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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3.20 빙허 현진건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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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3년 3월 20일 현진건 가다 

고등학교 때 국어2를 배우면서 고문(古文)은 그야말로 고문(拷問)이었지만 현대문학은 즐거웠다. 물론 재미지게 읽는 소설 가운데 밑줄 쫙 긋고 은유나 직유냐 주제를 잘 드러내는 시어는 무엇이며 이 작가는 무슨 파에 다른 작품들은 무엇이 있는지 외워야 하는 것이야 역시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미처 접하지 못한 근현대 문학 작품들과 마주하는 일은 수험생이라는 수형생활에 한 자락 비춰진 햇살과 같았다. 그 가운데 인상깊었던 작가는 빙허 현진건이었다. 

그는 ‘사실주의’ 유파로 분류됐던 바, 아니나다를까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영화를 보듯 그 풍경이 그려져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운수 좋은 날>이었다. 김첨지라 불리우는 인력거 장수가 병든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일하던 중 웬일로 대박을 만나 술을 들이켜고 설렁탕 한 주전자까지 사들고 가는 행운을 잡았지만 집에 들어서서 마주한 것은 아내의 싸늘한 시신과 그 마른 젖을 쪽쪽 빨아대고 있던 아들이었다. 김첨지는 아내의 얼굴에 제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린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앤터니 퀸의 추억의 명화 <길>을 명화극장 시간에 보면서 풍각쟁이 앤터니 퀸이 구박해 마지않던 젤소미나의 죽음을 듣고 무너져 내리던 모습이었달까, 그 소설을 읽으며 처음에는 남편 오는데 안 일어난다고 발로 차 대다가 그예 머리 맡에 주저앉아 눈물 흘리고 마는 빈한한 식민지 백성의 모습이 영화처럼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어디 그 뿐인가 “되지 못한 명예 싸움, 쓸데없는 지위 다툼질,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내 권리가 많으니 네 권리는 적으니……. 밤낮으로 서로 찢고 뜯고 하지. (중략) 이런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이오. 하려는 놈이 어리석은 놈이야. 적이 정신이 바로 박힌 놈은 피를 토하고 죽을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으면 술밖에 먹을 게 도무지 없지.”라고 떠벌이는 <술 권하는 사회> 주인공의 주정은 흡사 술자리에서 지금도 종종 내 목소리가 되어 울려 나오지 않는가 말이다. 

그는 대구 태생이다. 그 문재(文才)를 비롯하여 하늘로부터 받은 복이 많았지만 처복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부인 이씨는 대구의 부잣집 딸이었다. 연상인데다가 배운 것도 없어서 처음엔 데면데면했고 그 처갓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불편하게 생활하기도 했지만 현진건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평생 아내만을 사랑한 남자였다. <빈처>에 나오듯 가난 때문에 투정부리는 아내에게 “"막벌이꾼한테 시집을 갈 것이지 누가 내게 시집을 오랬어! 저 따위가 예술가의 처가 다 뭐야”라고 고함을 지르다가도 “왜 마음을 조급하게 잡수셔요! 저는 꼭 당신의 이름이 세상에 빛날 날이 있을 줄 믿어요.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이 장래에 잘 될 근본이야요."라고 말하는 아내에게 감동을 먹고서는 “일찍이 장가든 것을 매우 후회하여 어떤 남학생과 어떤 여학생이 서로 연애를 주고받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마다 공연히 가슴이 뛰놀며 부럽기도 하고 비감(悲感)스럽”던 과거를 뉘우치며 "아아, 나에게 위안을 주고 원조를 주는 천사여!"라고 질질 짜고 마는 팔불출은 다름아닌 현진건 자신이었고 못난 조선 남편들, 한국 남편들이었던 것이다. 
<술 권하는 사회>를 쓴 작가답게 그는 술 실력이 무지하게 셌다. <벙어리 삼룡이>의 나도향과 월탄 박종화 등등과 어울리면 대포잔으로 60잔 정도는 가볍게 해치우던 그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사회부장으로 일할 때 직장 남성들 최대의 로망을 단행한다. 점심 시간에 낮술을 벌겋게 먹고 들어온 그는 복도에서 동아일보사 사장(김성수라고도 하고 송진우라고도 한다)과 마주친다. 그런데 이 술 취한 사회부장 사장에게 대뜸 반말을 던졌다. “사장이구만?” 사장을 알아봤으니 인사불성도 아닌데 “허허 취했구만” 하며 너그러이 피하려는 사장에게 코를 갖다 붙인다. “그래 취했다. 네가 사장이라고 술 한 번 받아 줘 봤나? 받아 줘 봤으면 얘기를 해 봐.” 그러면서 우리의 현진건 선생은 기세 좋게 뺨을 올려 부친다. 짜악~~~~~ 이 시대 월급쟁이들 대부분이 평생을 꿈꾸나 평생 동안 해 보지 못하고 죽는 그 로망! 

