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39년 11월 10일 창씨개명과 이광수
몇 년 전 일본의 자민당 간부 아소 다로가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이 원해서 한 것”이라는 망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만주에 간 조선인들이 일본 여권을 내놓을 때 김씨니 이씨니 라고 표기된 경우 만주인들이 대번에 조선인임을 알아보므로 일본식 이름을 갖기를 원했고 이런 요청에 부응한 것이 1939년 11월 10일 ‘조선민사령’으로 공포된 창씨개명이라는 것이다. 이 자체가 웃기는 소리이기도 하거니와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의 착취와 동원을 쉽게 하기 위한 장치였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이가 전혀 없이” 총알받이로 내세우기 위한 강제 징병의 전단계이고 민족 말살의 기도였다.
...
일본 기원(?) 2600주년을 맞은 1940년 2월 11일(일본 기원절) 본격적으로 실시된 창씨개명은 ‘가문’에 관한 집착 하나는 전 세계에서도 특출난 관심을 보이는 조선 사람들에게 큰 반발을 샀다. 어떤 이는 미나미 총독에게 편지로 그 부당함을 준엄하게 꾸짖은 뒤 목숨을 끊었고, 어떤 농부 전병하는 ‘전농병하’라고 창씨개명을 했는데 이를 일본어로 읽으면 ‘덴노 헤이까’가 되었으므로 면사무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어떤 센스있는 인물은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라)고 창씨개명하여 이것이 반항인지 장난인지 일본 관헌을 헛갈리게 만들었다. “성을 간 놈은 개새끼”라는 뜻으로 견자(犬子)로 바꾼 이도 있었다.
일제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초반에는 10퍼센트 미만이었던 창씨개명률은 70퍼센트로 훌쩍 뛰어올랐다. 아무개 김씨 무슨 권씨의 꼬장꼬장함은 금새 창씨개명 중에서 그 의미를 조금이라도 살려 보려는 쩨쩨함으로 사그라들었다. 이를테면 안동 권씨들은 ‘권안’이나 ‘안동’ ‘권동’ 등으로 창씨했고 하동 정씨의 일부는 ‘하동’으로 결정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도요다라는 이름을 얻고 현 대통령이 아키히로가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국가 시책’에 부응하지 않는 국민이 어떤 대접을 받는가를 잘 아는 이들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창씨에도 격조(?)가 있었다. 적당히 본관 따고 성씨를 변형시켜 뒤에는 쓰는 이름 갖다 붙인 것은 아랫것들(?)의 행태였다. 매국노의 대표 선수격이라 할 송병준은 “조선식 이름은 촌스럽다.”고 하여 노다 헤이지로라는 완연한 일본식 이름으로 탈바꿈했고, 문필가 주요한은 일본의 ‘八紘一宇’ (신무 천황이 정복 사업을 끝낸 후 온 천지가 한 집이 되었다고 선포했다는 데서 온 말)을 따서 마쓰무라 고이찌 (松村宏一)라고 멋드러진 일본 이름을 지었다.
그 중 제일은 역시 춘원 이광수였다. 그는 일본의 시조격인 신무 천황이 즉위했다는 향구산에서 그 성을 따와 ‘향산’이라 했고 일본인의 이름에 향용 사용되는 사내 랑(郞)을 써서 이름을 만들었다. 향산광랑(香山光郞). 2.8 독립선언문의 작성자이며 일본인들조차 “조선 문학의 대어소 (최고위라는 뜻)”이라 일컬었던 이광수의 이름은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인스러운 이름으로 바뀌었다.
언젠가 한 대학 교수가 이광수의 ‘향산’은 일본의 신무 천황의 향구산이 아니라 그의 고향 평안도의 명산 묘향산을 뜻하는 것이며, 그의 친일 또한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는 투의 주장을 한 바 있지만 그렇게 이해해 주기엔 그는 일본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 강했고 그 티를 자심하게 드러냈다. 자신을 존경하여 찾아온 후학 앞에서 라디오에 나오는 일본 천황의 음성에 허리를 깊숙이 숙이던 그는 이미 ‘뼈 속까지 친일’이었다. 후일 그가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고 주장한 것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조선인이 일본의 군부대신도 되고, 내부대신도 되는” 꿈을 꾸고 있었고, 그것이 진정한 조선 민족의 발전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 질서에 앞장서 편입되고, 일본보다 더 일본화하는 것이 조선 민족의 살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일본이 창씨개명을 ‘권장’ 내지 ‘강요’한 이후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가졌다. 창씨개명한 자체를 친일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하물며 자신의 의사를 가지지도 못한 나이에 일본에서 태어났다거나 일본 이름을 가졌다고 하여 현직 대통령을 ‘친일파’ 내지 ‘일본놈’으로 몰아붙이는 일부 ‘진보’들의 폭력은 매우 혐오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기억해야 할 것은 1939년 오늘 공포된 창씨개명이 아니라 이광수가 보여 주었듯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같이 보이기를 갈망했던” 태도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민족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던 그야말로 ‘아햏햏한’ 풍경이다. 향산광랑이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던 세월로부터 7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그 대상만 바꾼 채 지속되고 있는 꼬락서니는 과연 없을까.
