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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3.24 6.3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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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4년 3월 24일 6.3의 시작, 3.24 데모

 

경향신문 신동호 기자가 저술한 <70년대 캠퍼스>라는 책이 있다. 말이 70년대지 그 이전의 60년대 초반부터 유신 시절까지 그 시대를 통틀어 대한민국을 지배했던 박정희 정권과 그에 맞서 싸운 학생들의 면면과 사연과 비화들을 편년체와 열전(列傳)체를 섞은 느낌의 구성으로 정리해 놓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소회 가운데 하나는 데모 따위와는 안드로메다처럼 먼 거리에 있을 듯 여겨지는 인사들의 이름이 뜻밖에도 적잖이 출몰한다는 것이다. “어 이 양반도 이렇게 열심히 데모를 했었어?” 하는 헛웃음이 한 두 번 나오는 게 아니다.

 

5.16 군사 정변을 겪은 후 ‘젊은 사자들’은 잠잠했다. 장준하의 사례에서 보듯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 낡은 정치판을 좌악 쓸어 버린 것 자체에 대해서는 일정 정도의 호감이 존재했고 박정희가 대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리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쉬울 리가 없지. 사범학교 나와서 소학교 교사 하다가 아니꼽게 노는 일본인 교장에게 술상을 엎어 버리는 호기까지는 좋았는데 난데없이 큰 칼 차고 돌아오겠다고 만주군에 입대하더니 일본에 견마지로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혈서까지 썼다는 소문인데 해방 후 돌아와서는 인망 높던 형을 따라 남로당에 입당, 군사 총책까지 됐다가 죽음 직전에서 만주군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났고 쿠데타는 “반공을 제1의 국시”로 한다고 선언한 사람을 어떻게 정리한단 말인가. 운동권 내부에서도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이며 5.16은 민족주의 군사혁명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1964년 봄이 오면서 캠퍼스에는 점점 반항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계기는 한일회담이었다. 미국의 태평양 전략상 한국과 일본이 국교도 없이 삐딱하게 지내는 것은 영 마뜩지 않은 일이었다. 이는 1962년 미국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에게 케네디 대통령 알현을 미끼로 내건 조건에서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미국에 오는 길에 도쿄를 들러 이케다 총리와 이야기 좀 하고 오라.” (동아일보 2012.11.5) 그 전에 이미 케네디는 박정희에게 친서를 보내 놓고 있었다. “위대한 정치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주시오. 박 장군.” 여기서 케네디는 박정희를 장군이라고 불렀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이었다는 설도 있다.

 

케네디가 달라스에서 그 ‘마법의 탄환’을 맞고 죽은 후에도 미국의 기조는 변함없었고 등을 떠밀린 한국 정부와 아쉬울 것 없는 일본 정부는 결코 결렬할 수 없는 협상을 지루하게 이끌어가야 했다. 그것이 윤곽이 드러났을 때 학생들은 격노했다. 드디어 1964년 3월 24일 3.24 데모가 서울대, 고려대 등 일부 대학에서 벌어진다. 이 3.24 데모를 기획하고 준비한 서울대 운동권의 핵심 그룹 가운데 하나는 경북고 인맥이었다.

 

1960년 2.28 데모를 벌여 4.19의 봉화를 띄웠다는 자부심으로 그득했던 이 대구 사나이들 가운데 법대 학생회장으로 정정길(이명박 정부 대통령실장)을 당선시킨 1등 참모였으며 이후 진용을 나눠 공부를 택해 도서관에 들어갔다가도 데모를 조직할 때에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그 비상한 머리로 작전을 짜던 이가 있었다. 그가 글쎄 박철언이었다.

 

3월 24일 이전에도 시위는 계속 준비되고 있었으나 정권의 감시와 학생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 등으로 계속 무산됐다. 고려대학교에서는 3월 18일 장준하 함석헌 초대 강연을 기화로 시위를 조직하려 했지만 학교측이 이를 눈치를 채 버리고 결사반대하는 통에 무산됐고 연세대는 3월 22일 시위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그러던 중 총학생회실로 한 학생이 뛰어든다. “서울대가 24일날 데모하기로 했다!” 이 중요한 정보를 물고 온 사람의 이름은 최장집. 우리가 아는 그분이었다.

 

3월 24일이 왔다. 지금의 대학로에 있던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현승일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형성했고 당시로서는 이색적인 시위 문화 하나를 선보인다. ‘화형식’이었다. 그들은 왕년의 매국노 이완용과 이케다 일본 수상의 허수아비를 들고 불태웠다. “나라 파는 한일회담 중지하라.” “평화선을 사수하자.” “제2의 이완용을 소환하라.” 차마 내세우지 못했지만 실상 불태우고 싶었던 것은 제2의 이완용이라 불리워도 좋다며 기염을 토하던 김종필이었다.

 

고려대학교에서도 학생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고 (여의도 아님) 연세대학교와 대광고등학교 등도 가세했다.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 처음으로 학생시위대가 광화문 앞까지 진출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6월 3일까지 이어진 한일회담반대시위의 효시였다. 며칠 뒤 이 3.24 시위의 의의를 두고 고려대학생들의 좌담회가 열렸다. 이 좌담회에서 “일본인상사니 매판자본이니 하는 것들이 하는 재미롭지 못한 것들이 벌써부터 발호하고 있어 일본에 의한 경제적 예속을 극히 우려하는 바입니다.”라고 기염을 토하면서 “결론적으로 이번 데모의 의의는 상실되었으며 정부에 아무런 반응도 주지 못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하겠습니다.”라고 분연히 말해 좌중의 동의를 이끌어낸 상과대 총학생회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이명박이었다.

 

꼭 50년 전. 그야말로 다양한 면면, 그 이후 두 배로 다양해지는 면면의 젊음들이 몰려들어 그들의 젊은 피를 무기로 ‘구악’을 몰아내겠다면서 구악 뺨치는 ‘신악’을 창조하던 박정희 정권에 맞섰다. 저들의 인생 역정과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일치시킬 수도 없고 대입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꼭 반 세기 전 ‘젊은 그들’을 추억하면서 얼굴에는 실없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한 웃음이 얼굴을 채운다. 그래 그들도 그럴 때가 있었구나. 그들 또한 역사의 일부분이었고 우리는 그 역사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 하기사 얼마전 경기도지사 촬영을 다녀온 후배는 자기가 찍은 김문수가 한때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극렬한 빨갱이였으며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만큼 부지런한 혁명가였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지 않았으렸다. 그렇게 역사는 호수가 아니라 강이다. 흘러간다. 같아 보이지만 항상 다른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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