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8년 3월 16일 미라이 학살, 좀비와 인간
1968년 봄 베트남에 있는 미군들은 바짝 독이 올라 있었다. 월맹의 구정대공세를 물리치기는 했지만 미국 대사관이 한때 공격받는 등 뜨거운 맛도 봤던데다가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펼치는 베트콩들의 준동에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다. 신경이 곤두선 미군들은 곳곳에서 무리수를 펼쳤고 1968년 3월 16일 최악의 참사를 빚어내고야 만다. 미군 제 23사단 11여단 20연대 소속 1대대는 남베트남 쾅과이 주 일대에서 작전 중이었다. 이들은 구정대공세 기간 부비트랩과 베트콩의 공격으로 적잖은 동료를 잃었고 복수심에 불탔다.
베트콩 준동 마을로 꼽힌 성미 마을을 두고 연대장은 “쓸어버리라”는 명령을 내렸고 대대장은 “가옥을 불사르고 우물을 폐쇄하고 가축을 죽이라.”는 한국전쟁에도 즐겨 사용된 ‘견벽청야’ 즉 게릴라 근거지로서의 기능을 박멸시키는 작전을 명령한다. 이후 중대장은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모든 민간저항군”을 다 쓸어버리라고 휘하 소대에게 지시했는데 입대한 지 넉 달 되고 좀 띨띨하다고 소문났던 켈리 소위 휘하 병력은 이 명령을 “민간인 포함해서 다 쓸어버리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런 명령을 받았을 수도 있고)
켈리 소위 이하 소대원들은 미라이 마을 (실제는 성미 마을인데 미군 지도에는 자신들이 지칭하는 대로 미라이 마을이라고 돼 있었다)로 투입됐다. 게릴라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하지만 미군들은 미라이 마을 사람들을 마을 중앙으로 모이게 했다. 미라이 마을 사람들은 긴장했지만 별 두려움이 없었다. 그들은 남베트남 공화국 시민이었고 우리로 치면 주민등록증이 엄연한 사람들이었다. 미군들이 거칠게 그들을 마을 가운데로 몰아갈 때에도 그들은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연신 주민등록증을 내밀며 자신들이 무고한 베트남 시민임을 표하려 들었다. 그러나 이미 살인 허가를 취득한 군인들에게 그것은 밑씻개로도 못쓸 종이조각일 뿐이었다.
학살은 시작됐다. 찰리 소대에 이어 투입된 다른 대대원까지 합세하여 그들은 온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남녀를 가리지 않았고 노소의 차별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피를 토하며 국그릇만한 총상을 남기며 쓰러져 갔다. 어떤 이는 사지가 토막나기도 했다. 또 젊은 여자의 경우 성폭행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런 식으로 560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자유의 십자군을 자처하던 미군 병사들은 흡사 좀비처럼 사람 사냥을 나섰고 눈에 보이는 대로 죽였다. “훈련받은 지침이 떠올랐고 난 마구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노인, 여자, 아이, 물소, 모든 것을. 그들은 적이었다. 난 그들의 목을 따고, 손을 자르고, 혀와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머리 가죽을 벗겼다.”
좀비영화에서 보듯 득시글거리는 좀비들 가운데에는 인간도 끼어 있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학살극에 기가 질린 한 병사는 “명령이다 놈들을 죽여!”를 부르짖는 장교와 고참 좀비들의 이빨에 물어뜯기기도 싫었고 좀비가 되어 죄없는 사람을 찢어발길 수도 없었다. 그가 택한 길은 자신의 발등을 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인간은 몇몇 더 끼어 있었다. 말단 사병의 몸으로 명령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학살극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자신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 이 전쟁광 좀비들이 벌이는 짓을 똑똑히 지켜 보면서 언젠가는 이 미친 짓을 폭로하고 말리라 다짐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건 표적이 없는 대학살이다!”
