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19년 11월 9일 의열단과 김원봉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의 한 중국인 집 안에는 상기된 얼굴의 조선인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13명. 윤세주, 이성우 등이 좌정한 가운데 날카로운 눈매에 잘생긴 얼굴의 한 청년이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경상도 사투리 짙게 배어나오는 그의 언어는 정연하면서 매서웠다. 스물 세 살의 개띠 청년. 그러나 어느 범보다도 무섭고 어떤 용보다도 날래게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을 뒤흔들 사람이었다. 그 이름은 김원봉. 그의 주도 하에 ‘의열단’이 결성된다.
...
의열단은 애초부터 그 정체성을 명확히 했다. 평화적인 만세 운동이 어떻게 짓밟히는가를 똑똑히 본 이상 평화로운 수단으로 뭘 어째 보겠다는 것은 신기루만도 못한 일이 되어 버렸으며, 실력 양성하여 후일을 기약하고 어쩌고 따위는 그들에게 비겁자의 변명 이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폭력 투쟁을 내세웠다. 일제 요인 암살과 일제 주요 기관 공격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들의 용기를 일깨우고 그 힘을 끌어내겠다는, 80년대 학생운동 식으로 말하면 ‘선도투쟁’을 감행하고자 했다. 규모는 작아도 철저하게 훈련된 소수 역량을 통해 일제의 식민 통치에 타격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의열단은 이를 위해 아예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목표를 채택했다 5개의 파괴대상으로는 우선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 사업 등으로 인해 조선인들의 원한이 하늘을 갈랐던 동양척식회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 그리고 식민통치의 촉수인 각 경찰서와 주요 기관을 들었다. 그리고 죽여야 하고, 또 죽여도 되는 ‘7가살’의 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이하 일본 고관 ,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토호 등을 명시했다. 이 의열단의 정신을 신채호가 그 사나운 명문으로 표현한 것이 유명한 “조선 혁명 선언이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이후 1920년대 초반 의열단의 이름은 조선을 뒤흔들었다. 1920년 박재혁이 부산경찰서를 공격하여 서장을 폭사시킨 것을 필두로 의열단원들은 일본 경찰의 공포의 대상이자 최고의 목표물이 됐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터뜨린 나석주, 종로경찰서를 들부수고 1대 20의 총싸움에서 그 대부분을 쏘아 넘어뜨린 명사수로서, 이후 주택가 지붕 위를 오르내리면서 무려 1000명의 경찰들과 맞서 싸우다가 마지막 한 발로 자살한 영화 주인공같은 의거의 주인공 김상옥 등 쟁쟁한 인물들이 의열단원이었고, 심지어 황옥 경부같은 조선인 경찰 고위 간부까지도 의열단에 포섭되어 폭탄을 반입하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가히 의열단의 이름은 신화적 존재였다. 의열단에 소속된 젊은이들, 일제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며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보내던 젊은이들은 가히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들은 언제나 단정하게 옷을 입고 최고의 멋을 내면서 수영과 테니스를 즐기며 여생(?)을 만끽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멋쟁이 청년들은 여성들의 모성 본능과 공주 본능을 동시에 자극했고, 비장하기까지 한 로맨스는 끊이지 않고 청년들의 짧은 젊음을 빛냈다고 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신화적인 인물은 역시 의열단의 ‘수괴’ 김원봉이었다. <아리랑>에서 김산은 김원봉을 이렇게 소개한다.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관한 자료를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기미년 이후 친일파와 일본 관헌,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최대의 공겁의 대상이었고, 나와 같은 20대 전후의 젊은이들에게는 조국 해방의 상징적 존재였다.”
김산에 따르면 그를 찾느라 눈이 벌건 일본 경찰들 사이를 뚫고 다니면서도 두려운 빛 하나 없는 태연한 얼굴로 도서관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남자. 헤프게 웃지도 않고 태산처럼 무거우면서 누구나 그 이름만 들어도 선망과 존경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남자가 되겠다. 이쯤 되면 내 페북 여성 동무들 가운데에서도 자기 신랑 바라보면서 내가 왜 저런 사람이랑 사노 싶은 사람이 적지 않으렸다.
1919년에 의열단을 결성한 이후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일제 경찰에 잡히지 않았다. 고향 밀양에 돌아왔을 때 그 앞에 레드 카펫이 깔릴 정도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그는 좌익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이 아닌 한국 경찰에 체포된다. 이때 그를 체포한 이가 그 이름도 유명한 친일 경찰 노덕술이었다. 김원봉은 체포 당시 화장실에 있었는데 노덕술은 옷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그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개 끌 듯 끌고 갔다. “어허 옷이나 좀 입고......”를 부르짖었을 김원봉, 수십 년 동안 객지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 투쟁을 했던 중년의 전사(戰士)의 속내가 어떠했을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의열단 동지 유석헌에 따르면 김원봉은 이후 사흘 동안을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런 수모를 겪은 그가 월북을 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열혈 민족주의자였던 그에게 북한은 또 하나의 험지였다. 더구나 독립투쟁을 한 것은 맞지만 김원봉에 비하면 그다지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김일성이 절대 권력을 쌓아나가는 와중에 김원봉의 이름은 그다지 유용한 것이 못되었다. 그의 월북을 설득했던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 되어 죽어간 후 그의 명도 그렇게 길지 못했다. 1958년 환갑을 맞은 해를 마지막으로 그의 자취는 사라졌고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옥중에서 자살했다고 한다.
1919년 11월 9일 열변을 토하며 의열단 탄생을 주도하던 스물 셋의 청년, 평생을 민족 독립을 위해 소진한 한 독립운동가의 정확한 최후를 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그리고 남과 북은 합작으로 그를 역사의 미아로 만들었다.
