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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3.19 안녕 프란체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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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2년 3월 19일 안녕 프란체스카 

언젠가 드라마 <프란체스카>를 보면서 나는 엉뚱한 사람이 자꾸 떠올라 시청에 방해를 받았었다. 그건 프란체스카 도나 리. 즉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였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비슷한 사람의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라고 종종 오해를 받았고 6.25때 쌕쌕거리고 하늘을 날던 F86 전투기를 두고 오스트레일리아 군 비행기, 즉 호줏기라고 부르며 “이박사 처갓집 비행기”라고 부르기도 했다지만 그녀는 유럽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그녀는 이혼녀로서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 제네바 여행 중에 독립운동을 한다는 중년의 동양 신사를 만났다. 인연이려고 그랬는지 그녀는 여행 직전 읽은 책에서 Korea라는 이름을 알았기에 동양 신사에게서 Korean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낯설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동양 신사의 행적이 실린 신문을 스크랩하여 전달할만큼 호감을 가졌다. 느낌이 이상했던 어머니는 즉시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이 고집불통 딸은 계속 동양의 신사와 서신을 교환하며 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애초에 합석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나이도 많은 동양 신사라 괜찮을 줄 알았더니!” 그 어머니의 한탄이었다. 

그 동양 신사는 이승만이었고 둘은 결혼한다. 신부 프란체스카 양 나이 서른 넷. 신랑 이승만 군의 나이는 장장 쉰 아홉. 프란체스카의 작고한 아버지의 나이가 이승만과 동갑이었다. 필시 장모는 이승만보다도 어렸으리라. 둘은 평생 서로를 '마미‘ ’파파‘라고 불렀다는데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을 파파라 부른 것은 그렇다고 치는데 이승만이 프란체스카에게 마미라고 부르는 풍경은 피식 실소를 새어나오게 만든다. 

어쨌든 부부가 된 두 사람이었지만 독립운동가의 좌장급이었던 이승만 (해방 후 좌익이건 우익이건 최고 지도자 후보로는 이승만을 꼽았으니)의 파란 눈 신부는 한국 사람들을 경악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이승만에게 온 초청장에는 “(부인은 두고) 혼자만 와 주십사”가 박혀 있기 일쑤였고 어떤 이들은 대놓고 프란체스카를 배척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꿋꿋이 버텼고 이승만을 도우며 미국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둘 사이의 금슬은 꽤나 좋았던 것 같다.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가문에서 익힌 가부장제를 미국 생활 수십 년 동안에도 전혀 버리지 않은 이승만의 뜻을 잘 따라 주었고 망국의 가난한 망명객에게 꼭 필요한 비서 노릇도 해 주었다. 이후 프란체스카는 귀국했고 대한민국 초대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 

그녀에 대한 평은 엇갈린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人)의 장막을 친 서양의 마귀할멈”부터 평생 한국 초대 대통령의 아내로서의 품위와 검소함을 잃지 않았으며 침몰한 남편의 명예를 끌어올리려 노력하며 살다 간 영부인까지. 그 와중에 도무지 이분의 활동 영역을 짐작하기 어렵게 만드는 증언들도 역사의 우물 속에서 길어올려져 있기도 하다. “우리는 여성공작원들을 수백 명이나 보유했는데 모두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가 제공했다. 모두 영화배우인 데다 미모가 출중했다.” (미 공군 특수부대 준장 아더홀트) 

언젠가 책방에서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를 읽은 적이 있다. 그 회고록에서도 프란체스카 여사는 철저한 팔불출을 고수하며 자신보다 반 세기나 더 나이를 먹었던 남편을 옹호하고 예찬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프란체스카 여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그 남편이 점점 더 무서워졌다. 

“전쟁은 계속되어도 어두운 소식뿐인 것 같다. 고열에 들떠 멍멍한 속에서도 대통령의 기도는 매일 밤 내 귓전에 울렸다. ‘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을 적의 무자비한 포탄 속에서 보호해 주시고 죽음의 고통을 덜어 주시옵소서. 총이 없는 아이들은 오직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만으로 싸우고 있나이다. 당신의 아들들은 장하지만 희생이 너무 크옵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 당신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50년 7월17일)” 

이 기도가 프란체스카의 귓전을 울렸다는 것은 이승만이 이 기도를 영어로 했다는 이야기다. 둘은 거의 평생 영어로 소통했고 프란체스카는 늘그막까지도 한국어를 알아듣긴 했으나 제대로 말하지는 못하는 처지였으니까. 전쟁 중에 영어로 울부짖는 한국 대통령. 거기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저 기도 와중에 보도연맹 학살을 국군과 경찰이 후퇴하면서 자신들이 작성했던 보도연맹원들을 쏴 죽이고 찔러 죽이고 태워 죽였던 것을 상상하면 저 기도를 하나님(?)은 어떻게 들으셨을지 궁금하다. 

“대전으로 남하한 뒤 대통령은 침실 머리맡에 모젤권총 한 자루를 놓고 자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차디찬 그리고 싸늘한 총구가 기분 나빴다. 나의 이런 표정을 읽은 대통령은 ‘최후의 순간 공산당 서너 놈을 쏜 뒤에 우리 둘을 하나님 곁으로 데려다 줄 티켓이야’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 

죽을 각오로 머리맡에 권총을 챙기는 각오를 한 그 사람과 대전으로 도망온 뒤 충남지사 관사에 KBS 대전방송과장을 불러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됩네다. 중계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고 내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서 전국에 중계하시오. 내가 방송한 것을 서울에서 여러 번 재방송하도록 하고, 누가 묻더라도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됩네다. 사전에 대통령 연설이 있을 거라는 말도 해서는 안됩네다.”라고 당부하고선 국군이 의정부 탈환하는 등 잘 돼 가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방송을 전국에 틀어제낀 그 사람은 정말 동일인이란 말인가. 사실이 그렇다면 프란체스카 여사는 도플갱어와 살았던 게 아닐까. 

“한밤중에 침대에 엎드려 ‘하나님, 이 미련한 늙은이에게 보다 큰 능력을 허락하시어 고통 받는 내 민족을 올바로 이끌 수 있는 힘을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50년 10월12일)”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를 불신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결코 미련한 사람이 아니었다. 또 자신에게 항거하며 일어섰다가 총을 맞은 대학생들 앞에서도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않으면 국민이 아니지요.” 하며 눈물을 흘릴만큼 눈물이 흔한 사람이었다. 그 눈물을 닦은 뒤 이승만은 재판도 필요 없이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서를 쓰기도 했고 자신의 유력한 도전자를 목매달아 버리는 잔인함을 보이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끝내 도플갱어의 한쪽 면을 깨닫지는 못했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결코 믿지는 않았을, 아버지같은 동양 신사를 평생 사랑했을 프란체스카 여사는 1992년 3월 19일 한 세기 가까운 생을 마치고 이화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의 초대 퍼스트 레이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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