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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2.17 김대중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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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7년 12월 17일 김대중 당선!

요즘 예전에 쓴 글을 갖다붙이는 횟수가 늘었다. 첫째 술자리가 많아서고, 둘째 이 날은 그 사건을 빼놓고 넘기는 것이 아쉽기 때문이다. 오늘도 둘 다의 이유다. 14년 전, 이 날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97년 12월 나는 막 입봉한 새끼 PD로 AD들을 닥달하며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AD는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두 명이었고 여자 PD 후배 하나 , 그리고 팀장 하나가 팀을 구성하고 있었다. 팀의 지역 안배(?)를 살펴 보자면 나는 부산에서 초중고를 나온 처지였고, 동료 여자 PD는 서울, 나머지 셋은 전라도 출신들이었다. 이렇게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해가 출신 지역(?)이 무지하게 중요했던 해이기 때문이다.


97년 제 15대 대통령 선거가 그야말로 불꽃 튀기며 전개되던 무렵, 토박이 서울내기인 동료 여자 PD가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서 "선배! 선배! 코미디야 코미디!"라고 나를 자리에 앉혔다. 지금은 PD 때려치우고 사법고시 봐서 판사 하고 있는, 평소 차분한 성격의 여자 후배였기 때문에 나 스스로 자리에 앉아서 무슨 말인지 캐물었던 기억이 난다.

"부장님이 갑자기 날 부르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너 이번에 누구 찍을 거니? 묻는 거야.. 그래서 아직 몰라요 그랬더니...."

"푸하 김대중 찍으래? "

"그건 당연한 얘기고.... 그 양반이 진짜 웃기는 게....... 지난 87년 92년 때.. 미국 유학가 있었잖아? 그때 대선에 김대중씨 떨어졌을 때 삶의 의욕이 다 없어서 며칠을 굶었었다고. 이번에는 김대중 돼야 한다고, 꼭 찍으래. 떨어지면 팀 분위기 한동안 안좋을 거라고 협박 비슷하게까지 하네?"

"푸하하하하.... 삶의 의욕?"

웃음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와 내가 아는 부장님은 '정치'와는 담을 쌓은 분이었는데 그런 양반이 DJ의 낙선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었다는 말이 짚신 쓰고 양복 입은 듯, 넥타이 매고 츄리닝 입은 듯 어울리지 않는 코멘트였던 것이다. 이 코미디(?)는 삽시간에 회사에 퍼졌고 호남 출신 부장님의 열성적 김대중 지지는 타 지역 출신의 사람들에게 '전라도 몰표.. 웃기는 전라도'를 상기시키는 결과만 낳고 만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날 전라도 출신의 AD가 어디서 들었는지 그 얘기를 불쑥 끄집어냈다. 그 얘기를 하며 내가 키들키들 웃으니까 이 자식 별안간 심각하게 목소리를 까는 게 아닌가.

"선배님..... 전 부장님 이해해요."


그 기간 동안 사내에서, 또 어떤 자리에서든 전라도 사람과 정치적 얘기를 하는 것은 피차 피하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분위기 파악 못하는 부장님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호남 출신들이 말을 아끼고 있었다는 편이 옳다. 몇 번을 태워먹다가 이제야 근근히 김을 피워 올리며 될 것 같은 밥에 코 빠뜨리기 싫어서였을까.

"어? 응... 그래 나도 이해해." 이러면서 대충 넘기는데 후배는 단호하게 오금을 박았다.

"선배님은 이해 못해요. 절대로 못해요."


평소에 '송아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순하고 고분고분하며 아무리 힘든 일을 당해도 싫은 소리 한 번 안하던 후배였다. 선배한테 좀 개길 줄도 알아야 하느니라 하고 충고할만큼 온순한 녀석이 선배의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무안을 주며 쐐기를 박다니. 놀라움 1/3 미안한 1/3 얄미움 1/3의 비율의 감정이 머리 믹서 속에서 갈아지고 있었다. 못하긴 뭘 못해 임마? 하고 내지르려다가 참았다. 그래...... 내가 부장님 얘기를 하며 다른 사람들과 키들거릴 때 너 가슴 아팠겠구나. 미안하다.......



방송에 공일이 없는 것처럼, 방송 제작하는 사람들도 휴일이 따로 없다. 1997년 12월 17일. IMF라는 전대미문의 국난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가고, 모든 정당의 후보자가 발음도 제대로 안되는 캉드쉬인지 뭐시깽이인지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했던 그 불운한 해의 대통령 선거날도 촬영 일정은 어김없이 잡혀 있었다.

어떤 사람의 하루를 팔로우해야 하는 것인데 그 사람은 날을 거르지 않고 워커힐 앞길을 조깅으로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융통성을 발휘하자면 뭐 런닝머신으로 대신하거나 그거 편집에서 뺄 생각하고 안찍으면 그만이지만, 입봉 몇 달째의 열기 충만 의욕 과잉의 PD가 그럴 수는 없었다. 아침 8시까지 워커힐로 가야 하니까 여기서 7시 출발 오케이? 이렇게 일정을 짜고 있는데 녀석이 강력한 백태클을 걸어 왔다.


"1 시간만 미루죠."
"야 조깅하는 것부터 찍어야 돼 임마."
"조금 늦게 뛰라면 되잖아요."

이쯤 되면 도발이다. 선배의 위상과 PD의 권위를 위해서 가만히 있으면 안되는 타이밍이다. 그러나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하는 법, 터져나오는 "니가 PD해라 쓰댕아"를 악착같이 억누르면서 마지막 인내의 질문을 던져 봤다. "왜?"

"저 집 멀잖아요. 투표하고 오려고요."

