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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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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1.12 지리산 빨치산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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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3년 11월 12일 최후의 빨치산 소멸

전쟁이 끝난 뒤도 10년 뒤였다. 이승만이 하와이로 쫓겨가고 장면 정권이 들어섰다가 선글라스 낀 작달막한 장군이 나라를 틀어쥐었고 그가 군복을 벗고 선거를 치러 대통령이 된 뒤의 일이었다. 지리산 인근 마을에서 총성이 울렸고 한 명이 시체가 되어 널부러졌다. 다른 한 명은 살아남았지만 엉덩이에 총알을 맞았다. 피를 너무 흘린 나머지 건물 안으로 옮겨졌을 때 허연 형광등이 오렌지색으로 보일 정도로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결국 다리 하나를 잘라야 했고 그 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는다. 피고의 이름은 정순덕. 남한에서 살아남았던 마지막 빨치산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자였다.
...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그 애국심을 본받자는 이들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리고 그녀가 죽기 전에 받았던 그 경의를 대해 구태여 폄하할 마음도 없다. 하지만 그녀의 일생을 살펴 보면 선생님이고 나발이고, 애국심이고 무엇이고 그저 안스러운 마음 뿐이다. 그녀는 1933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건 ‘정감록’에 심취했던 할아버지가 고향을 버리고 심심산골 지리산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버지는 대충 훈장 노릇을 할 정도로 글줄이나 익혔지만, 딸에 대해선 완고했다. 글을 알면 시집가서 시집살이 고되다고 편지할까봐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이다. 10여년 전 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는 야학을 취재했을 때 나는 똑같은 말을 들었다. “우리 때는 시집가서 편지한다고 글을 안가르쳤어요.”


나이 열 여섯 살에 입 하나 덜자고 정순덕은 인근 마을 성씨네로 시집을 간다. 1950년 1월이었다. 다행히도 남편은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알콩달콩 정을 쌓아가던 무렵 전쟁이 터지고 원래 빨치산세가 강하던 산청 지역은 일찌감치 인공 치하에 들어간다. 남편은 인공 치하에서 팔자에 없는 감투를 썼고 전세가 뒤집히자 그 감투는 목을 자르는 작두가 됐다. 농투산이 남편은 무슨 사상이 투철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군이 후퇴하면서 발휘했던 그 꼼꼼한 학살의 공포는 남편을 산으로 내몰았다. 부부의 생이별이었고 고난의 시작이었다. 가난도 가난이려니와 걸핏하면 찾아와 빨갱이 남편 내놓으라며 치고 밟는 경찰과 청년단의 횡포는 수십년 지난 뒤까지도 정순덕의 치를 떨게 할 정도였다.


1951년 겨울, 정순덕은 남편의 옷가지와 식량을 싸들고 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꿈처럼 남편을 만나지만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은 스무 날도 못되었다. 남편은 곧 죽음을 당했고 그녀는 빨치산의 일원으로 살아야 했다. “ 적은 것을 여럿이 갈라 먹을 수 있도록 요리를 해야하고, 또 부상병을 간병하는데도 여성의 손길이 필요”(정순덕의 증언)했고 그녀 또한 그 대의에 동의했기에 산에 머물렀지만, 사실 그녀는 내려올 수도 없었다. 일자무식에 남편은 죽어 없고, 빨치산의 마누라로 공인된 여자가 산을 내려간들 뭘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전투 훈련을 받았고 빨치산이 됐다. 물론 그녀에게 정치적 열망 같은 건 없었다고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이념을 선택한 것이었을까. 돌아갈 곳 없는 절망감과 남편의 원수들에 대한 증오, 해 주는 것 없이 괴롭히기만 했던 나라에 대한 환멸 그 모든 것이 뭉쳐진 결심이 아니었을까. 허무하게 죽어버린 남편과 달리 그녀는 끈덕지게 살아남았다. 그녀가 몸서리치게 기억하는 지리산 대성동 초토화 때에도 죽음을 면했고, 이현상, 박영발 등 빨치산 총수들이 죽어갈 때에도 그녀는 살아남았다.

2차대전 때 참전했던 일본군 병사가 계속 숨어 지내다가 필리핀이나 동남아시아 밀림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리지만 그건 치안이 확보되지 않은 상하(常夏)의 밀림에서의 타잔같은 삶일 뿐이었다. 하지만 정순덕은 춘하추동 분명하고 겨울에 산에서 잠을 자다간 동태 꼴이 되기 십상인 지리산에서 13년을 치러 낸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체포로 남한 빨치산의 역사는 영원히 막을 내렸다.

체포 뒤 사형을 구형받았을 때 그녀는 “조금이라도 감형하면 개놈이다!”라고 외쳤고, 국선변호인에게도 “집어치워! 어서 죽이기나 하라고!”라고 악을 쓰기도 했다. 그녀가 50년대에 체포되었더라면 사형을 면치 못했겠지만 이미 ‘망실 공비’로 분류되던 마지막 빨치산에게 재판부는 약간의 ‘정상’을 참작한다. 판결문은 이렇다.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행위는 형벌의 책임이 무겁기는 하나 농촌에서 무식한 아녀자로서 16세에 결혼, 신혼 6개월만인 625전쟁 때 남편을 따라 입산한 것이 동기가 되어 정치적인 확고한 신념 없이 13년 동안 산에서 짐승 같은 생활을 하면서 남편의 희생물이 된 정상을 참작한다.” 그래서 무기징역이었다.


그로부터 그녀는 23년을 복역한다. 풀려난 뒤에는 음성 꽃동네에도 몸을 의탁했고, 인형 눈도 붙이고, 봉투도 만들면서 생을 이어나가야 했다. 지리산에서의 13년을 제외하면 그 전이나 후나 그녀는 항상 바닥이었다. 그래도 전쟁만 아니었다면 소작 붙여먹는 농사꾼의 아내로서 순풍순풍 7남매쯤 낳아서 그 중에 잘된 자식의 효도를 받으며 호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의 폭풍은 그녀의 인생을 완벽하게 망가뜨렸다. 비전향 장기수들을 잠깐 취재하면서 고향도 남쪽이고 가족도 남쪽에 있는 이들이 왜 다 늙어서 북한으로 가려고 할까 고민한 적이 있는데 정순덕을 생각하면 그 답이 풀리는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가치없거나 비참하지만은 않았음을 확인하고, 자신의 삶을 치하하고 존중하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정순덕은 북으로 가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송환 대상에서 제외된다. ‘비전향’ 장기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전향서를 쓴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전향서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양심선언(?)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2004년 뇌출혈로 쓰러져 인천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묘비명은 이런 것이었다. “마지막 빨치산 영원한 여성전사 하나된 조국의 산천에 봄꽃으로 돌아오소서.” 박복한 나라에 태어나 평생 몸 한 번 편히 하지 못하고 살았던 기구한 여인 (물론 그녀도 민간인 학살의 죄는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의 묘 앞에 바쳐진 그 정도 헌사도 쉽게 용납되지는 않았다. HID 즉 대북첩보부대 출신 ‘청년 동지회’들이 그 묘비를 망치로 들부숴 놓았던 것이다. 그때 저승의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963년 11월 12일 그날 총알이 내 심장에 박히뿌렸어야 되는 긴데. 그래가 동무들처럼 아무 데나 파묻힜으면 이 꼴은 안봤을 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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