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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2.19 본회퍼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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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4년 12월 19일 본회퍼의 기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겨울. 독일군은 이미 동서 양편에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하고 있었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파리를 해방시키고 독일 영토를 목전에 두고 있었고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은 폴란드 국경까지 육박해 왔다. 그 가운데 12월 19일 테겔의 군 형무소 안에 갇혀 있던 한 죄수는 열심히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디트리히 본회퍼. 그는 어머니의 70회 생신에 보내는 축하 메시지이자 1주일 남은 성탄을 기리고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는 축시를 쓰고 있었다.

하나님의 선한 능력에 안전하고 고요히 감싸여
놀라운 보호와 위로를 받으며
이 마지막 날들을 여러분과 같이 지내며
함께 새해를 맞이하기 원합니다.

감옥에 갇힌지 이미 20개월에 가까웠다. 그가 체포된 것은 그 매형 도나니가 14명의 유태인들을 스위스로 피신시켜 준 것이 드러나고 이어 사무실 수색 과정에서 반나치 조직 활동에 관한 문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히틀러가 반유태주의를 표방하며 정권을 잡았을 때부터 그에 반대했다.
“교회는 바퀴에 깔린 희생자들에게 반창고나 붙이는 일에 만족하지 말고, 바퀴 자체의 바퀴살을 틀어막아야 합니다.” 아직은 밝혀지기 전이었지만 그는 이미 히틀러 암살 음모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지난날의 무거운 짐이
아직도 우리들을 억압하고 있지만
오, 주여. 놀란 우리들의 영혼에
당신이 예비하신 구원을 주소서!

8남매를 낳은 본회퍼의 어머니의 70회 생일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일찌감치 1차 세계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한 아들 말고도 두 아들과 두 사위가 감옥에 있었고, 더구나 아들 디트리히 본회퍼는 약혼한지 3개월만에 끌려간 판국이었다. 의사의 아내로, 귀족 가문의 딸로 안온하게 자라고 지내왔던 그 어머니의 일생에서 1944년 겨울은 못견디게 추운 날이었다. 본회퍼는 그렇게 어머니를 위로했다.

당신은 우리에게 힘겹고 쓰디쓴 고난의 잔을 내미십니다
목까지 가득찬 고난의 잔을.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선하신 사랑의 손으로부터
떨림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그 잔을 받습니다.

본회퍼는 “아리아인만이 교회를 맡을 수 있다”는 법령이 포고되었을 때 그는 이것이 인종차별이라고 비판하면서 정부가 권유하는 교회 목사직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고백교회’를 설립하여 나치에 협력하는 독일 기독교에 대항했는데 1937년 게슈타포는 고백교회를 위한 지하 신학교를 폐쇄하고 목사들을 체포했다. 이 일제검거에서 벗어난 본회퍼는 각처에서 비밀 목회를 하고 있는 신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신학교육을 계속했다. 전쟁이 코앞에 닥치고 독일 전체가 전시 체제로 변하자 평화주의자로서 군복무를 할 수도, 나치에 충성할 수도 없었던 본회퍼는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그는 미국 땅을 밟자마자 그를 초청한 라인홀트 니버에게 편지를 남기고 독일로 U턴한다. “미국에 오기로 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저는 독일 국민들과 함께 독일 역사상 지난한 시기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에게 이 세상을
그리고 태양의 빛을 즐거워하는 마음을 또 한번 주신다면
우리는 지나간 해를 돌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온전히 당신께 속할 것입니다.

오늘밤 이 촛불이 따뜻하고 밝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이 이 어두운 세상에 선물로 주신 촟불이
우리를 다시 한번 모이게 하소서.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빛이 어두움 속에서 빛나도 있다는 것을.

수천만 독일인이 하일 히틀러를 부르짖고 그 연설에 도취하여 눈물을 흘리고, 맹렬한 인종적 분노에 사로잡혀 유태인을 공격하고 집시들을 쓸어내고 슬라브인들을 학살하는 가해자가 되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본회퍼는 촛불처럼 빛났다. 그리고 그 빛들은 초에서 초로 옮겨지듯 점점이 늘어나며 독일의 어둠을 밝혔다. 여기에는 그의 매형도 있었고 매제도 있었으며, ‘작전명 발퀴레’의 슈타우펜베르크도 있었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의 주인공들도 있었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두 가지 존재방식에 의해서만 성립된다. 기도와 인간 , 그 사이에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깊은 고요가 이제 우리를 감싸게 될때
우리들 주위로부터 보이지 않게 퍼져나가는
세상의 그 커다란 울림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모든 자녀들의 높은 찬송의 소리를.

본회퍼는 나찌 치하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이렇게 정의했다. “미친 운전기사가 버스를 몰고 있을 때, 기독교인의 본분은 그 버스에 치어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 주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운전기사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슨 버스를 타고 있을까. 미치지는 않았다 해도 술이나 잠에 취한 것은 분명한 우리의 운전자를 위하여 무슨 행동을 해 줘야 할까. 본회퍼는 미친 운전기사를 끌어내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목숨을 잃는다. “50년 의사 생활 동안 그처럼 신의 뜻을 기꺼이 따르며 죽어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교수형 당시 입회한 의사의 말이었다.
 
선한 능력에 포근하게 감싸져서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두려워않고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밤낮으로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새로 맞이할 해의 하루 하루를.

1944년 12월 19일 디트리히 본 회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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