종군기자 로버트 해벌은 미라이 학살을 담은 필름을 미군 당국에 제출했지만 자신의 개인 카메라에도 그 끔찍한 기록을 낱낱이 담아 빼돌렸고 C중대원은 아니었지만 동료의 증언으로 사실을 파악하게 된 미군 병사 론 라이덴하워는 닉슨 대통령부터 언론에 이르기까지 수십 군데에 미군 부대원들이 저지른 죄악상을 고발하는 편지를 보냈다. 거의 메아리가 없는 일이었다 싶었지만 이를 발판으로 1969년 미라이 학살에 대한 심층보도가 나오게 되고, 미라이 학살은 세상에 알려진다. “정부에 속고 사는 미국민들을 위해, 타락된 미국의 인간성과 도덕을 살리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이 이 미라이 학살을 세상에 토해 낸 허쉬 기자의 코멘트.
좀비들이 M16을 휘두르던 미라이에서 인간은 몇 명 더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작전을 지원 나온 헬기 조종사 휴 톰슨 준위. 그는 헬기를 조종하다가 좀비들의 광란을 목격하고 헬기를 착륙시키고 켈리 소위에게 달려간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겁니까, 소위님?” “명령받은 대로 내 일을 하고 있소.”
“무슨 명령이란 말이오?” “명령은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요.”
“저 사람들은 인간이야. 비무장한 민간인들이라고요 소위님,”
“톰슨. 이건 내 쇼야. 내 담당이라고. 신경 꺼.”
어쩔 수 없이 헬기로 돌아간 톰슨, 그러나 그는 계속 현장을 주시하던 중 가까스로 몸을 숨기고 있던 베트남 양민들이 좀비들의 손에 발견되는 것을 목격한다. 소총을 들이대려는 좀비들을 보면서 톰슨은 자신의 기관총 사수들에게 명령한다. “착륙한다. 내 명령에 불복하는 새끼들은 쏴 버려. 반복한다. 불복하면 쏴 버려.” 헬기는 마치 천사처럼 좀비들과 양민들 사이에 착륙했다. 기관총 사수들이 좀비들을 겨누는 가운데 톰슨 중위는 사격중지를 부르짖었고 그는 민간인 10여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을 병원으로 옮긴 뒤 본부로 돌아온 그는 책상을 치며 분노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야. 세상에 알려야 해!”
그러나 좀비들의 사회에서 인간은 왕따였다. 미라이 학살 사건이 알려지고 켈리 중위를 비롯한 혐의자들이 법정에 섰을 때 증인으로 나섰던 톰슨은 엄청난 왕따와 협박을 감수해야 했다. 그가 장교 클럽에 들어서면 장교들은 눈짓을 하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협박도 부지기수였고 무슨 마피아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현관에는 동물의 사체가 던져지기도 했다. 심지어 하원의 몇몇 의원은 “군법회의에 회부돼야 할 건 바로 당신”이라며 톰슨을 겁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톰슨은 버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야?”라고 분노하던 그 마음으로. 그가 베트남을 방문하여 자신이 살린 소녀를 만났을 때 아마도 그는 평생에 잘한 일로 자신의 기관총 사수들에게 명령하던 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내 명령에 불복하는 새끼들은 쏴 버려. 반복한다. 불복하면 쏴 버려.”
학살 책임자 켈리 중위(로 제대)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그나마 3년 뒤 닉슨의 특사로 풀려났다. 그 외에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백 명의 양민을 죽인 책임은 결국 누구도 제대로 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미국 정부는 휴 톰슨을 내세워 스스로의 죄의식을 던다. 톰슨과 당시 기관총 사수들에게 무공 훈장을 수여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미라이는 미군 역사상 최대의 치욕”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긴 했으나 그 치욕을 감당한 사람은 없었다.
지금도 성미 (미라이) 마을에 가면 학살 박물관이 서 있고 베트남전의 참상들이 전시돼 있다. 그런데 그 박물관에는 한국군의 사진이 딱 한 장 걸려 있다. 그 사진은 이렇게 표기돼 있다고 한다. “Korean mercenary"(한국인 용병) 그래 우리도 베트남에 갔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