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러넣기 산하의 오역
1918년 3월 8일 스페인 독감의 시작
1918년 3월 8일 미국 캔사스 주 퍽스톤 기지의 병원에서 인플루엔자 환자가 발생했다. “3일 열병”이라 할 정도로 고열과 몸살을 3일 정도 앓은 뒤 낫긴 하지만 꽤 오랜 후유증이 있었다. 하지만 전염성은 대단했다. 3일 뒤 3월 11일에는 미 육군 기지에서 100명이 넘는 인플루엔자 환자가 보고됐다.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긴 해도 죽을 병은 아니어서 웬만하면 툴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들이 보내져야 할 곳으로 보내졌다. 그 군인들의 발걸음을 따라서 인류 역사 최고의 전염병이 될 ‘스페인 독감’이 그 죽음의 촉수를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 해 봄 스페인에는 독감이 대유행했다. 국왕 알폰소 13세부터 수백만이 독감에 걸려 관공서가 마비되고 전차가 설 정도였다. 프랑스에서도 그랬고 프랑스와 사생결단을 내고 있던 독일에서도, 그와 맞붙은 영국군 내에서도 인플루엔자 환자가 무더기로 나왔다. 군 작전에 차질을 줄 정도였다. “연대를 어디어디에 투입하라!”고 명령하고 병력 현황 보고를 받으니 “총원 5천 사고 3천 사고명 독감으로 후송, 현재원 2천” 이런 보고가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 스페인으로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었다. 전 유럽에서 유행했는데 왜 스페인 독감이란 말인가. 그건 스페인이 참전국이 아니었기에 보도관제가 없어 대규모 전염병에 대한 보도가 잇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감은 여름이 되면서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스페인 독감은 성가신 바이러스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괴물로 변신하고 있었다. 8월경 프랑스의 브레스트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인플루엔자 환자가 재발했을 때 스페인 독감은 공식적으로 첫 살인자가 된다. 그리고 이 소리 없는 살인자는 군대의 이동과 사람들의 여행과 이주에 따라 전 세계로 퍼졌다. 그 뒤의 참상은 가히 지옥이었다.
“흑인인지 백인인지 구별 안될 정도로 얼굴이 시커멓게 된 채” 죽어간 시신을 둘 곳이 없어 길거리에 쌓아둬야 했고, 동료가 기침을 한다는 신고를 받고 보건성 직원이 출동해 보니 룸메이트 4명이 죄다 죽어 있더라는 일화는 얘깃거리에도 못들었다. 인도에서는 웬만한 나라의 인구에 해당한다 할 사람들이 죽었고 북극 가까운 에스키모 마을들은 여럿이 전멸했으며 태평양상의 사모아 섬에서는 90퍼센트의 인구가 감염되어 그 중 30퍼센트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다. 사망자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최소 2천만, 많게는 1억명까지 잡기도 한다.
일제 강점 하의 조선도 다르지 않았다. 무오년 독감이 그것이다. 육십갑자상 무오년은 기미년의 전 해이니 기미독립선언이 있던 바로 전 해, 1918년에 조선 전역은 “무오년 독감”으로 기록된 독감에 7백만여 명이 감염됐고 14만 명이 죽어 나갔다. 물론 조선 총독부의 통계이니 사망자는 더 될 것이다. “경성에서 독감(毒感)으로 사망한 사람이 268명인데 그중에서 조선 사람이 119명이다.”(매일신보 11월12일자) “서산 1군에만 8만명의 독감 환자가 있고, 예산·홍성서도 야단이다. 감기로 사망한 사람이 2000명이나 된다.”(매일신보 12월3일자) 이 병의 유행으로 들판에 곡식이 여물어도 거둘 사람이 없을 지경이라 했고 쌀값은 폭등했다. 인심은 흉흉해졌고 가뜩이나 일본인들의 횡포에 배가 아프던 조선인들에게 굶주림까지 이어지면서 일제에 대한 분노가 무르익어갔으니 이 또한 3.1운동의 또 다른 배경 중 하나다.
하지만 인류는 그 당시 이 인류 역사 첫째 아니면 둘째를 다툴 살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전자 현미경이 발견되기 전이었으므로 페스트나 콜렐라같은 굵직굵직한 세균들의 멱살은 잡을 수 있었지만 바이러스는 그 존재조차 알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951년 캐나다의 한 의사가 동토의 얼음 위에서 죽어간 한 에스키모 여인의 허파에서 바이러스 조직을 떼 냈다. 냉동 상태로 죽어서 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도 굳어버린 조직. 하지만 그는 바이러스 추출에 실패했다. 그로부터 47년 뒤 그는 스페인 독감을 연구하던 미군 병리학 연구소 타우펜버그 박사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여자의 허파 조직을 구할 수 있소.” 타우펜버그 박사는 그 조직을 받아 연구를 거듭한 끝에 2005년 10월 마침내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발견을 발표한다.