사장도 보통 사람이 아니어서 다음 날 “내가 술 안받아줬다니 가세!” 라고 받아넘겼고 아침에 출근해 놓고도 죽이려면 죽여라 빳빳이 고개들고 있던 현진건은 그때가 돼서야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이 현진건은 창의문 밖에 집이 있었는데 “술이 취하여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창의문 고개를 넘어오면 그곳의 촌민들은 ‘또 동아일보의 현 선생이 술이 취하여 돌아오는군’하고 이불속에 든 부부들이 대견해하면서 마주 웃었다.”고 한다. (유광렬, ‘한국의 기자상’, 기자협회보 1968년 4월호 

그 술 실력에 배포에 유수 신문사 사회부장에 거기다 그는 미남이기까지 했다. 그가 떴다 하면 기생들은 그 옆 자리를 쟁취하려고 손톱을 세웠고 그와의 인연을 엮어 보려고 아등바등이었다니 대체 전생에 나라를 구해도 서너 개는 구했지 싶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그는 그 앞에 펼쳐진 쾌락의 진창밭에서 거의 독보적일만큼 고고했다. 술은 인사불성 두주불사로 퍼먹으면서도 아무한테 수작 한 번 걸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그에게 폭풍이 들이닥친 것은 1936년 8월.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였다. 조선중앙일보에서 일장기를 살짝 지워 버린 걸 보고 자극받은 동아일보 젊은 기자들이 작당을 해서 손기정 가슴팍의 대문짝만한 일장기를 박박 지워 버렸을 때에도 그는 사회부장이었고, 그 음모를 묵인하고 동조했다. 그 사단을 지켜보면서 현진건은 독립운동하다가 옥에서 죽어간 형과 그 형을 따라 목숨을 끊은 형수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1년을 옥살이하고 “언론계에서 일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고 풀려나왔던 그는 이후 신문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빈한한 삶을 살았다. 외동딸을 월탄 박종화 가에 들여보낼 때 이미 그는 폐결핵과 기타 병으로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져 있었다. 좀체 주례를 안서기로 유명했던 최남선이 주례에 선 이 결혼식이 끝난 지 두 달만에 세상을 뜬다. 그가 마지막에 관심을 쏟았던 것은 역사 분야였다. 총독부의 방해를 받아 끝맺지 못한 그의 역사 소설의 주인공은 백제의 무장 흑치상지였다. 신라와 당에 맞서 분연히 일어섰으나 결국은 당에 투항하여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본거지였던 임존성을 함락시켰고 신라 아닌 당에 들어가 당의 장수로 싸우다가 누명을 쓰고 죽어간 흑치상지를 현진건은 어떻게 그려냈을지 사뭇 궁금하다. 



그의 기일을 맞아 ‘한국 최초의 리얼리즘 작가’ 현진건의 한 마디를 맺음으로 올려 둔다. 그 대에나 지금 대에나 유용한 말인 듯 싶어서. “과거를 더듬으며 한숨이나 쉴 일이 아니오, 미래를 바라보며 팔만 벌리고 있을 것이 아니다. 손아귀에 단단히 힘을 주어 현재를 움켜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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