그때 그 친구 표정에는 진짜로 안그러면 촬영 펑크를 내겠다고 낸다는 기세가 인쇄체 대문자로 쓰여 있었다. 국민의 권리인 참정권을 행사하겠다는데 이걸 내가 저지한다면 나는 위헌 국사범으로 전락할 판이었다. 결국 출연자는 그날만 9시 30분에 조깅을 해야 했다.

그날의 아이템은 성공한 여성 기업인이었다. 한 100평 쯤 되는 으리으리한 아파트에서 촬영을 진행하다가 잠깐 짬이 났을 때 그 출연자가 나에게 느닷없는 질문을 해 왔다.

" 김 PD, 오늘 우리 편(??)이 되겠죠?"
"예?"


나는 며칠 전 그녀를 처음 만난 지 10초가 지난 뒤에 그 여자분이 경상도 그것도 대구출신인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또 대한민국 사람들 흔히 하는 인사법대로 학교는 어디 나오고 등등의 질문을 받다 보니 그분도 내 출신지를 알게 되었고 말이다. 정치적 지향과 입장에 대해 토론한 적은 전연 기억에 없으니, 그 분의 '우리 편'이란 표현은 오로지 지역적 근거로부터만 산출된 결과였다. 아무렴 우리 편이 권영길이었겠는가. 김대중이었겠는가.

촬영 때문에 동네 1호로 기표소에 가서 김대중 이름 밑에 붓두껍 찍고 나온 처지지만 출연자한테 "난 우리 편 아닌데요." 그럴 수는 없어서 "예... 그렇겠죠?"라고 얼버무리는데 이 여자분 용기를 얻었는지 말이 많아졌다. 김대중은 불안하다는 둥... 그래도 안정이 제일이라는 둥...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라도 사람들 김대중 되면 독하게 해 먹을 거라는 둥...... 아니 이 아주머니야. 내가 당신편이라고 해도 그렇지, 여기 사람이 지금 몇 명이 있는데.......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촬영 스탭 중에는 전라도가 없었다. 못들은척 혼자서 묵묵히 벽에다 시선을 고착하고 있던 AD 녀석을 제외하고는.

촬영 끝나고 나오면서 괜히 미안한 마음에 (내가 왜 미안하지?) "야 기분 나빠하지 마." 하고 어깨를 두들겼더니 선선한, 그러나 조금 가슴이 아리는 답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아마 저 사장님도 제가 전라도인 줄 알았으면 그 얘기 절대 안했을 걸요. 회사에서도 많이 경험했어요. 제가 들어오면 말 뚝 끊기는 어색한 분위기.... 괜찮아요. "
"......."


촬영 끝나고 들어와서 테잎 챙기는데 AD 년놈들이 어디 가서 처박혔는지 보이질 않는다. 어떤 멘트로 혼을 낼까 궁기를 하며 두리번거리는데 AD 두 명이 TV 앞에 못박혀 서 있는게 눈에 들어왔어. 그래 부아가 치밀어 "야!!!" 소리를 질렀는데 두 명이 동시에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러더니 내 손을 잡고는 나지막하지만 소리를 지르는 듯... 옛날옛적 국어 교과서의 표현을 빌리면 '소리없는 아우성'을 토해 냈다.


"선배님. 이겨요 김대중이 이겨요."

고향이 군산인가 그랬던 여자 AD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둘은 몇 시간 동안 TV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이회창 후보가 치고 올라오면 어 어.. 비명을 지르고, 김대중 후보가 앞서면 두 손을 모으면서 기도하며 발을 구르고.... 휴일 밤이었기에 사무실엔 우리 셋 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래서 그들은 그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처럼 사람들이 득시글거렸더라면 비상구 계단에 나가서 라디오를 듣고 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또 TV를 보더라도 지금처럼 감정을 홍수처럼 드러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내가 찍은 사람이 리드를 지키는데 심통을 부릴 이유도 없었지만 나는 짐짓 부산 사투리 모드로 전환하여 큰 소리를 냈다.

"쉐이들아. 김대중 선생님이 그리 좋나?"

눈물 주룩주룩 흘리던 여자 AD가 울먹이며 답을 해 왔어.

"김대중이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냥 마음이 가요. 선배는 모를 거예요. "
"모르긴 멀 몰라? 나도 찍었다이까네.."
"몰라요.... 선배.. 선배는 몰라요.. 선배는 편하게 김대중 찍으라고 이야기하고 다니셨죠? 저희는 김대중 찍어달라고 주위 사람한테 말 한 마디도 못했어요. 전라도 애들이란 말 들을까봐.... 선배랑 저희랑은 그게 차이예요 "

.......................


물론 나는 그 아이들을 지금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건 일종의 낙인 같은 거니까. 낙인을 찍혀 보지 않은 사람이 낙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위선 아니면 망상일 테니까. 하지만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가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갔고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를 나는 이해하게 됐다.

그건 굳건하고 철저하기까지 한 비상식에 대한 도전의 몸부림이었을 거라고...... 그들이 왜 이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 왜 한묶음으로 치부되어 듣도보도 못한 고향 사람들의 허물까지 뒤집어 써야 하는지, 대한민국 군대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된 사람들의 혼이 중천을 떠돌고 있는데 그 떼죽음의 가해자들에게 표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99% 투표'의 비아냥을 들어야 하는지, 뚜렷한 정치적 입장이 없더라도 그들에게는 복장 터지는 현실이었을 것이고, 슬픈 세상이었을 것이고, 억울하여 미칠 것 같은 나라였을 테니까.

집에 들어왔을 때 아내와 장모님은 울고 있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여쭤 봤을 때 장모님은 "글쎄 아무렇지도 않아야 되는데 자꾸 눈물이 나네. 에이고 얼마나 저 양반이 고생혔던가." 라고 말을 흐렸다. 1997년 12월 17일. 기억 속에서 지우기 어려운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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