1919년 11월 9일 의열단과 김원봉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의 한 중국인 집 안에는 상기된 얼굴의 조선인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13명. 윤세주, 이성우 등이 좌정한 가운데 날카로운 눈매에 잘생긴 얼굴의 한 청년이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경상도 사투리 짙게 배어나오는 그의 언어는 정연하면서 매서웠다. 스물 세 살의 개띠 청년. 그러나 어느 범보다도 무섭고 어떤 용보다도 날래게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을 뒤흔들 사람이었다. 그 이름은 김원봉. 그의 주도 하에 ‘의열단’이 결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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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은 애초부터 그 정체성을 명확히 했다. 평화적인 만세 운동이 어떻게 짓밟히는가를 똑똑히 본 이상 평화로운 수단으로 뭘 어째 보겠다는 것은 신기루만도 못한 일이 되어 버렸으며, 실력 양성하여 후일을 기약하고 어쩌고 따위는 그들에게 비겁자의 변명 이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폭력 투쟁을 내세웠다. 일제 요인 암살과 일제 주요 기관 공격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들의 용기를 일깨우고 그 힘을 끌어내겠다는, 80년대 학생운동 식으로 말하면 ‘선도투쟁’을 감행하고자 했다. 규모는 작아도 철저하게 훈련된 소수 역량을 통해 일제의 식민 통치에 타격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의열단은 이를 위해 아예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목표를 채택했다 5개의 파괴대상으로는 우선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 사업 등으로 인해 조선인들의 원한이 하늘을 갈랐던 동양척식회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 그리고 식민통치의 촉수인 각 경찰서와 주요 기관을 들었다. 그리고 죽여야 하고, 또 죽여도 되는 ‘7가살’의 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이하 일본 고관 ,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토호 등을 명시했다. 이 의열단의 정신을 신채호가 그 사나운 명문으로 표현한 것이 유명한 “조선 혁명 선언이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이후 1920년대 초반 의열단의 이름은 조선을 뒤흔들었다. 1920년 박재혁이 부산경찰서를 공격하여 서장을 폭사시킨 것을 필두로 의열단원들은 일본 경찰의 공포의 대상이자 최고의 목표물이 됐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터뜨린 나석주, 종로경찰서를 들부수고 1대 20의 총싸움에서 그 대부분을 쏘아 넘어뜨린 명사수로서, 이후 주택가 지붕 위를 오르내리면서 무려 1000명의 경찰들과 맞서 싸우다가 마지막 한 발로 자살한 영화 주인공같은 의거의 주인공 김상옥 등 쟁쟁한 인물들이 의열단원이었고, 심지어 황옥 경부같은 조선인 경찰 고위 간부까지도 의열단에 포섭되어 폭탄을 반입하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가히 의열단의 이름은 신화적 존재였다. 의열단에 소속된 젊은이들, 일제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며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보내던 젊은이들은 가히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들은 언제나 단정하게 옷을 입고 최고의 멋을 내면서 수영과 테니스를 즐기며 여생(?)을 만끽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멋쟁이 청년들은 여성들의 모성 본능과 공주 본능을 동시에 자극했고, 비장하기까지 한 로맨스는 끊이지 않고 청년들의 짧은 젊음을 빛냈다고 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신화적인 인물은 역시 의열단의 ‘수괴’ 김원봉이었다. <아리랑>에서 김산은 김원봉을 이렇게 소개한다.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관한 자료를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기미년 이후 친일파와 일본 관헌,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최대의 공겁의 대상이었고, 나와 같은 20대 전후의 젊은이들에게는 조국 해방의 상징적 존재였다.”
김산에 따르면 그를 찾느라 눈이 벌건 일본 경찰들 사이를 뚫고 다니면서도 두려운 빛 하나 없는 태연한 얼굴로 도서관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남자. 헤프게 웃지도 않고 태산처럼 무거우면서 누구나 그 이름만 들어도 선망과 존경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남자가 되겠다. 이쯤 되면 내 페북 여성 동무들 가운데에서도 자기 신랑 바라보면서 내가 왜 저런 사람이랑 사노 싶은 사람이 적지 않으렸다.
1919년에 의열단을 결성한 이후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일제 경찰에 잡히지 않았다. 고향 밀양에 돌아왔을 때 그 앞에 레드 카펫이 깔릴 정도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그는 좌익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이 아닌 한국 경찰에 체포된다. 이때 그를 체포한 이가 그 이름도 유명한 친일 경찰 노덕술이었다. 김원봉은 체포 당시 화장실에 있었는데 노덕술은 옷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그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개 끌 듯 끌고 갔다. “어허 옷이나 좀 입고......”를 부르짖었을 김원봉, 수십 년 동안 객지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 투쟁을 했던 중년의 전사(戰士)의 속내가 어떠했을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의열단 동지 유석헌에 따르면 김원봉은 이후 사흘 동안을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런 수모를 겪은 그가 월북을 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열혈 민족주의자였던 그에게 북한은 또 하나의 험지였다. 더구나 독립투쟁을 한 것은 맞지만 김원봉에 비하면 그다지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김일성이 절대 권력을 쌓아나가는 와중에 김원봉의 이름은 그다지 유용한 것이 못되었다. 그의 월북을 설득했던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 되어 죽어간 후 그의 명도 그렇게 길지 못했다. 1958년 환갑을 맞은 해를 마지막으로 그의 자취는 사라졌고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옥중에서 자살했다고 한다.
1919년 11월 9일 열변을 토하며 의열단 탄생을 주도하던 스물 셋의 청년, 평생을 민족 독립을 위해 소진한 한 독립운동가의 정확한 최후를 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그리고 남과 북은 합작으로 그를 역사의 미아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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