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0년 3월 15일 꽃잎처럼 떨어져간 열 두 명
1960년 3.15 선거는 가히 부정선거의 집대성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부정투표법이 동원됐다. 대리투표, 공개투표, 정전시키고 투표함 바꿔치기(올빼미식), 투표용지 미리 채워두기, 야당 관리인 협박해서 내쫓기, 야당에 기표한 용지에 인주를 묻혀 무효로 만드는 피안호식 등 기상천외하고 어마무시한 부정선거가 전국적으로 자행됐다. 선거 분위기는 거짓말 조금 더 보탠 야바위판이었고, 손 대면 톡 하도 터질 듯한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형성됐다. 이때 먼저 들고 일어난 것은 ‘고딩’들이었다.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이 최초로 시위를 벌인 데 이어 3월 8일에서는 대전에서, 10일은 충주에서, 14일에는 부산의 8천여 고등학생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사람들의 괄괄한 성품으로 유명한 항구 마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3월 13일 간 크게도 파출소 앞에서 마산상고 학생 두 명이 시험 답안지 뒤에 “백만학도여 궐기하라” “자유당 때려부수자”고 적어 뿌리다가 체포된 것은 그 전초전에 불과했다. (이 답안지를 잘 기억해 두시라) 3월 15일 선거날 눈 뜨고 볼 수 없는 부정선거에 분노한 민주당 마산시당 청년들은 일찌감치 데모를 준비한다. “이기 어데 선거가. 콱 쎄리 문데삘라 마.”
그들은 오전 10시에 선거 포기를 선언한다. 그리고 표를 도둑맞은 것에 분노하는 시민들과 합세하여 시위대를 형성, 마산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마산 불종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 지프차 지붕에서 핸드마이크를 들고 해산을 종용하던 경찰서장 앞에 맹랑한 고등학생이 나타난다. 지프차를 꾸역꾸역 기어오르더니 마이크를 낚아챈 것이다. 뭐라고 구호를 외치려 했지만 분노한 경찰서장은 늑신하게 곤봉으로 이 학생을 두들겨 패 버렸다. 그러나 무자비한 폭력은 대개 분노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 직이겠다!” 시위대 역시 폭발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에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소방차는 물대포를 뿜었고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곤봉에는 인정이 없었다. 시위대도 자유당 마산당사, 서울신문 마산 지사 등을 불지르며 맞섰다. 해가 완전히 져 버린 어둠 속에서도 시위대가 수그러들지 않자 경찰은 마침내 실탄을 장전하고 사격을 개시한다. 탕 탕 탕. 카빈총소리가 날카롭게 마산의 밤하늘을 울렸고 시위대로 거리에 서 있던 생때같은 젊음들이 픽픽 쓰러져 가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한 명은 마산고등학교 1학년 13반 반장 김용실이었다. “마산 몽고아이스케키 집 아들이었고 키도 크고 잘생긴 야구부 포수” (친구 김건일 시인 증언)였던 그는 피를 뿜으며 병원에 실려 왔다.
그런데 간호사들이 뜻밖에도 그 소년을 알고 있었다. 1년쯤 전 무슨 일로인가 다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노인을 병원까지 업고 왔던 그 소년이 총알에 맞은 중상자로 병원에 실려 온 것이다. “용실이다. 총 맞은 사람이 용실이다.” 이때의 정황을 고은 시인은 <만인보>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 지난해 술 취한 노인/ 술 취해/ 피투성이가 된 노인을 업고/ 병원에 왔다/ 병원 간호부들이/ 업고 온 그 소년을 기억하고 있었다/…1년뒤/ 그 소년 김용실이/ 총 맞은 시체로 병원에 실려왔다/ 간호부들이 울었다/ 그 착한 용실이가/ 그 착한 용실이가/ `빨갱이'로 죽어서 왔어/ …서로 내동생 내 동생 하던/ 그 용실이가 죽어서 왔어…”
우째 이런 일이....간호사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더 황망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병원에 들이닥친 경찰들은 시신이 되어 실려 온 김용실 등의 호주머니에 ‘불온문서’를 집어넣고 그들이 빨갱이들이라고 우겼다. 협조(?)를 거부하는 병원장에게는 권총까지 들이밀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내세운 ‘불온문서’란 바로 이틀 전 마산상고 학생이 거리에서 뿌렸던 답안지였다. 그 답안지 뒤에는 뻘건 글씨로 인민공화국 만세가 쓰여져 있었고 피도 묻어 있었다. 그러나 머리에 총을 맞은 김용실의 뒷주머니에서 나온 답안지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이 이상했던 검사는 간호사들에게 물었다. 그때 간호사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그런 거 없었습니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고 하는 발뺌이 아니었다. 동생같이 듬직하던 한 소년의 죽음 앞에서, 서슬푸르다 못해 살기가 도는 경찰들 앞에서 간호사들은 또박또박 말한다. 검사는 곧 필체의 주인이 조서를 작성한 경찰관의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3.15 하면 으레 김주열의 최루탄 박힌 참혹한 모습만 떠오르지만 그날 시위에서 열 두 명이 죽었다. 네 살 개가해 버린 어머니의 집에서 나와 거리에서 생활하며 구두닦이로 열심히 살아가던 나이 스물의 오성원, 구공탄 장수 아버지를 도와 리어카를 밀면서 야간 중학교라도 가겠다며 밝게 웃던 김영호, 홀어머니 밑에서 근근히 고학하며 마산고등학교 졸업장을 거머쥔 지 며칠 안된 김영준, 중학교 졸업 후 무능력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방을 버리고 기계를 잡았던 전의규 모두가 새파랗던 너무도 새파랗던 청춘들이었다. 국립경찰은 그들을 쏘아 죽이고 그 호주머니 안에 불온문서(?)를 집어넣었고 누가 내 아들을 죽였느냐며 경찰서에 찾아온 엄마의 손에 쇠고랑을 채웠다. 고은의 만인보 중 김영호의 아버지 깁위술의 심경을 노래한 시.
