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898년 3월 10일 만민공동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의 시작
1898년 3월 10일 서울 종로 거리는 부산했다. 단발 입고 양복 입은 개화 신사부터 아직 상투에 갓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 머리를 땋은 소년들, 나무꾼들, 장사치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종로 거리로 몰려든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고 발걸음과 표정은 단호하기 이를데 없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20만을 밑돌았지만 종로 거리에 모여든 사람들의 수는 1만을 넘어섰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 인구 천만 잡고 50만의 인파가 종로를 뒤덮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러시아 놈들에게 나라를 내 줄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우렁차게 연설을 시작하자 종로 바닥은 그대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난무하는 집회장이 되어 버렸다.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피했다가 돌아와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제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왕이 황제가 되고 왕국이 제국이 됐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열강들은 다투어 대한제국의 이권을 뜯어갔고 러시아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베베르 공사는 그나마 온건한 편이었다. 그 뒤를 이은 스페이에르 러시아 공사는 더욱 거침이 없었다. 이 무렵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은 오늘날의 부산 영도였다.
러시아는 경치좋은 태종대가 있는 이 섬을 조차하여 자신들의 해군 함대의 석탄 저장소를 두고자 했다. 독립협회 등 한국인들은 이에 반발했고 잇단 성토대회를 열었지만 친러파가 장악한 정부는 절영도 (영도) 조차를 허용할 기세를 보였다. 거기에 한러은행이라는 것이 생겨서 러시아의 경제적 침략까지도 염려되는 국면에 이르자 독립협회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보고 대규모 집회를 조직한다. 이것이 만민공동회의 시작이었다. 현공렴, 홍정후, 이승만(우리가 아는 그 사람) 등이 백목천 파는 가게 다락에서 사자후를 토했고 의장은 쌀장수 현덕호였다.
군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그들의 연설에 동조했고 허약하기 이를데없는 대한제국 정부와 대한제국을 만만한 호구에 깨지 못한 은자(隱者)의 나라로 보고 있던 서양인들 모두가 경악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놀란 사람들은 시민들 자신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한 목소리로 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틀 뒤 3월 12일에는 또 수만 명이 몰려 러시아를 성토하며 자주독립을 외쳤다. 이번에는 한 발 더 나갔다. 시위대 군인들이 해산을 시도하자 돌을 던져 그들을 물리쳐 버린 것이다. “절영도 조차 반대! 아라사놈들 물러가라.” ‘깨어있는 시민’은 언제나 무능한 정부에 위협적이다. 정부는 절영도 조차를 거부했고 러시아는 요동으로 석탄 저장소를 옮겨야 했다.
한 번 자신의 위력을 인식한 대중만큼 용감한 존재도 드물다. 서울 시민들은 연일 토론회를 열며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며 자주독립의 미래를 열변에 실었다. 초기에는 독립협회가 주도했으나 이미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의 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몇 달에 걸쳐 집회가 이어졌고 급기야 10월 1일에는 철야 시위가 시작됐다. 근대적 법제도의 실시와 간세배들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무려 12일 동안 시민들은 덕수궁 앞에서 철야하면서 황제에게 탄원한다. 나무꾼들이 나무를 해 와 장작으로 기부하고 열정적인 시민들은 한뎃잠을 자며 그 시위를 지켰다. 결국 정부가 또 한 번 굴복한다. 박정양, 민영환 등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내각을 출범시킨 것이다.
그래도 만민공동회는 끝나지 않았다. 근대적 의회 설립과 간신배 축출 요구는 지속됐고 점차 격화됐다. 박정양 등 관료들까지 참여한 관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그 개막 연설자는 뜻밖에도 백정이었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백정이 대신과 나란히 연단에 올라 토해 낸 부르짖음은 이러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몽매한 자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롭게 하고 인민을 편하게 하는 길은 관민이 합심한 이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遮日: 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자면 힘이 부족하지만 만일 많은 장대로 힘을 합친다면 그 힘은 매우 튼튼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관리와 백성이 힘을 합하여 우리 대황제의 훌륭한 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영원토록 무궁하게 합시다.”
