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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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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3.18 부미방 그리고 김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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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2년 3월 18일 부미방과 김은숙 

부산에는 대청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남포동 근처의 번화가이며 근처에는 부산 굴지의 백화점이던 유나백화점과 미화당 백화점이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 동네의 랜드마크는 단연 미국 문화원이었다. 밝은 색 외벽을 하긴 했지만 뭐가 위압적으로 보이던 건물 위로는 성조기가 나부끼던 그 건물은 1982년 검은 연기를 토해 내며 불타오른다.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이른바 ‘부미방’이 터진 것이다. 

항쟁에 나선 광주 시민들조차 미국 항공모항의 입항에 “우리를 도우러 왔다.”고 고무되었을만큼 이른바 ‘반미의 무풍지대’ 한국에서 미국 문화원이 방화로 불타오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엄연히 웬 여자 두 명이 기름통을 들고 왔고 그걸 들이붓고 불을 당기는 걸 본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근처 국도극장 3층에서는 팜플렛이 뿌려졌다. 명백히 계획된 방화였고 시위였다. 그리고 방화에 가담한 이들이 외친 구호는 전두환의 그 드문 머리털을 곤두세우기에 충분했다.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이제 우리 민족의 장래는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땅에 판치는 미국 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 먼저 미국문화의 상징인 부산 미문화원을 불태움으로써 반미투쟁의 횃불을 들어 부산 시민들에게 민족적 자각을 호소한다 ”

경천동지(驚天動地). 적어도 남한의 하늘도 놀랐을 것이고 그 땅은 분명히 움찔거렸을 것이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고 공안당국은 눈을 까뒤집었다. 사건 발생 14일만에 이 경천동지할 사건의 주인공들이 세상에 드러났다. 문부식과 김은정. 그리고 그들을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김현장이 체포됐고 문부식과 김은정을 돕고 유인물을 뿌렸던 대학생들도 모두 체포됐다. 문부식과 김현장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기에 부미방 사건 하면 그 둘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실상 미 문화원 방화라는 엄청난 일을 실행에 옮긴 것은 김은숙을 비롯한 여학생들이었다. 휘발유통을 들고 들어가서 뿌리고 나무젓가락에 알콜을 뭉친 솜덩이를 끼워 만든 ‘방화봉’에 불을 붙이고 기름에 불을 당긴 것은 모두 여학생들이었다. 주범(?) 김현장은 천 리 밖 원주에 있었고 문부식은 앞 건물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김은숙과 문부식은 연인 관계였다. 그들의 첫만남은 그렇게 로맨틱하지 못했다고 한다. 친구가 문부식과 김은숙을 소개팅시켜 주기로 했는데 문부식이 만남 장소 약도를 잘못 그려 주어 만남이 불발됐는데 어느 날 김은숙은 씩씩거리며 문부식의 강의실을 찾아갔다. “당신이 문부식이죠? 약도를 똑바로 그려 줬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휑 하니 나가버렸다니. 그 후로 연이 없었던 그들은 문부식이 복학한 후 함께 3학년을 다니면서 친해졌다. 둘은 그야말로 역사적 사건을 함께 치른 한 쌍이 된다. 자수하기 전 신부의 주례로 혼인 예식까지 거행하지만 둘은 부부로 살지 못했다. 바로 감옥으로 끌려가서 사형이라는 아득한 선고를 받았고 (문부식) 짐승같은 남자들 앞에서 알몸이 되어 고문을 받아야 했던 (김은숙) 그들의 젊음과 일상의 행복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김은숙은 출소 후 담담하고 묵묵하게 현장을 지키며 살았다. 김백리라는 필명으로 책을 내고 동화도 쓰는 작가이면서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순옥 참여성노동복지터 대표와 함께 평화시장 인근에서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공부방의 교장으로 활동했다. 아이들을 어떻게 잘 건사할까의 고민으로 때문에 하루 4시간밖에 못 자면서도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는 그녀는 뜻밖에 위암이라는 병마에 시달리게 된다. 

임수경씨는 트윗으로 이 사정을 알린다. “ 그녀가 치열하게 살았던 격랑의 80년대, 이제는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겨져야 할까요. 그녀는 지금 지치고 외롭고 아프고 가난합니다.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사위어갑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아득한 기억 속의 화석이 되어 버린 그을음같은 이름 부미방과 김은숙의 이름을 다시 기억해 냈다. 죽기 얼마 전 입원해 있던 녹색 병원 로비에서는 ‘김은숙을 위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환자복 위에 스카프를 두르고 휠체어에 탄 채 나타난 그녀는 1주일도 안된 기간 6천만원의 돈을 모아 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멀리서 이렇게 부족한 저를 위해서 와 주시고 격려해주시고, 희망을 전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꼭 낫도록 하겠습니다." 병마에 지치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녀는 그 공연을 준ㅂ비하던 임수경씨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한다. “희망을 이야기해야 된다.” 즉 환자 위로한답시고 우울한 분위기 만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은숙은 쉰 둘의 나이로 2011년 세상을 떴다. 죽음 직전 거의 의식을 잃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깨어나 “사랑해!”를 부르짖은 후 숨을 거뒀다고 한다. 고은 시인은 그녀륽 ‘숨은 꽃’이라고 불렀다. 바람맞힌 남자를 찾아가 대차게 한 마디를 쏘아 주고 나왔던 말괄량이 여대생, 대낮에 기름통을 들고 미국 문화원 문을 박찼던 당찬 처녀는 그렇게 어두운 곳, 손이 닿지 않는 후미진 곳에서 그 소담한 꽃을 묵묵히 피워내다가 일찍 시들고 말았다. 


1982년 3월 18일 스물 넷의 여대생이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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