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불꽃이 되다
오늘은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럴리도 없지만) 아마 산하의 오역을 앞으로 10년을 쓴다 해도, 11월 13일은 다른 일을 다룰 여유가 없을 것 같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법치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기본원리로 삼는다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폐병으로 쓰러져가는 열 서넛 시다들의 권리를 제발 살펴 달라고 호소하면서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육신을 스스로 불구덩이에 밀어 넣었다.
...
전태일이 죽은 며칠 뒤부터 김재준 목사나 기타 한국 기독교의 거인들 (조용기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이 제기했고, 문익환 목사는 “전태일이야말로 예수였다.”고 선언했거니와 나는 전태일처럼 예수와 닮은 삶을 산 이를 본 적이 없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 고로 인해서 자연히 다른 감정에도 잘 동화되며 남자인 내가 불쌍한 광경으로 인해서 코언저리가 시큰할 때가 많으니까 말입니다.”(전태일 평전 중)고 말하는 스무살의 노동자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란 말이야. 이 말에 율법이고 예언자고 하는 군상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라고 설교하던 서른 셋의 목수가,
차비를 털어 나이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 주고 청계천에서 수유리까지 휘파람 불고 걸어가던 뭉툭하고 작은 눈의 청년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한테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가가 중요해. 그게 곧 나한테 대하는 거니까.”라고 말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음에도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지지 않는 잔이라면 아버지 뜻대로 하시오.”라고 결연하게 말하던 마리아의 아들과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라고 주먹을 부르쥐었던 이소선의 아들. 이 둘 간에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김진호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건' 속에서 예수는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곧 사건은 부활 신앙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시간의 장벽을 뚫고 공간의 담장을 넘어서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예수 부활의 자리가 '교회'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부활 신앙의 내용이 교리가 아니라 역사적 체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한반도 남단의 사람들은 오래 전에 우리 곁을 떠나버린 예수 그분을 '전태일 사건'을 통해서 읽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내 살이니 받아먹고 기념하라 이것은 내 피이니 마시고 나를 잊지 마라”고 한 유태인 청년처럼 2000여년 뒤의 한국 청년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절규하며 스스로 제단의 제물이 됐다. 로마 제국이 건재하던 시기의 변방 속주 청년의 십자가를 기리는 붉은 색 네온은 사방에 그득하고, 일요일만 되면 그 이름을 부르고 “나와 같은 죄인 살리기 위해 죽으신” 그 은혜에 감읍하는 목청이 성층권까지 울리는 나라에 살면서, 그와 거의 동일한 삶을 살았던 동양인 예수의 마지막 소원에 왜 이리 면구스러워지는 걸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예수는 가까이에 있다. 아멘. 핍박받고 외면받는 가난한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 강도에 찔려 쓰러진 자들을 자신의 몸을 던져 돕는 모든 이들은 예수고 전태일이다. 그들이 우리가 될 때, 세상은 천국에 한 발 다가서겠지.
문익환 목사의 시다.
한국의 하늘아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내 이름은 전태일이다
,
한국의 산악들아 강들아 들판들아 마을들아
한국의 소나무야 자작나무야 칙덩굴아 머루야 다래야
한국의 뻐꾸기야 까마귀야 비둘기야 까치야 참새야
한국의 다람쥐야 토끼야 노루야 호랑이야 곰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은 전태일이다
백두에서 한라에서 불어오다가
휴전선에서 만나 부둥켜안고 뒹구는
마파람아 높파람아
동해에서 서해에서 마주 불어오다가
태백산 줄기에서 만나 목놓아 우는
하늬바람아 샛바람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이라고 뭐 다르겠느냐
우리의 이름도 전태일이다
깊은 땅 속에서 슬픔처럼 솟아오르는
물방울들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이라고 들어야 알겠느냐
한국 땅에서 솟아나는 물방울치고
전태일 아닌 것이 있겠느냐
가을만 되면 말라
아궁이에도 못 들어갈 줄 알면서도
봄만 되면 희망처럼 눈물겨웁게 돋아나는
이 땅의 풀이파리들아
너희의 이름도 전태일이더냐
그야 물으나마나 전태일이다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죽음과 맞서 싸우는
미싱사들 시다들의 숨소리들아
너희의 이름이야 물론 전태일일 테지
여부가 있나
우리가 전태일이 아니면
누가 전태일이겠느냐
tag : 산하의오역
