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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3.13 김마리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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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4년 3월 13일 김마리아 꿋꿋하게 죽다 

1919년 3.1 항쟁이 터지기 전의 전조(?)는 많았다. 그 가운데 우뚝 선 봉우리라면 역시 2.8 독립선언일 것이다. 일종의 ‘적의 심장부’라 할 일본 동경에서 일본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으니 일본 제국주의로서는 한 방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꼴이었다. 동경에서는 드물게 함박눈이 내리던 1919년 2월 8일 조선 유학생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두들겨 맞으며 연행됐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당 대표는 11명, 모두 남자였다. 이 사실에 입술을 깨물던 여자 유학생이 있었다. 조선 여자 유학생 친목회장이기도 했던 김마리아였다. 

그녀의 가문은 독립운동의 명가라 할 만했다. 숙부 김필순은 도산 안창호와 절친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과 두루 교유하던 사람이었고 그 영향으로 정신여학교 재학시절 김마리아는 항일의식을 뚜렷이 드러내는 글을 짓는 등 될성부른 떡잎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일찍이 기독교인이 됐던 부모처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란 그녀는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이끈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나와 일본의 압제를 물리치고 자주 독립을 이루기를 즐겨 기도했다고 한다.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연행됐으나 곧 풀려난 그녀는 이광수가 썼던 2.8 독립선언문을 옷 속에 감추고 꿰맨 채로 국내로 들어온다. 그 선언문을 들고 김마리아가 찾은 것은 천도교 본부였다. 3.1운동 천도교 대표 중 1인이며 후일 독립선언문의 인쇄를 맡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그녀를 이렇게 기억한다. “김마리아가 천도교 본부 및 보성사를 찾아와 동경 한국인 남녀학생의 구국열의 근황을 술회하고, 김마리아는 본국에서도 거국적인 운동을 향할 것을 힘써 권하였다. 나는 김마리아에게 우리들도 이미 계획 실천중이며 또 지난 1914년(갑인년) 이래 민중이 함께 일어나 일제의 질곡을 벗어나려고 암암리에 모색하여 왔다고 하니 김마리아는 천도교의 원대한 이념을 격려하며 기뻐하였다.” 김마리아는 스님들 보면 지옥 간다고 아우성치고 단군상 목이나 자르는 오늘날의 ‘개독교’와는 질적으로 다른 기독교인이었다. 

“조선 여자는 조선 사회에 적합하고 유용하도록 하며, 조선 사회에 헌신할 만하게 가르침이외다.” 라고 얘기했던 그녀는 조선 여성들이 남성들에 뒤지지 않고 조선 독립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대로 실천했다. 고향인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의 기운을 불어넣던 그녀는 3.1 항쟁이 터지자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고 역시 곧바로 체포됐다. 그녀는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받는다. “물과 고춧가루를 코에 넣고 가마에 말아서 때리고 머리를 못 쓰게 해야 이런 운동을 안 한다고 시멘트 바닥에 구둣발로 머리를 차고… ”(김마리아 자신의 회고) 그러나 김마리아는 지지 않았다. “너희들 할대로 해라. 그런들 나라 사랑하는 생명만은 빼앗지 못하리라.”

 6개월 동안 온갖 악형을 당한 후 석방된 뒤 그녀는 몸도 추스르지 않은 채 모교 교단에 선다. 일종의 위장이었다. 학교 교사를 한다는 것을 방패막이로 그녀는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지속적인 만세 운동을 주도했고 그러다가 1919년을 넘기지 못하고 또 체포된다. 또 한 번 횡액을 치르는 김마리아. 일본 검사의 기록을 훔쳐보면 이렇다. “김마리아는 여자로서 대학교까지 졸업하고 인격과 재질이 비범한 천재를 가졌음으로 그 대담한 태도와 거만한 모양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중, 더욱 가증한 것은 오연히 ‘나는 일본의 연호는 모르는 사람’이라 하면서 서력 일천구백 몇 년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의 눈에 일본제국이라는 것은 없고 일본의 신민이 아닌 비국민적 태도를 가진 것이다.” 호랑이를 능가하는 권세를 지닌 일본 검사 앞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그녀를 보면서 일본 검사는 탄복을 하고 만다. “너는 영웅이다. 너를 낳은 어머니는 더한 영웅이다.”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 박용옥저 중) 

이후 1921년 조선을 탈출하여 상해로 건너간 그녀는 거기서 임시정부 활동을 돕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못다한 공부에 매진한다. 그녀에게 있어 공부란 또 하나의 실천이요 조선의 아쉬움을 깨닫는 일이요, 그 부족함을 공유하고 함께 채우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조선에는) 입과 붓으로 일을 하되 실천궁행하는 이가 없는 듯합니다. 남들의(외국의) 살림살이를 보니 이상이 실현되어 있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여자는 남녀 동등, 여자 해방을 말함보다 실지로 남자와 같은 학식을 가졌으며, 같은 일을 합니다.” 