전제군주로서의 권력을 포기할 수 없던 고종은 이미 만민공동회를 짓밟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6월께에 이미 독립협회에 맞선 황국협회를 조직해 놨었고 3차 만민공동회에서 결의되어 제출된 헌의6조를 받아들이는 체 하면서 전국의 보부상들을 집결시켜 만민공동회를 습격한다. 이 와중에 사람이 죽어 나가기도 했지만 11월 말 쏟아지는 초겨울비 속에서 서울 시민들은 감동적인 시위를 벌인다. “일반 농민, 나무꾼, 종로의 시전 상인들, 기생과 찬양회를 중심으로 한 여성, 심지어 걸인과 아이까지”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더 단호했다. 외국에게는 갈대보다 못하게 휘청거렸던 정권이지만 자국 국민들의 개혁 호소에는 철권을 휘둘렀고 이간질을 서슴지 않았으며 제 백성을 사주하여 제 백성을 쳤다. 백성들이 그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충성을 다짐했던 군주는 자신의 알량한 권력을 위해 백성들의 뒤통수를 쳤다. 결국 자신의 백성을 패배시킨 군주, 내부로부터의 개혁의 싹을 잘라버린 군주의 나라는 7년 뒤 외교권을 잃었고 12년 뒤에는 나라 자체의 이름이 없어지고 말았다.
적어도 1898년의 봄부터 겨울까지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은 뭔가 바뀔 것 같은 희망과 뭔가 바꾸고 싶은 열정으로 그득했다. 마치 110년 뒤의 ‘촛불 시위’처럼. 연일 철야하면서 서울 거리를 뒤덮고 공권력을 압도하며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스스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가 어떻게 끝났고 그 뒤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보면 더럭 겁이 난다. 스스로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 시민의 요구가 위정자나 기득권층의 사사로운 이권에 질식하는 나라가 잘 될 리가 없었다는 것은 만민공동회의 전말이 입증하고 있으므로. 2008년 서울 거리를 뒤덮었던 100만 서울 시민들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그 중의 하나였던 나는?
1898년 3월 10일 만민공동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의 시작
1898년 3월 10일 서울 종로 거리는 부산했다. 단발 입고 양복 입은 개화 신사부터 아직 상투에 갓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 머리를 땋은 소년들, 나무꾼들, 장사치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종로 거리로 몰려든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고 발걸음과 표정은 단호하기 이를데 없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20만을 밑돌았지만 종로 거리에 모여든 사람들의 수는 1만을 넘어섰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 인구 천만 잡고 50만의 인파가 종로를 뒤덮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러시아 놈들에게 나라를 내 줄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우렁차게 연설을 시작하자 종로 바닥은 그대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난무하는 집회장이 되어 버렸다.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피했다가 돌아와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제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왕이 황제가 되고 왕국이 제국이 됐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열강들은 다투어 대한제국의 이권을 뜯어갔고 러시아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베베르 공사는 그나마 온건한 편이었다. 그 뒤를 이은 스페이에르 러시아 공사는 더욱 거침이 없었다. 이 무렵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은 오늘날의 부산 영도였다.
러시아는 경치좋은 태종대가 있는 이 섬을 조차하여 자신들의 해군 함대의 석탄 저장소를 두고자 했다. 독립협회 등 한국인들은 이에 반발했고 잇단 성토대회를 열었지만 친러파가 장악한 정부는 절영도 (영도) 조차를 허용할 기세를 보였다. 거기에 한러은행이라는 것이 생겨서 러시아의 경제적 침략까지도 염려되는 국면에 이르자 독립협회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보고 대규모 집회를 조직한다. 이것이 만민공동회의 시작이었다. 현공렴, 홍정후, 이승만(우리가 아는 그 사람) 등이 백목천 파는 가게 다락에서 사자후를 토했고 의장은 쌀장수 현덕호였다.
