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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3.11 열여섯의 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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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19년 3월 11일 열 여섯 살의 독립만세 

노래 <이 산하에> 2절은 이렇다. “기나긴 밤이었거든 죽음의 밤이었거든 춘삼월 하늘에 출렁이던 피에 물든 깃발이어든 목메인 그 함성 소리 고요히 이 어둠 깊이 잠들고 바람 부는 묘지 위에 취한 깃발만 나부껴 나는 노여워 우노라.” 이 2절은 기미년 3.1 항쟁을 노래한 것이다. “3.1운동” 하니 어떤 어린 친구들은 새마을 운동 비슷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같던데 3.1 운동은 무려 7500명이라는 사람들이 죽어간 유혈항쟁이었다. 물론 무기를 들고 일어선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인들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만세 시위를 통해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전 세계에 입증시켰다.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의 만세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항쟁은 시작됐고 기독교 천도교의 거점이라 할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3월 10일 이후는 만세 소리가 완연하게 남하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학생들이 경부선과 호남선 열차를 타고 내려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독려했으며 고종 황제의 장례식 참관을 위해 상경했다가 지방으로 내려간 이들이 전한 만세 시위 소식은 남도 사람들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반도 동남쪽 끄트머리의 부산도 그랬다. 부산은 옛날부터 왜관이 있던 곳이고 최초의 개항지였으며 1919년쯤에는 일본인이 부산 인구의 반을 차지할만큼 그 기세가 등등했다. 당연히 우글거리는 상전들을 모시고 사는 부산 사람들의 속은 편할 리가 없었다. 그 감정을 불쑥 드러낸 것이 1916년 전차 사고로 인한 시위다. 오늘날의 부산 범일동 부근에서 전차가 조선인 4명을 치고 그 중 1명이 사망하자 삽시간에 모여든 부산 시민들은 돌팔매를 퍼붓고 전차를 뒤집어 버렸고 이를 저지하려고 달려온 순사가 탄 전차마저도 박살을 내 버렸던 것이다. 

이런 차에 3월 1일의 소식이 전해졌으니 부산 역시 조용할 까닭이 없었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내려온 서울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읽어 주며 부산 학생들을 독려했고 학생들은 시위 준비에 착수했다. 그런데 부산의 독립만세의 일성을 가장 먼저 터뜨린 학생들은 뜻밖에도 나이 열 여섯의 앳된 일신여학교 (오늘날 동래여고) 학생들이었다. 그 주역은 교사 주경애였다. 그녀는 부산상업학교 등 부산의 다른 학교 교사,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3월 10일 수업을 마친 후 상기된 표정의 교사와 학생들은 학교 기숙사에 모여들었다. 

“어머니께서 저를 출가시킬 때 쓰려고 장만해 둔 혼수감 목양목을 어머니 몰래 끄집어내서 기숙사로 가지고 와서 초저녁에는 기숙사 벽장 속에 숨어 있다가 밤 열 시가 넘어 불빛이 창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이불로 창을 가리고 목양목에다 대접을 엎어서 동그라미를 그리고 붉은 물 검은 물로 칠해 태극기를 만들었어요.” (일신여고 졸업생 김반수의 증언) 

나이 열여섯. 요즘으로 치면 중3과 고1을 왔다갔다 하는 나이. 댕기 머리의 앳된 여학생들이 쪼르르 기숙사로 숨어들어 혹시나 누가 무슨 눈치라도 챌까봐 밤 늦도록 벽장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었던 풍경을 떠올려 본다. 잔뜩 겁은 먹었겠지만 서로 서로 쉿 쉿 입에 손가락 대 가면서 초침 가는 소리만 고대하던 벽장 속의 소녀들을. 혼숫감으로 사용할 천 움켜쥐고 대접을 얹어 동그라미를 그리고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그 위에 태극을 그려넣던 모습을. 그렇게 그들은 밤새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3월 11일 수업을 마치고 해가 기울었을 때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밤새 만든 태극기 100 여장을 옷 속에 감추고 교문을 나선다. 그 대열에는 외국인 교사들도 합세하고 있었다. 밤 아홉 시의 부산 좌천동 거리. 콩당거리는 가슴을 태극기로 다독이던 이들이 기어코 부산 경남 최초의 만세 소리를 내지른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이게 우리 국깁니더 받아가이소. 조선은 독립했습니더. 만세 부릅시더. 만세 부릅시더. 시민들의 호응도 열렬했고 시위는 밤 11시까지 이어진다. 경악하여 출동한 일본 경찰이 여학생들과 교사들을 연행하면서 일단 마무리되긴 했지만 여학생들은 그 서슬 시퍼런 경찰 앞에서도 맹랑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제 밥을 뺏으면 돌려 달라고 웁니더. 하물며 우리는 나라를 돌려 달라는 건데 뭐가 나쁩니꺼.” (일신여학교 학생 김응수) 

학교에는 휴교령이 떨어지고 학생들은 6개월, 교사들은 1년 6개월 선고를 받는다.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거사에 참여했던 여교사 임말이와 그 동생 임망이(학생)이 친척이던 경찰에게 논의 전말을 다 털어놓은 뒤 석방되자 이 두 ‘배신자’의 추방을 전교생이 요구했고 열흘간의 동맹 휴학 끝에 결국 이 둘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 후로도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옥중의 교사와 학생들이 돌아올 때까지 졸업식을 거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버텼다고 한다. 일신여학교 시위는 이틀 뒤 동래고보의 만세 시위로 이어졌고 이어 만세 소리는 부산 경남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일신여학교가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 결코 잊지 못할 박차정 (의열단장 김원봉의 부인)과 유신 독재에 맞서 투쟁했던 윤보선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박정희 대통령도 누님이라고 불렀다는 야당의 맹장 박순천 등의 맹렬 여성들을 낳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 박시연, 학생 김반수, 심순의, 김응수, 김탄출, 김신복, 송명진, 김순이, 박정수, 김봉애, 김복선, 이명시...... 1919년 3월 11일 부산을 뒤흔들었던 만세의 주인공들이다. (사진 속 주정애는 주경애가 맞는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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