귀국을 하려 했으나 일제는 경성에 들어오지 말 것, 그리고 신학만 가르칠 것을 조선으로 귀국을 허가했다. 그녀가 터를 잡은 것은 원산의 마르타 신학교였다. 1933년 그녀가 귀국할 때 이광수는 이런 시를 써서 그녀를 찬미했다. 

누이야 네 가슴에 타오르는 그 사랑을 
뉘게다 주랴 하오?
네 앞에 손 내민 조선을 안아주오 
안아주오!
누이야 꽃 같이 곱고 힘 있고 깨끗한 몸을 
뉘게다 주랴 하오? 
뉘게다 주랴 하오? 
네 앞에 팔 벌린 조선에 안기시오
안기시오! 
누이야 청춘도 가고 사랑도 생명도 다 가는 인생이요 
아니 가는 것은 영원한 조선이니 
당신의 청춘과 사랑과 생명을 바치시오, 조선에!

자기는 청춘과 사랑과 생명을 엉뚱한 놈한테 바칠 태세를 갖추던 춘원 이광수의 영탄이 좀 어이없기는 하지만 안창호가 “그녀같은 사람 열 명만 있어도 조선은 독립됐다.”고 하던 김마리아는 돌아왔다. 그러나 가시밭길은 계속됐다. 그녀가 조선에 돌아온 뒤 보낸 10년은 일제의 광기가 극으로 치닫던 시절이었다. 만주사변은 이미 일어난 뒤였고 중국에 전쟁을 걸었고 급기야 미국의 진주만을 들이쳤다. 그 와중에 아예 조선민족을 없애버리겠다는 듯 민족말살정책은 극에 달했고 조선인들에게 자신들의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했다. 3.1운동의 주역이었던 기독교 지도자들도 거의 모두 손뼉 치고 고개 숙이는 신사 의식을 치렀고 과거 그의 동료들은 학병에 나가 대동아성전에 몸바치라 악을 써대고 있었다. 김마리아는 기독교인으로서, 또 조선 사람으로서 끝까지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1944년 3월 13일 그녀는 물고문 도중 이물질이 들어간 코 안에서 생긴 질병과 그 외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달라는 것. 수저 한 벌이 그녀의 유품의 전부였을만큼 세상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쉰 두 살 독신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평생 사모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빼놓지 못할 지운 김철수. 조선공산당의 핵심 멤버였고 해방 후에는 박헌영과 갈라서 여운형과 함께 했지만 여운형이 암살되자 모든 것을 버리고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던 지운 김철수가 그였다. 그는 김마리아를 몹시 사모했고 주위에서도 맺어주려고 애를 썼으나 김철수는 고향에 조강지처가 있음을 들어 거부했다. (이때는 고향의 처가 있건 말건 이른바 신여성과 교유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기) 

김철수는 벽에 두 명의 사진을 걸고 “용서하라”는 뜻의 ‘서호’(恕乎) 자를 써 붙여 놓고 보면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하나는 일생을 무장 독립 투쟁에 바치다가 옥사한 일송 김동삼. 그리고 김마리아였다. 배신과 변절, 복수와 살인의 추악한 파노라마가 펼쳐진 한국 현대사를 김철수는 이뤄지지 못한 사랑 김마리아를 바라보며 흘러보냈다. 누군가를 평생 사랑했지만 이루려고 하지 않았고, 또한 잊지도 않았으며, 그로 인해 끊임없이 자극받았던 김철수, 그리고 그가 평생 지켜본 김마리아. 김마리아는 죽어서나 행복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김철수에게도 공감이 간다. 그런 사랑도 괜찮고 가능하구나 싶어서. 

1944년 3월 13일 해방을 한 해 앞두고 김마리아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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