냉동상태에서 재생된 바이러스의 위력은 여전했다. 쥐 정도는 우습게 죽였고 원숭이도 죽였다. 인수공통(人獸共通) 전염병으로 얼마전 유행한 조류독감과 비슷한 형태였던 이 바이러스의 부활 앞에서 어떤 과학자들은 환호했지만 어떤 과학자는 이렇게 반대했다. “그렇게 커다란 위험부담을 안고도 바이러스 부활에 나서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일이다. 정히 필요하다면 다른 방법으로 연구할 수도 있는데.” (리처드 에브라이트) 그 위험성에 대해서는 각고의 노력 끝에 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을 재구성하는데 성공한 타우펜버그 박사의 말을 빌리면 된다. “내가 발견한 바이러스는 조류독감 바이러스와 아주 비슷합니다. 이제 인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자연에서 과연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았으며, 이러한 경우 자연은 아주 무서운 테러리스트입니다.”
한 시대 인류의 태반을 감염시키고 억 단위의 인구를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공포의 바이러스는 21세기에 부활하여 현재 미군이 관할하는 어느 연구소엔가 깊숙이 보관되어 있다. 그 바이러스는 연속적으로 변이하여 인류를 기습하는 변종에 저항하는 항생제나 백신의 원료가 될 수도 있지만 인류의 생존에 위협을 줄 흉기가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미국이 그렇게 감추려고 했던 핵 관련 비밀들이 스리슬쩍 소련으로 흘러갔던 일을 떠올리면 그 바이러스가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노출될지 모른지 않는가. 실제로 한때 우리를 경악시켰던 사스 바이러스도 유출됐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있는데.... 아니할말로 미국 정부조차 요긴하게 그 바이러스를 공격 무기로 써먹는 수법을 개발하고 있는지는 또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두고 보면 타우펜버그 박사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자연은 인간을 공격하기는 하지만 의도한 테러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테러리스트가 될 수 없으니까. 결국 테러리스트는 인간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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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3월 8일 스페인 독감의 시작
1918년 3월 8일 미국 캔사스 주 퍽스톤 기지의 병원에서 인플루엔자 환자가 발생했다. “3일 열병”이라 할 정도로 고열과 몸살을 3일 정도 앓은 뒤 낫긴 하지만 꽤 오랜 후유증이 있었다. 하지만 전염성은 대단했다. 3일 뒤 3월 11일에는 미 육군 기지에서 100명이 넘는 인플루엔자 환자가 보고됐다.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긴 해도 죽을 병은 아니어서 웬만하면 툴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들이 보내져야 할 곳으로 보내졌다. 그 군인들의 발걸음을 따라서 인류 역사 최고의 전염병이 될 ‘스페인 독감’이 그 죽음의 촉수를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 해 봄 스페인에는 독감이 대유행했다. 국왕 알폰소 13세부터 수백만이 독감에 걸려 관공서가 마비되고 전차가 설 정도였다. 프랑스에서도 그랬고 프랑스와 사생결단을 내고 있던 독일에서도, 그와 맞붙은 영국군 내에서도 인플루엔자 환자가 무더기로 나왔다. 군 작전에 차질을 줄 정도였다. “연대를 어디어디에 투입하라!”고 명령하고 병력 현황 보고를 받으니 “총원 5천 사고 3천 사고명 독감으로 후송, 현재원 2천” 이런 보고가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 스페인으로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었다. 전 유럽에서 유행했는데 왜 스페인 독감이란 말인가. 그건 스페인이 참전국이 아니었기에 보도관제가 없어 대규모 전염병에 대한 보도가 잇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감은 여름이 되면서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스페인 독감은 성가신 바이러스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괴물로 변신하고 있었다. 8월경 프랑스의 브레스트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인플루엔자 환자가 재발했을 때 스페인 독감은 공식적으로 첫 살인자가 된다. 그리고 이 소리 없는 살인자는 군대의 이동과 사람들의 여행과 이주에 따라 전 세계로 퍼졌다. 그 뒤의 참상은 가히 지옥이었다.
