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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3.21 정주영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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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1년 3월 21일 정주영에 대한 단상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얘기지만 어느 골방에서의 토론 와중에 ‘숙청’의 문제가 대두된 바 있었다. “먼 훗날 해방의 그 날에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하리라.” 하는 어마어마하고 기괴하기까지 한 가사를 서정적인 멜로디에 실어 부르던 시절이었으니 나이 스물 어간의 젊은이들이 객기어린 살생부를 작성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때 지금은 현대 쪽 어디에서 월급 받으며 사는 것으로 아는 한 선배가 말을 이었다. 

“숙청은 적을수록 좋지요. 노태우? 죽여야지. 전두환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정주영은 죽어야지.” 

요즘에사 삼성 제국 건희 황제가 한국 재벌의 태두로 누구나 인정하지만 1987년 삼성 제국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죽은 뒤 한국 재벌의 으뜸은 단연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치기어린 숙청(?)의 리스트 맨 윗단을 장식하는 한국 자본가의 대표였다. 그 숙청 논의(?)가 있은지 2년쯤 뒤 정주영은 막대한 세금을 두드려 맞더니 “돈 없어 세금 못내겠다.”는 폭탄 선언을 하고 정치에 뛰어든다. 그때 열심히 데모들 했지만 졸업하고 현대에 취직했던 선배들이 학교에 와설랑 울상을 하면서 통일국민당 입당원서를 보여 주며 모일까지 이걸 채워야 한다며 푸념하던 그 무렵, 정주영을 숙청해야 한다던 선배는 현대에 입사원서를 넣고 있었다. 


지금도 젊기에 할 말은 아니지만 내 “더 젊었던 날의 초상” 중 일부를 장식했던 정주영의 편린들은 그 짧은 시간에도 그렇게 드라마틱했다.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의 일생은 한국 현대사를 통틀어 그 역동성에 관한한 다섯 손가락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강원도 통천에서 아버직 소 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했던 소년이었던 그가 어떤 인생 역정을 걸었는지는 굳이 적지 않으려 한다. 나보다 더 잘들 알고 계실 테니까. 그냥 내 추억 속의 정주영만 엮어 보겠다. 


그의 이름이 각인된 것은 아무개 가수와의 스캔들로서였다. 중딩 시절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통통한 인상의 가수가 한동안 뜸했는데 글쎄 그예 정주영의 애를 낳고 왔다는 소문이었다. “진짜가? 그리 이쁘지도 않은데. ” “아 씨바 정주영이는 그런 스따일을 좋아한다 안카나.” 등등에서 시작하여 “정주영 아들들 엄청 많잖아. 그게 다 엄마가 다르다 아이가.”는 위험한 헛소문(?)까지 나도는 가운데 거의 모든 여가수들이 잠시 휴식기를 가지면 으레 정주영과 연결됐다. 각자 홍콩에서 미국에서 어디에서 몸 풀고 왔다고. 


워낙 유명해서겠지만 후일 대통령 선거에 나와 관련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굳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위로 변명하지 않았다. 단 좀 그답잖은 쩨쩨한 답변을 하기는 했다. “남들 하는 만큼 바람도 피워 봤습니다.” 그의 이 ‘바람’ 행각은 소설가 백시종의 소설 ‘돈황제’에 적나라하게 문학적으로 승화되지만 그렇다고 그는 7공자니 뭐니 엽색행각으로 아버지 회사 말아먹었던 이들과 같은 차원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전거 안장에 앉아본 적도 없는 주제에 “자전거 타냐?” 라는 질문에 “그러문요!”라고 대답하여 배달원 직을 따냈던 젊은 날의 정주영의 배짱은 그의 호색 습관만큼이나 평생을 통해 관통했다. 유조선을 가라앉힌 물막이 공사라든가 500원 지폐의 거북선을 보여 주며 외자를 끌어들여 현대중공업을 세운 것이라든가 어떻게든 국산차를 만들어 보겠다면서 일로매진한 것이라든가 “주판알 튕기지 마!”라면서 시멘트 공장의 생산 라인을 통째로 뒤바꿔 경부고속도로 최고의 난공사를 해결한 것이라든가. 과장도 있고 부풀려지기도 했겠으나 그는 분명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그 배짱(?)은 기이하게 적용되기도 했다.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 당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요구 중의 하나는 ‘두발 자율화’였다. 애 딸리고 백발도 희끗희끗한 노동자들의 머리를 바리깡으로 관리하고 조인트를 까 버리기도 했으며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된다”는 반헌법적인 발상도 서슴지 않았다. 그 배짱의 진폭도 컸다. 결국 출범한 노조를 방문해서는 "이왕 할 거면 현대답게 세계 최고의 노조가 돼라.”는 화끈한 축사를 남긴 몇 달 뒤에는 노동자들의 옆구리에 식칼을 찔러 넣는 폭력배들을 고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가 노동자들의 옆구리에 식칼을 찔러 대던 해에 그는 역사에 남을 또 하나의 자신을 창조하고 있었다.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고 돌아왔을 때 당시 통일운동을 주창하던 학생운동 정파는 그 반대파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아야 했다. “임수경이 통일의 꽃이면 정주영은 통일의 할아버지냐?” 그때 차마 대답은 못하고 씩씩거리던 친구들의 얼굴은 지금도 깨소금 대용이거니와, 한 번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 보겠노라며 그 인생 최대의 똥배짱을 부렸다가 일생일대의 망신을 당하고 별별 꼴을 다 보고, 또 김동길 같은 이에게는 별별 꼴을 다 보인 이후 그는 대북 사업에 매진한다.


결국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봉”을 현실로 만든 것은 그였다. 저 꼴통스러울만큼 자주적이고 끔찍할만큼 옹골찬 북한을 감동시켜 평양에 그 이름을 딴 체육관을 짓게 만든 것도 그였다. 그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역시 1998년 6월 16일 그가 간척사업으로 만든 땅에서 기른 소 500마리를 싣고 판문점을 열어젖히고 북쪽으로 향하던 순간일 것이다. 기 소르망이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부른 이 장관의 맨 앞에는 정주영이 탄 까만색 다이너스티가 달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사람은 죽을 때 자기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흘러간다는데 소떼 앞에서 그의 차창에는 그의 80평생의 순간순간이 슬로우비디오로 흘러갔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명암이 있다. 빛과 그림자가 있고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있다. 그건 적으로 삼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정주영을 숙청 대상으로 꼽았던 젊은날의 치기를 후회하고 싶은 맘은 없지만 그저 악한으로만 치부하고 색마로만 비난하고 노동자 옆구리에 식칼 꽂은 자본가로서만 이를 갈았던 데에 그쳤던 (그 자체가 나빴다는 게 아니라) 것은 후회가 된다. 적어도 그는 오늘의 건희제와는 좀 달랐던 것 같다. 물론 이러면서도 건희제에게서 배워야 할 점을 외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정주영은 그 허다한 공과 가운데 가장 큰 해악을 우리에게 남긴 이이기도 하다. 그가 인상이 쥐같기도 하고 뱀같기도 한 고려대학교 운동권 하나를 취직시키고 사장까지 시켰던 것을 뜻한다. 

2001년 3월 21일 정주영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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