오늘은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럴리도 없지만) 아마 산하의 오역을 앞으로 10년을 쓴다 해도, 11월 13일은 다른 일을 다룰 여유가 없을 것 같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법치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기본원리로 삼는다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폐병으로 쓰러져가는 열 서넛 시다들의 권리를 제발 살펴 달라고 호소하면서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육신을 스스로 불구덩이에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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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이 죽은 며칠 뒤부터 김재준 목사나 기타 한국 기독교의 거인들 (조용기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이 제기했고, 문익환 목사는 “전태일이야말로 예수였다.”고 선언했거니와 나는 전태일처럼 예수와 닮은 삶을 산 이를 본 적이 없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 고로 인해서 자연히 다른 감정에도 잘 동화되며 남자인 내가 불쌍한 광경으로 인해서 코언저리가 시큰할 때가 많으니까 말입니다.”(전태일 평전 중)고 말하는 스무살의 노동자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란 말이야. 이 말에 율법이고 예언자고 하는 군상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라고 설교하던 서른 셋의 목수가,
차비를 털어 나이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 주고 청계천에서 수유리까지 휘파람 불고 걸어가던 뭉툭하고 작은 눈의 청년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한테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가가 중요해. 그게 곧 나한테 대하는 거니까.”라고 말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음에도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지지 않는 잔이라면 아버지 뜻대로 하시오.”라고 결연하게 말하던 마리아의 아들과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라고 주먹을 부르쥐었던 이소선의 아들. 이 둘 간에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김진호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건' 속에서 예수는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곧 사건은 부활 신앙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시간의 장벽을 뚫고 공간의 담장을 넘어서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예수 부활의 자리가 '교회'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부활 신앙의 내용이 교리가 아니라 역사적 체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한반도 남단의 사람들은 오래 전에 우리 곁을 떠나버린 예수 그분을 '전태일 사건'을 통해서 읽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내 살이니 받아먹고 기념하라 이것은 내 피이니 마시고 나를 잊지 마라”고 한 유태인 청년처럼 2000여년 뒤의 한국 청년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절규하며 스스로 제단의 제물이 됐다. 로마 제국이 건재하던 시기의 변방 속주 청년의 십자가를 기리는 붉은 색 네온은 사방에 그득하고, 일요일만 되면 그 이름을 부르고 “나와 같은 죄인 살리기 위해 죽으신” 그 은혜에 감읍하는 목청이 성층권까지 울리는 나라에 살면서, 그와 거의 동일한 삶을 살았던 동양인 예수의 마지막 소원에 왜 이리 면구스러워지는 걸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예수는 가까이에 있다. 아멘. 핍박받고 외면받는 가난한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 강도에 찔려 쓰러진 자들을 자신의 몸을 던져 돕는 모든 이들은 예수고 전태일이다. 그들이 우리가 될 때, 세상은 천국에 한 발 다가서겠지.
문익환 목사의 시다.
한국의 하늘아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내 이름은 전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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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악들아 강들아 들판들아 마을들아
한국의 소나무야 자작나무야 칙덩굴아 머루야 다래야
한국의 뻐꾸기야 까마귀야 비둘기야 까치야 참새야
한국의 다람쥐야 토끼야 노루야 호랑이야 곰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은 전태일이다
백두에서 한라에서 불어오다가
휴전선에서 만나 부둥켜안고 뒹구는
마파람아 높파람아
동해에서 서해에서 마주 불어오다가
태백산 줄기에서 만나 목놓아 우는
하늬바람아 샛바람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이라고 뭐 다르겠느냐
우리의 이름도 전태일이다
깊은 땅 속에서 슬픔처럼 솟아오르는
물방울들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이라고 들어야 알겠느냐
한국 땅에서 솟아나는 물방울치고
전태일 아닌 것이 있겠느냐
가을만 되면 말라
아궁이에도 못 들어갈 줄 알면서도
봄만 되면 희망처럼 눈물겨웁게 돋아나는
이 땅의 풀이파리들아
너희의 이름도 전태일이더냐
그야 물으나마나 전태일이다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죽음과 맞서 싸우는
미싱사들 시다들의 숨소리들아
너희의 이름이야 물론 전태일일 테지
여부가 있나
우리가 전태일이 아니면
누가 전태일이겠느냐
tag : 산하의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