“흑인인지 백인인지 구별 안될 정도로 얼굴이 시커멓게 된 채” 죽어간 시신을 둘 곳이 없어 길거리에 쌓아둬야 했고, 동료가 기침을 한다는 신고를 받고 보건성 직원이 출동해 보니 룸메이트 4명이 죄다 죽어 있더라는 일화는 얘깃거리에도 못들었다. 인도에서는 웬만한 나라의 인구에 해당한다 할 사람들이 죽었고 북극 가까운 에스키모 마을들은 여럿이 전멸했으며 태평양상의 사모아 섬에서는 90퍼센트의 인구가 감염되어 그 중 30퍼센트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다. 사망자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최소 2천만, 많게는 1억명까지 잡기도 한다.
일제 강점 하의 조선도 다르지 않았다. 무오년 독감이 그것이다. 육십갑자상 무오년은 기미년의 전 해이니 기미독립선언이 있던 바로 전 해, 1918년에 조선 전역은 “무오년 독감”으로 기록된 독감에 7백만여 명이 감염됐고 14만 명이 죽어 나갔다. 물론 조선 총독부의 통계이니 사망자는 더 될 것이다. “경성에서 독감(毒感)으로 사망한 사람이 268명인데 그중에서 조선 사람이 119명이다.”(매일신보 11월12일자) “서산 1군에만 8만명의 독감 환자가 있고, 예산·홍성서도 야단이다. 감기로 사망한 사람이 2000명이나 된다.”(매일신보 12월3일자) 이 병의 유행으로 들판에 곡식이 여물어도 거둘 사람이 없을 지경이라 했고 쌀값은 폭등했다. 인심은 흉흉해졌고 가뜩이나 일본인들의 횡포에 배가 아프던 조선인들에게 굶주림까지 이어지면서 일제에 대한 분노가 무르익어갔으니 이 또한 3.1운동의 또 다른 배경 중 하나다.
하지만 인류는 그 당시 이 인류 역사 첫째 아니면 둘째를 다툴 살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전자 현미경이 발견되기 전이었으므로 페스트나 콜렐라같은 굵직굵직한 세균들의 멱살은 잡을 수 있었지만 바이러스는 그 존재조차 알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951년 캐나다의 한 의사가 동토의 얼음 위에서 죽어간 한 에스키모 여인의 허파에서 바이러스 조직을 떼 냈다. 냉동 상태로 죽어서 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도 굳어버린 조직. 하지만 그는 바이러스 추출에 실패했다. 그로부터 47년 뒤 그는 스페인 독감을 연구하던 미군 병리학 연구소 타우펜버그 박사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여자의 허파 조직을 구할 수 있소.” 타우펜버그 박사는 그 조직을 받아 연구를 거듭한 끝에 2005년 10월 마침내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발견을 발표한다.
냉동상태에서 재생된 바이러스의 위력은 여전했다. 쥐 정도는 우습게 죽였고 원숭이도 죽였다. 인수공통(人獸共通) 전염병으로 얼마전 유행한 조류독감과 비슷한 형태였던 이 바이러스의 부활 앞에서 어떤 과학자들은 환호했지만 어떤 과학자는 이렇게 반대했다. “그렇게 커다란 위험부담을 안고도 바이러스 부활에 나서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일이다. 정히 필요하다면 다른 방법으로 연구할 수도 있는데.” (리처드 에브라이트) 그 위험성에 대해서는 각고의 노력 끝에 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을 재구성하는데 성공한 타우펜버그 박사의 말을 빌리면 된다. “내가 발견한 바이러스는 조류독감 바이러스와 아주 비슷합니다. 이제 인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자연에서 과연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았으며, 이러한 경우 자연은 아주 무서운 테러리스트입니다.”
한 시대 인류의 태반을 감염시키고 억 단위의 인구를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공포의 바이러스는 21세기에 부활하여 현재 미군이 관할하는 어느 연구소엔가 깊숙이 보관되어 있다. 그 바이러스는 연속적으로 변이하여 인류를 기습하는 변종에 저항하는 항생제나 백신의 원료가 될 수도 있지만 인류의 생존에 위협을 줄 흉기가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미국이 그렇게 감추려고 했던 핵 관련 비밀들이 스리슬쩍 소련으로 흘러갔던 일을 떠올리면 그 바이러스가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노출될지 모른지 않는가. 실제로 한때 우리를 경악시켰던 사스 바이러스도 유출됐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있는데.... 아니할말로 미국 정부조차 요긴하게 그 바이러스를 공격 무기로 써먹는 수법을 개발하고 있는지는 또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두고 보면 타우펜버그 박사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자연은 인간을 공격하기는 하지만 의도한 테러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테러리스트가 될 수 없으니까. 결국 테러리스트는 인간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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