군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그들의 연설에 동조했고 허약하기 이를데없는 대한제국 정부와 대한제국을 만만한 호구에 깨지 못한 은자(隱者)의 나라로 보고 있던 서양인들 모두가 경악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놀란 사람들은 시민들 자신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한 목소리로 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틀 뒤 3월 12일에는 또 수만 명이 몰려 러시아를 성토하며 자주독립을 외쳤다. 이번에는 한 발 더 나갔다. 시위대 군인들이 해산을 시도하자 돌을 던져 그들을 물리쳐 버린 것이다. “절영도 조차 반대! 아라사놈들 물러가라.” ‘깨어있는 시민’은 언제나 무능한 정부에 위협적이다. 정부는 절영도 조차를 거부했고 러시아는 요동으로 석탄 저장소를 옮겨야 했다.
한 번 자신의 위력을 인식한 대중만큼 용감한 존재도 드물다. 서울 시민들은 연일 토론회를 열며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며 자주독립의 미래를 열변에 실었다. 초기에는 독립협회가 주도했으나 이미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의 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몇 달에 걸쳐 집회가 이어졌고 급기야 10월 1일에는 철야 시위가 시작됐다. 근대적 법제도의 실시와 간세배들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무려 12일 동안 시민들은 덕수궁 앞에서 철야하면서 황제에게 탄원한다. 나무꾼들이 나무를 해 와 장작으로 기부하고 열정적인 시민들은 한뎃잠을 자며 그 시위를 지켰다. 결국 정부가 또 한 번 굴복한다. 박정양, 민영환 등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내각을 출범시킨 것이다.
그래도 만민공동회는 끝나지 않았다. 근대적 의회 설립과 간신배 축출 요구는 지속됐고 점차 격화됐다. 박정양 등 관료들까지 참여한 관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그 개막 연설자는 뜻밖에도 백정이었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백정이 대신과 나란히 연단에 올라 토해 낸 부르짖음은 이러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몽매한 자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롭게 하고 인민을 편하게 하는 길은 관민이 합심한 이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遮日: 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자면 힘이 부족하지만 만일 많은 장대로 힘을 합친다면 그 힘은 매우 튼튼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관리와 백성이 힘을 합하여 우리 대황제의 훌륭한 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영원토록 무궁하게 합시다.”
전제군주로서의 권력을 포기할 수 없던 고종은 이미 만민공동회를 짓밟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6월께에 이미 독립협회에 맞선 황국협회를 조직해 놨었고 3차 만민공동회에서 결의되어 제출된 헌의6조를 받아들이는 체 하면서 전국의 보부상들을 집결시켜 만민공동회를 습격한다. 이 와중에 사람이 죽어 나가기도 했지만 11월 말 쏟아지는 초겨울비 속에서 서울 시민들은 감동적인 시위를 벌인다. “일반 농민, 나무꾼, 종로의 시전 상인들, 기생과 찬양회를 중심으로 한 여성, 심지어 걸인과 아이까지”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더 단호했다. 외국에게는 갈대보다 못하게 휘청거렸던 정권이지만 자국 국민들의 개혁 호소에는 철권을 휘둘렀고 이간질을 서슴지 않았으며 제 백성을 사주하여 제 백성을 쳤다. 백성들이 그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충성을 다짐했던 군주는 자신의 알량한 권력을 위해 백성들의 뒤통수를 쳤다. 결국 자신의 백성을 패배시킨 군주, 내부로부터의 개혁의 싹을 잘라버린 군주의 나라는 7년 뒤 외교권을 잃었고 12년 뒤에는 나라 자체의 이름이 없어지고 말았다.
적어도 1898년의 봄부터 겨울까지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은 뭔가 바뀔 것 같은 희망과 뭔가 바꾸고 싶은 열정으로 그득했다. 마치 110년 뒤의 ‘촛불 시위’처럼. 연일 철야하면서 서울 거리를 뒤덮고 공권력을 압도하며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스스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가 어떻게 끝났고 그 뒤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보면 더럭 겁이 난다. 스스로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 시민의 요구가 위정자나 기득권층의 사사로운 이권에 질식하는 나라가 잘 될 리가 없었다는 것은 만민공동회의 전말이 입증하고 있으므로. 2008년 서울 거리를 뒤덮었던 100만 서울 시민들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그 중의 하나였던 나는?