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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1 아홉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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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11일 아홉 개의 목숨을 가진 사나이의 최후


2004년 11월 11일 프랑스의 어느 병원에서 한 남자가 죽었다. 죽은 곳은 분명했지만 그의 일생을 반추함에 있어 그가 출생한 곳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한 반응들이 있었다. “그는 1929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는 발표가 있자 프랑스에 주재하던 한 나라의 외교관이 격렬하게 들고 일어났다. “그는 카이로에서 태어났단 말이야! 내가 여러 번 그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죽은 이는 자신의 출생지가 카이로라고 확인한 적이 없고 예루살렘에 묻히기를 소망했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망자의 이름은 야세르 아라파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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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어린 시절의 일부는 예루살렘과 함께였다. 1차대전 중 유태인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영국 외상 아서 밸푸어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얘기를 한 것이 1917년이었으니 그 뒤 10여년 동안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유태인들은 부지기수였고 터줏대감이었던 아랍인들과 치열한 다툼을 벌일 때였다. 어린 시절의 아라파트는 유태인들이 자신의 친척집을 박살내는 꼴을 목격한다. 그것은 그의 운명과도 같은 이스라엘과의 기나긴 투쟁과 대립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이 건국한 뒤 팔레스타인을 떠난 아라파트는 지하조직 파타(Fatah)를 결성하고1964년 12월 31일 이스라엘의 송수관을 폭파하면서 그 존재를 드러낸다. ‘6일 전쟁’으로 유명한 제 2차 중동전에서 그는 자신의 조직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는 이스라엘 군을 국경도시 카라메에서 격파함으로써 아랍의 영웅이 된다. 이스라엘의 기습으로 초장에 국면을 그르쳤던 아랍인들은 환호했고 아라파트의 조직은 수백명에서 1만 단위로 불어난다. 그리고 그는 PLO의 초대 의장이 이스라엘에 의해 죽음을 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의장이 된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그는 이스라엘과 그 후견인 미국의 철천지 원수였다. 뮌헨에서 이스라엘 선수단을 습격한 검은 9월단의 배후였고, 70여 회를 헤아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공격의 주도자였다. 영화 ‘뮌헨’에서 보듯 복수의 화신이 된 이스라엘인들은 아라파트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됐으나 그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위기를 모면하여 ‘아홉 목숨을 가진 고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너희들은 보는 대로 죽이리라”는 식으로만 공격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공개적인 공격을 통해 PLO를 아랍의 대 이스라엘 항전의 거멀못으로 만든 정치적 수완가였고, 궁극적으로는 평화를 꿈꾸고 추구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UN 정기 총회에서 권총을 차고 연단에 오른 그는 이렇게 말했다. “ 한 손에는 권총, 한 손에는 올리브 가지 (평화)를 들고 있습니다. 내 손에서 올리브가지가 떨어지지 않게 하시오.”

1988년 그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테러를 포기했다. 어쩌면 그것은 현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반 세기가 되어 가는 이스라엘, 세계 최강대국의 후원을 받는 군사 강국을 테러로 격침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하지도 않는 이들에게는 그의 행동은 일종의 배신이었고 목숨이 아까운 기회주의자의 투항에 불과했다. 반면 이스라엘은 구제가 불가능한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을 거둔 적이 없었고 그가 말하는 평화란 테러리스트의 연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그 틈바구니에서 그의 말년은 기구하고 비참했다. 가택에 연금된 채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면 사살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위협에 봉착해야 했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서 입술을 떨면서 “이제는 순교하는 수 밖에 없다.”라고 뇌까리던 왕년의 열혈 투사는 일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오히려 그는 죽은 후에 더 큰 거인으로 남았다. 그의 장례식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숙적 이스라엘도 그의 장례식을 일일이 방송에 담았다.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별 호의가 없는 우리나라 외무 장관까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니 거의 모든 세계가 그를 추도했다.

그가 배신했다거나 기회주의자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평생 그는 견결한 투사였다 동시에 적대와 폭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응어리가 커질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에게 올리브 가지를 들도록” 해 달라고 호소하던 정치인이기도 했다. 대통령 욕심에 대의를 버리고 이스라엘에게 붙었다는 비난을 들었으나 어쩌면 그허약하고 가난하며 존재감도 극히 미약한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의 가장 큰 의미요 공헌이었는지도 모른다. 야세르 아라파트.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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