3월 22일 양심선언을 했던 이지문 중위는 이렇게 기대를 했다. “(저는 떠나고) 중대장님과 동료 장교들, 그리고 우리 소대 사병들은 군에 남아 있게 되었지만,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그리고 각자 사회를 보는 눈이 다르다 하더라도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양심적이면 항상 같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20년 후 오늘, 우리와 우리의 나라는 과연 그 기대에 충실한가.
국방부는 경악했다. 아니 운동권 출신의 작대기 두 세 개짜리가 튀어나가서 떠들어댄 것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두 개를 단 육군 중위이자 소대장이 지금 대체 뭐라고 하는 거냐? 뭐 저런 놈이 장교가 됐지? 저런 운동권이 어떻게 ROTC가 됐어? 그러나 이지문 중위는 운동권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과 동기였던 동아리 선배에 따르면 이지문 중위는 “87년 6월 정도에나 데모를 따라나가 봤을까 그 뒤에는 전혀 운동권이 아니었고 그냥 수업 잘 들어가던 범생이”였다.
튀지도 않고 나대는 성격도 아니었던, 오히려 내성적이었다는 육군 장교가 어떻게 군대 안의 선거 부정이라는, 당시만 해도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동시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되던 치부를 폭로하게 됐을까. 사회평론 길지 (아 이 추억의 이름) 3월호에서 이지문은 이렇게 얘기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에 들어간 사람도 많았는데 어떻게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저도 설명이 잘 안됐어요. 그런데 작년에 대전에서 밤차를 타고 올라오다가 '아마 내가 처한 상황이 이런 경우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했어요. 바로 앞자리에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술취한 남자 두 사람이 타서 그 여자 옆자리에 앉아 자꾸 치근덕대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자리를 바꿔주었지요. 그리고 나니 이 술취한 사람들이 행패를 부릴까봐 은근히 겁이 나대요. 내가 싸움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다른 자리에만 있었으면 아마 가만히 있었어도 됐을 겁니다. 부정선거 고발도 바로 그런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병이라면 부대 밖으로 나가면 바로 탈영이라 나갈 수 없었을 테고, 또 우리 부대가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었으면 못했을 텐데 부대 밖으로 나가면 바로 1시간 안에 광화문까지 도달하는 버스가 있었으니까요."
다른 자리에만 있었어도 가만히 있었으면 될 일. 그가 국으로 제대 기다리는 육군 병장 이 병장이었다면 아마 양심선언은 없었을 것이다. 눈 딱 감고 연대장 시키는 대로 1번 찍어 눈앞에 보여 준 뒤 “이 병장 제대 며칠 안남았지? 말년 휴가에 특박 더 끊어 줄까?” 하는 자상한 배려를 받으면 됐을 것이다. 육군 쫄다구 주제에 무슨 민주주의고 나발이냐 말이다. 하지만 이지문 중위가 장교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충성 명예 단결’을 부르짖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였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지문 중위로 하여금 과연 이 행위가 누구에 대한 충성이며, 얼마나 그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며, 나아가 이 옹졸한 단결 아닌 담합이 필요한지에 대해 의심하게 됐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역시 단결(?)로 이지문 중위에 맞선다. 전 부대원 수백 명의 연대 서명을 받아 “그런 일 없었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지문 중위는 갖가지 혐의를 뒤집어쓰고 불명예 제대한다. 입사 전 확정되어 있던 삼성그룹 입사도 당연히 취소된다. 그러나 익명의 제보들은 쏟아져 나왔고 국군 통신사령부 이원섭 일병이 나서 이지문 중위의 진실을 뒷받침한다. 이런 용기들은 군 부재자 투표 제도를 개선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그 의미를 설명하자면 간단한 예 하나만 들면 된다. 우리 군은 70만 대군을 헤아린 반면 5년 뒤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50만표 차이로 당선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본의 아니게 악의 대열에 편입될 수 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이지문 중위의 직속 상관인 중대장은 육사 출신의 글자 그대로 FM의 군인이었다고 한다. 정의를 숭상하고 명예를 목숨같이 여기는. 그는 선거 관련 정신 교육을 하다가 그만 뒤돌아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면서 “1번을 찍어 달라.”고 말하며 내무반을 황급히 떠나야 했다. 양심선언 후 헌병대에서 마주했을 때 이지문 중위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며 양해를 구하자 그 중대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네 일이 있기 전부터 정신교육을 시키지 않아 연대, 사단, 나아가 군단에서까지 찍혀있으니까 너로 인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 없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보듯이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 이 멋진 장교는 기자들이 “이지문 중의의 말이 전혀 사실이 아니냐?”고 캐물을 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이라고 입을 떼고서도 “내성적인 성격 탓에 사물의 부정적 측면만을 집중적으로 예리하게 바라본 듯하다.”는 엉뚱한 답변을 내뱉아야 했다. 이지문 중위는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자기가 진짜 군인이라면 목을 걸고 이지문 중위의 진실을 옹호해야지, 그게 진짜 군인이지, 비겁하게 거짓말이나 하고 있는 놈이었다고, 결국은 그놈이 그놈이라고 중대장 김 대위를 욕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분노를 터뜨려야 할 대상은 한 용감한 젊은 군인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92년 바로 그 선거에서, 지금은 홍싸데기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지만 한때 야당의 맹장이었던 홍사덕의 지역구에서는 안기부 요원이 흑색 유인물을 뿌리다가 덜미를 잡힌 일도 있었을만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선거판은 개판이었다. 과연 그때 경찰서에서 참담한 표정 짓고 있던 안기부 직원들은 명색 정보기관 요원으로서 홍사덕의 치부(?)를 담은 찌라시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뿌리고 싶었을까. 내가 이 짓하려고 안기부 왔나 탄식하지는 않았을까. 물론 그것이 ‘본업’인 자도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20년 전의 얘기를 했다. 하지만 20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열심히 나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어인 연고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는지 어안이 벙벙해지는 요즘이다. 국가정보원 원장님은 대놓고 선거 개입을 요구했고 나름 좋은 대학 나오고 그래도 엘리트 공무원으로 자부심 충만한 7급 공무원들은 댓글 놀이를 해야 했다. 그 짓을 진심으로 애국이라고 믿는 돌대가리들도 있기야 할 것이다. “여당 지지가 32퍼센트밖에 안되어 북한의 선전재료가 되고 있다.”고 병사들에게 강조한 이지문 중위의 연대장처럼. 하지만 전직 가카의 학교 후배로 알려진 국정원 댓글녀 김씨, 돌돌 만 목도리 위로 불안한 눈동자만 굴리던 그녀는 과연 그 일을 좋아서 했을까. 좋아요 댓글 달고 반대 표기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생각했을까. 그 의문 와중에 국정원장, 한 국가의 정보기관장이라는 작자는 그를 보다못해 외부에 누출한 이를 잡고자 눈에 불을 켰고 그를 파면시켰다. 그 비양심도 모자랐는지 도둑 퇴임식을 하고 태평양 건너갈 기획을 하고 있었다. 쥐들도 찍찍거리고 혀를 찰 작자 같으니.
1992년 3월 22일 양심선언을 했던 이지문 중위는 이렇게 기대를 했다. “(저는 떠나고) 중대장님과 동료 장교들, 그리고 우리 소대 사병들은 군에 남아 있게 되었지만,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그리고 각자 사회를 보는 눈이 다르다 하더라도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양심적이면 항상 같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20년 후 오늘, 우리와 우리의 나라는 과연 그 기대에 충실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