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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2.18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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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 18일 “7인의 여포로” 사건


...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한국 전쟁 영화 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액션배우 장동휘, 배우 최민수의 아버지 최무룡, 젊은 날의 구봉서 등등이 출연했던 이 영화는 당시의 특수 효과 수준으로서는 놀랄 만큼의 사실적인 전투신으로 화제가 됐다. 그 비결은 ‘실탄’이었다. 모의 총기를 구하는 것보다 국방부의 협조를 얻어 실탄을 쏘아 대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기도 했거니와 6.25 참전 용사 출신의 이만희 감독은 과감하게 실탄 사격을 주문하여 배우들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역시 실제 폭탄을 사용한 폭발 장면에서는 엑스트라의 다리 하나가 날아가서 논 7마지기로 보상하는 일도 있었다.

판에 박힌 반공영화가 판을 칠 때기는 했지만 천재 감독 이만희 감독의 영화는 달랐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역시 반공영화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영화 속에는 반공 뿐 아니라 전쟁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분대장 장동휘의 대사를 빌려서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이 전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이 죽음의 현장을 증언하고 인간에게 전쟁이 꼭 필요한지 물어보라!"


즉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류의 반공 영화와는 사뭇 달라도 많이 달랐다. 이런 독특한 (?)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만희 감독은 대종상과 청룡영화제상을 휩쓰는 개가를 이루지만, 2년 뒤 그 ‘독특한’ 색깔이 담긴 영화 때문에 된서리를 맞는다.


문제의 영화는 <7인의 여포로>였다. 대략의 줄거리만 설명하자면 인민군의 포로가 된 7인의 여포로를 중공군이 성폭행하려들자 이를 제지하던 인민군 장교가 그들을 쏘아 죽이고, 이 때문에 북한에 머물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 자유의 품으로’ 귀순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감독의 혐의는 “괴뢰군을 너무 멋있게 그렸다.”는 것이었다.


1964년 12월 18일 서울지검공안부는 영화 '7인의 여포로'가 "감상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군을 무기력한 군대로 내건 반면, 북괴의 인민군을 찬양하고 미군에게 학대받는 양공주들의 비참상을 가장묘사, 미군철수 등 외세배격 풍조를 고취하였다"는 혐의로 입건한다. 유명한 “7인의 여포로” 사건이다. 전쟁 끝난 지 1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검찰의 논고는 킥킥거리다가 종국에는 폭소를 터뜨리게 만든다.

“공산계열인 북괴와 중공은 공산주의 이념이 동일하고 대한민국을 침해함으로써 상호간 무력충돌을 몽상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이 여군들을 겁탈하려는 것을 괴뢰군 수색대장으로 하여금 제지케하여 (중공군을 인민군이 막는다는 자체가 하면 안되는 설정이란 말이얏!) 위안부로 하여금 "장교님의 행위는 훌륭했어요' 라는 등 칭찬하게 한 것 (세상에 괴뢰군 장교를 이렇게 멋있게 그리다닛!)은 결과적으로 반 국가단체의 국가활동을 고무, 동조, 찬양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때도 사법고시 보고 검사들이 되었을 터인데 과연 이 논고를 쓰면서 담당 검사는 비장했을까. 슬펐을까 아니면 스스로 우스웠을까.

영화는 거의 1/3이 들어내진 누더기가 되어 <돌아온 여군>이라는 엉뚱한 제목으로 개봉됐지만 그것은 이미 이만희 감독의 영화가 아니었고 줄거리도 메시지도 엉거주춤한 졸작이 되어 관객들의 호응을 받지도 못했다. 극작가 한우정과 감독 이만희는 이 참담한 꼴을 당한 뒤 색다른 의기투합을 한다. “ 야 이거 골치 아프니까, 진짜 반공 영화가 어떤 건지 한 번 보여 주자.”

 그래서 만든 영화가 <군번없는 용사> (1966)였는데 누가 뭐래도 흑과 백이 선연하고 악마와 천사의 대립구도 명백한 이 영화에도 엉뚱한 시비가 걸렸다. 서슬푸른 중앙정보부가 또 이만희 감독을 호출한 것이다. “인민군 장교가 너무 멋있게 그려졌잖아!” 그도 그럴 것이 그 배역을 맡은 것은 당대의 미남 배우 신성일이었다. 이때 이만희 감독이 했다는 변명이 얼마전 신성일의 자전 수기에 등장했다. “신성일이 (인민군 군복을) 입고 있으니 그렇게 멋있지, 다른 사람이면 그렇게 멋있었겠습니까?” 참 서글픈 변명이요, 처량한 시대였다.

옛날 얘기라고 웃어넘기기에는 오늘날의 우리 모습도 그렇게 우아하지는 못하다. 오늘 아침 신문에는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법정 소송 승리 기사가 실렸다. 6.25 당시 태극단 등 우익 단체들과 고양 경찰서는 좌익이라면 어린 아이들까지 끌고 가서 죄다 학살해 버리는 전쟁 범죄를 저질렀고, 그 참담한 현장이 90년대 중반에서야 공개됐지만, 우익 단체는 지금도 그것이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하며 추모 사업을 방해하고, 그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여 왔던 것이다. “어리다고 빨갱이가 아니란 법은 없었다.” (내가 우연히 마주쳤던 ‘태극단’ 노인의 말) 유족들의 대표는 친척의 도움으로 장독대에 숨어 우익의 죽창을 면했던 소년을 남편으로 맞이한, 피해자의 며느리들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끔찍했던 역사적 비극과 상처를 다음 세대로 넘기지 말고 우리 대에서 끝내자는 심정으로 20년 동안 죽기살기로 매달렸습니다

1964년 12월 18일 발군의 영화감독 이만희의 어깨를 틀어쥐었던 반공법, “괴뢰군을 인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치도곤을 들이댔던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님을 새삼 깨닫는 것은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다. 30여년 전 그런 일이 있었더랬다,. 그리고 오늘도 이런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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