나는 하루 150환을 버는 막일꾼이올시다
구공탄 배달하는 막일꾼이올시다
허위허위
비탈길 오르면
한겨울에도 내 몸에서 하얀 김이 한 소쿠리씩 피어납니다
나는 구공탄 친구올시다
나는 구공탄 쓰는
언덕배기 가난한 집들 친구올시다
내 자식놈은 야간학교 고학생이올시다
김영호올시다
구공탄 배달 김위술의 아들 김영호올시다
마산 남성동 파출소 찾아가
어는 놈이 내 자식 때려죽였느냐
어느 놈이 내 자식 죽였느냐고
부르짖는 내 마누라마저
수갑 채워 형무소 보낸 경찰이 대한민국 경찰이올시다
내 자식 총 맞은 뼈 그대로
땅에 묻었습니다
마누라는 콩밥 먹고 나왔습니다
정신 나가버렸습니다
나는 구공탄 리어카 끌고
오르막길 오르고
내리막길 내려갑니다
영호야
영호야
영호야
속으로 불러봅니다
소리내어 불러봅니다
오늘 빈 리어카하고 나하고 비탈길 굴러버렸습니다 엉엉 울었습니다
나는 자식 잃은 막일꾼이올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열 두 명의 이름
김영호(당 19세), 김용실(당 18세), 김주열(당 17세),
김영준(당 20세), 전의규(당 18세), 김영길(당 18세),
김효덕(당 19세), 김삼웅(당 19세), 오성원(당 20세),
김종술(당 17세), 김평도(당 39세), 강융기(당 20세).
1960년 3월 15일 꽃잎처럼 떨어져간 열 두 명
1960년 3.15 선거는 가히 부정선거의 집대성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부정투표법이 동원됐다. 대리투표, 공개투표, 정전시키고 투표함 바꿔치기(올빼미식), 투표용지 미리 채워두기, 야당 관리인 협박해서 내쫓기, 야당에 기표한 용지에 인주를 묻혀 무효로 만드는 피안호식 등 기상천외하고 어마무시한 부정선거가 전국적으로 자행됐다. 선거 분위기는 거짓말 조금 더 보탠 야바위판이었고, 손 대면 톡 하도 터질 듯한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형성됐다. 이때 먼저 들고 일어난 것은 ‘고딩’들이었다.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이 최초로 시위를 벌인 데 이어 3월 8일에서는 대전에서, 10일은 충주에서, 14일에는 부산의 8천여 고등학생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사람들의 괄괄한 성품으로 유명한 항구 마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3월 13일 간 크게도 파출소 앞에서 마산상고 학생 두 명이 시험 답안지 뒤에 “백만학도여 궐기하라” “자유당 때려부수자”고 적어 뿌리다가 체포된 것은 그 전초전에 불과했다. (이 답안지를 잘 기억해 두시라) 3월 15일 선거날 눈 뜨고 볼 수 없는 부정선거에 분노한 민주당 마산시당 청년들은 일찌감치 데모를 준비한다. “이기 어데 선거가. 콱 쎄리 문데삘라 마.”
그들은 오전 10시에 선거 포기를 선언한다. 그리고 표를 도둑맞은 것에 분노하는 시민들과 합세하여 시위대를 형성, 마산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마산 불종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 지프차 지붕에서 핸드마이크를 들고 해산을 종용하던 경찰서장 앞에 맹랑한 고등학생이 나타난다. 지프차를 꾸역꾸역 기어오르더니 마이크를 낚아챈 것이다. 뭐라고 구호를 외치려 했지만 분노한 경찰서장은 늑신하게 곤봉으로 이 학생을 두들겨 패 버렸다. 그러나 무자비한 폭력은 대개 분노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 직이겠다!” 시위대 역시 폭발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에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소방차는 물대포를 뿜었고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곤봉에는 인정이 없었다. 시위대도 자유당 마산당사, 서울신문 마산 지사 등을 불지르며 맞섰다. 해가 완전히 져 버린 어둠 속에서도 시위대가 수그러들지 않자 경찰은 마침내 실탄을 장전하고 사격을 개시한다. 탕 탕 탕. 카빈총소리가 날카롭게 마산의 밤하늘을 울렸고 시위대로 거리에 서 있던 생때같은 젊음들이 픽픽 쓰러져 가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한 명은 마산고등학교 1학년 13반 반장 김용실이었다. “마산 몽고아이스케키 집 아들이었고 키도 크고 잘생긴 야구부 포수” (친구 김건일 시인 증언)였던 그는 피를 뿜으며 병원에 실려 왔다.