1939년 11월 10일 창씨개명과 이광수
몇 년 전 일본의 자민당 간부 아소 다로가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이 원해서 한 것”이라는 망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만주에 간 조선인들이 일본 여권을 내놓을 때 김씨니 이씨니 라고 표기된 경우 만주인들이 대번에 조선인임을 알아보므로 일본식 이름을 갖기를 원했고 이런 요청에 부응한 것이 1939년 11월 10일 ‘조선민사령’으로 공포된 창씨개명이라는 것이다. 이 자체가 웃기는 소리이기도 하거니와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의 착취와 동원을 쉽게 하기 위한 장치였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이가 전혀 없이” 총알받이로 내세우기 위한 강제 징병의 전단계이고 민족 말살의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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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원(?) 2600주년을 맞은 1940년 2월 11일(일본 기원절) 본격적으로 실시된 창씨개명은 ‘가문’에 관한 집착 하나는 전 세계에서도 특출난 관심을 보이는 조선 사람들에게 큰 반발을 샀다. 어떤 이는 미나미 총독에게 편지로 그 부당함을 준엄하게 꾸짖은 뒤 목숨을 끊었고, 어떤 농부 전병하는 ‘전농병하’라고 창씨개명을 했는데 이를 일본어로 읽으면 ‘덴노 헤이까’가 되었으므로 면사무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어떤 센스있는 인물은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라)고 창씨개명하여 이것이 반항인지 장난인지 일본 관헌을 헛갈리게 만들었다. “성을 간 놈은 개새끼”라는 뜻으로 견자(犬子)로 바꾼 이도 있었다.
일제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초반에는 10퍼센트 미만이었던 창씨개명률은 70퍼센트로 훌쩍 뛰어올랐다. 아무개 김씨 무슨 권씨의 꼬장꼬장함은 금새 창씨개명 중에서 그 의미를 조금이라도 살려 보려는 쩨쩨함으로 사그라들었다. 이를테면 안동 권씨들은 ‘권안’이나 ‘안동’ ‘권동’ 등으로 창씨했고 하동 정씨의 일부는 ‘하동’으로 결정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도요다라는 이름을 얻고 현 대통령이 아키히로가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국가 시책’에 부응하지 않는 국민이 어떤 대접을 받는가를 잘 아는 이들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창씨에도 격조(?)가 있었다. 적당히 본관 따고 성씨를 변형시켜 뒤에는 쓰는 이름 갖다 붙인 것은 아랫것들(?)의 행태였다. 매국노의 대표 선수격이라 할 송병준은 “조선식 이름은 촌스럽다.”고 하여 노다 헤이지로라는 완연한 일본식 이름으로 탈바꿈했고, 문필가 주요한은 일본의 ‘八紘一宇’ (신무 천황이 정복 사업을 끝낸 후 온 천지가 한 집이 되었다고 선포했다는 데서 온 말)을 따서 마쓰무라 고이찌 (松村宏一)라고 멋드러진 일본 이름을 지었다.
그 중 제일은 역시 춘원 이광수였다. 그는 일본의 시조격인 신무 천황이 즉위했다는 향구산에서 그 성을 따와 ‘향산’이라 했고 일본인의 이름에 향용 사용되는 사내 랑(郞)을 써서 이름을 만들었다. 향산광랑(香山光郞). 2.8 독립선언문의 작성자이며 일본인들조차 “조선 문학의 대어소 (최고위라는 뜻)”이라 일컬었던 이광수의 이름은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인스러운 이름으로 바뀌었다.
언젠가 한 대학 교수가 이광수의 ‘향산’은 일본의 신무 천황의 향구산이 아니라 그의 고향 평안도의 명산 묘향산을 뜻하는 것이며, 그의 친일 또한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는 투의 주장을 한 바 있지만 그렇게 이해해 주기엔 그는 일본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 강했고 그 티를 자심하게 드러냈다. 자신을 존경하여 찾아온 후학 앞에서 라디오에 나오는 일본 천황의 음성에 허리를 깊숙이 숙이던 그는 이미 ‘뼈 속까지 친일’이었다. 후일 그가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고 주장한 것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조선인이 일본의 군부대신도 되고, 내부대신도 되는” 꿈을 꾸고 있었고, 그것이 진정한 조선 민족의 발전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 질서에 앞장서 편입되고, 일본보다 더 일본화하는 것이 조선 민족의 살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일본이 창씨개명을 ‘권장’ 내지 ‘강요’한 이후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가졌다. 창씨개명한 자체를 친일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하물며 자신의 의사를 가지지도 못한 나이에 일본에서 태어났다거나 일본 이름을 가졌다고 하여 현직 대통령을 ‘친일파’ 내지 ‘일본놈’으로 몰아붙이는 일부 ‘진보’들의 폭력은 매우 혐오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기억해야 할 것은 1939년 오늘 공포된 창씨개명이 아니라 이광수가 보여 주었듯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같이 보이기를 갈망했던” 태도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민족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던 그야말로 ‘아햏햏한’ 풍경이다. 향산광랑이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던 세월로부터 7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그 대상만 바꾼 채 지속되고 있는 꼬락서니는 과연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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