그런데 간호사들이 뜻밖에도 그 소년을 알고 있었다. 1년쯤 전 무슨 일로인가 다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노인을 병원까지 업고 왔던 그 소년이 총알에 맞은 중상자로 병원에 실려 온 것이다. “용실이다. 총 맞은 사람이 용실이다.” 이때의 정황을 고은 시인은 <만인보>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 지난해 술 취한 노인/ 술 취해/ 피투성이가 된 노인을 업고/ 병원에 왔다/ 병원 간호부들이/ 업고 온 그 소년을 기억하고 있었다/…1년뒤/ 그 소년 김용실이/ 총 맞은 시체로 병원에 실려왔다/ 간호부들이 울었다/ 그 착한 용실이가/ 그 착한 용실이가/ `빨갱이'로 죽어서 왔어/ …서로 내동생 내 동생 하던/ 그 용실이가 죽어서 왔어…”
우째 이런 일이....간호사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더 황망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병원에 들이닥친 경찰들은 시신이 되어 실려 온 김용실 등의 호주머니에 ‘불온문서’를 집어넣고 그들이 빨갱이들이라고 우겼다. 협조(?)를 거부하는 병원장에게는 권총까지 들이밀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내세운 ‘불온문서’란 바로 이틀 전 마산상고 학생이 거리에서 뿌렸던 답안지였다. 그 답안지 뒤에는 뻘건 글씨로 인민공화국 만세가 쓰여져 있었고 피도 묻어 있었다. 그러나 머리에 총을 맞은 김용실의 뒷주머니에서 나온 답안지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이 이상했던 검사는 간호사들에게 물었다. 그때 간호사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그런 거 없었습니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고 하는 발뺌이 아니었다. 동생같이 듬직하던 한 소년의 죽음 앞에서, 서슬푸르다 못해 살기가 도는 경찰들 앞에서 간호사들은 또박또박 말한다. 검사는 곧 필체의 주인이 조서를 작성한 경찰관의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3.15 하면 으레 김주열의 최루탄 박힌 참혹한 모습만 떠오르지만 그날 시위에서 열 두 명이 죽었다. 네 살 개가해 버린 어머니의 집에서 나와 거리에서 생활하며 구두닦이로 열심히 살아가던 나이 스물의 오성원, 구공탄 장수 아버지를 도와 리어카를 밀면서 야간 중학교라도 가겠다며 밝게 웃던 김영호, 홀어머니 밑에서 근근히 고학하며 마산고등학교 졸업장을 거머쥔 지 며칠 안된 김영준, 중학교 졸업 후 무능력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방을 버리고 기계를 잡았던 전의규 모두가 새파랗던 너무도 새파랗던 청춘들이었다. 국립경찰은 그들을 쏘아 죽이고 그 호주머니 안에 불온문서(?)를 집어넣었고 누가 내 아들을 죽였느냐며 경찰서에 찾아온 엄마의 손에 쇠고랑을 채웠다. 고은의 만인보 중 김영호의 아버지 깁위술의 심경을 노래한 시.
나는 하루 150환을 버는 막일꾼이올시다
구공탄 배달하는 막일꾼이올시다
허위허위
비탈길 오르면
한겨울에도 내 몸에서 하얀 김이 한 소쿠리씩 피어납니다
나는 구공탄 친구올시다
나는 구공탄 쓰는
언덕배기 가난한 집들 친구올시다
내 자식놈은 야간학교 고학생이올시다
김영호올시다
구공탄 배달 김위술의 아들 김영호올시다
마산 남성동 파출소 찾아가
어는 놈이 내 자식 때려죽였느냐
어느 놈이 내 자식 죽였느냐고
부르짖는 내 마누라마저
수갑 채워 형무소 보낸 경찰이 대한민국 경찰이올시다
내 자식 총 맞은 뼈 그대로
땅에 묻었습니다
마누라는 콩밥 먹고 나왔습니다
정신 나가버렸습니다
나는 구공탄 리어카 끌고
오르막길 오르고
내리막길 내려갑니다
영호야
영호야
영호야
속으로 불러봅니다
소리내어 불러봅니다
오늘 빈 리어카하고 나하고 비탈길 굴러버렸습니다 엉엉 울었습니다
나는 자식 잃은 막일꾼이올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열 두 명의 이름
김영호(당 19세), 김용실(당 18세), 김주열(당 17세),
김영준(당 20세), 전의규(당 18세), 김영길(당 18세),
김효덕(당 19세), 김삼웅(당 19세), 오성원(당 20세),
김종술(당 17세), 김평도(당 39세), 강융기(당 2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